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21화 (21/133)

21화

5장. 약속의 땅(6)

“드디어 도착이네요.”

눈앞에 얼음의 땅이 넓게 펼쳐졌다. 나무 하나 자라지 않아 휑한 허허벌판 한가운데로 센느의 영주성이 초라하게 서 있다.

메리는 가혹하게 불어닥치는 눈 섞인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먼저 마차에서 내려섰다.

“워렌, 우리 병사들과 가신들을 보호해.”

“예, 뒤따르겠습니다. 공자님.”

토바 가문의 일원이 모두 불안한 표정으로 정문에 모여들었다.

사전에 이야기도 없이 머나먼 폰네시에서 후계자가 들이닥치다니, 인근 소영지의 일원으로서 두려울 만한 일이었다.

레온은 마차에서 내려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토바 일가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폰네시에서 온 레온 몬데이어라고 합니다.”

“어, 어찌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센느의 영주 아이작 토바입니다.”

아이작 토바가 습관적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툭 튀어나온 앞니를 숨기느라 꽉 다물고 있는 입술에서 긴장이 느껴졌다.

“우,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갑작스러운 방문이지만 폰네시의 후계자를 이렇게 혹한에 세워둘 순 없었다.

아이작 토바가 뒤뚱거리며 서둘러 영주성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토바 부인과 그의 자녀들 사이 중에 키가 한참이나 작은 덴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빠르게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야, 덴. 센느에서 보니 더욱 반갑네.”

“네가 오는 줄 몰랐어! 어떻게 된 거야?”

그러고 보니 마지막 서신에 답장을 했을 무렵까지도 센느행은 결정되지 않았다.

루시오에게 센느에 대한 지원을 다시 한번 청해 보겠다는 답장이 마지막이었는데.

“설명하자면 길어.”

“하나도 빼놓지 말고 설명해 줘야 해, 레온.”

“당연하지.”

레온이 손을 뻗어 덴의 어깨를 두드렸다.

타세트의 항해단을 물러나게 한 일등 공신이었으므로 레온도 덴에게 깊은 고마움이 있었다.

“근데.”

“응?”

영주성으로 들어서는 동안 앞쪽에서 누군가가 계속 둘을 흘끔거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덴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레온이 덴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군데 아까부터 널 못 잡아먹어 안달인 표정으로 보는 거야?”

“으응, 내 동생 미셸이야….”

“동생이라고?”

그러고 보니 머리만 길지 덴과 똑같이 생겼다.

“날 좋아하지 않아, 내 동생은.”

덴이 시무룩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지 않아도 미셸에게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충분히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환영합니다. 이곳이 우리 센느의 영주성입니다….”

말하고도 자신이 없는지 아이작 토바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는 중이었다.

워렌과 브라운, 몇몇 따라온 가신들을 제외한 열둘의 병사들은 모두 정문 앞에 서 있었다.

레온은 등 뒤로 문이 닫히는 것을 보며 아이작에게 이곳에 온 목적을 설명했다.

“전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

“뜻이라면….”

“지난 스무 해 동안 그랬던 것처럼 폰네시는 앞으로도 센느를 지원할 겁니다.”

덴의 표정이 밝아졌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던 토바가의 식솔들은 벌써부터 호들갑을 떨었다.

“물론 우리 쪽도 조건은 있습니다.”

조건이 있단 목소리에 아이작 토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는 건 애초에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런 관계는 오래지 않아 삐걱거리게 되는 게 당연했다.

“뭐, 그건 차차 이야기하도록 하고요.”

레온은 북부 거점인 센느를 데로니스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폰네시를 빼앗기지 않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라피스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이 얼음의 땅에 묻혀 있다는 사실이 가장 컸다.

“방문 목적을 분명히 알렸으니, 먼 여행을 하느라 지친 우리 병사들에게 쉴 곳을 내어주시길 정중히 청합니다.”

“…그건.”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우리 병사들은 그저 저를 지키기 위해 동행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무려 열둘이었다.

완전 무장을 한 폰네시의 정예 기사병이 열둘이나 영주성에 들어오게 되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덴이 초조하게 표정을 굳혔다. 폰네시에서 후계자를 이곳까지 보낸 건 분명한 호의였다.

이 혹한에 북부까지 레온이 직접 오다니.

아이작의 대답 하나에 폰네시가 이대로 뜻을 거둔다 해도 억울할 게 없을 정도였다.

“손님이잖아요, 손님. 북부에서 추위에 떠는 손님에게 야박하게 구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요, 아버지?”

그때 미셸이 짝, 박수를 치며 주위를 끌었다.

그녀가 말을 꺼내자 곁에 서 있던 토바 부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래요. 이곳까지 오느라 모두 지쳤을 텐데, 계속 밖에 서 있게 둘 순 없죠.”

“센느의 영주로서 자비를 베푸세요, 아버지.”

“손님들을 어서 성안으로 들여라. 장작을 최대한 때우고 온도를 높이도록 해!”

“예, 부인!”

그의 식솔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곧바로 문이 열리며, 내내 추위와 싸워온 병사들이 내부로 들어섰다.

레온이 부인과 미셸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미셸은 세상을 다 가진 수줍은 표정으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쩌면 우리만 조건 요구를 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브라운이 곁에 서 있는 메리 부인에게 속삭였다. 어째 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식으로 엮이길 바라는 것 같다.

감히 우리 도련님을 넘봐?

메리는 언짢은 표정으로 콧김을 내뿜었다.

“안 될 일이죠. 폰네시가 지원을 해주는 것만도 최고의 조건인데!”

“그렇긴 합니다.”

센느의 영주성이 폰네시의 손님들로 가득 찼다.

폰네시 궁성에 비해 그 규모가 몹시 협소하고 보잘것없었지만, 추위를 피하기엔 완벽한 곳이었다.

브라운이 토바 부인에게 웃는 낯으로 다가갔다. 손님으로 머무는 것을 허락받았으니 슬슬 거처를 배정받아야 했다.

“한데 어쩌죠? 이… 이 많은 분들을 모두 수용할 만큼 충분한 방이 마련돼 있지 않은데.”

병사들 서넛이 한 방을 쓴다 하더라도 부족했다.

레온에게 온전한 방 하나를 주고 나면 여성과 남성으로 나눠 분배를 고려했을 때 몇 사람은 지하 감옥에서 눈을 붙여야 했다.

“워낙 좁기도 해서.”

토바 부인은 말하면서도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성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찾아온 것도 처음이거니와, 영지민들의 민가까지 손을 벌리기엔 영주의 체면이 말도 안 됐다.

하루걸러 하루 사는 사람들에게 낯선 이를 재워 달라 부탁하는 건 센느의 통치 가문으로서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메리와 한 방을 쓸게.”

어차피 따라온 여 시종들은 많지 않았다. 메리 한 사람만 빠져준다면 한 방에서 수용이 가능할 정도였다.

레온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미셸이 눈을 깜빡거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어머, 아직도 유모를 곁에 두세요, 공자님?”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다. 레온이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미셸은 레온의 잘생긴 얼굴에 깜짝 놀라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제대로 전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이제 유모가 아니라 여인을 가까이 두실 나이죠, 열아홉이라면.”

아마 물을 마시고 있었다면 반드시 뿜었을 것이다.

브라운은 먹지도 않은 무언가가 가슴에 얹히는 기분에 켁켁거렸다.

워렌도 분위길 살폈다. 공자의 유모 의존도는 들리는 소문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일반적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떨어져 본 적 없는 각별한 사이라 해도 유모를 곁에 둘 나이는 한참 지났다.

“나이가 들면 가족이 필요하지 않나? 별 소릴 다 듣는군.”

레온이 미셸에게 쏘아붙였다. 어쨌든 메리가 곤란해지는 건 싫었다.

“하지만 메리가 나 때문에 피곤할 수는 있겠어.”

레온이 표정 없는 얼굴로 뒤편에 서 있는 브라운과 워렌을 바라봤다. 두 사람도 레온을 바라봤다.

“나도 남자들과 방을 쓰는 게 더 편하긴 하지.”

레온이 너스레를 떨었다.

과연 우리 공자님께선 누굴 선택하실까?

브라운은 아닌 척하면서 긴장으로 입 안이 바싹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난 말이야.”

레온이 금세 고민을 거두고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곧은 손가락을 뻗어 멍하니 이 상황을 관망 중이던 덴을 가리켰다.

“내 친구 덴과 한 방을 쓰겠어.”

“누구, 나?”

“그래, 덴. 괜찮지?”

“뭐? 무, 물론이지!”

브라운은 눈치가 빠르고, 워렌은 조용해서 싫다. 게다가 두 사람은 자신에게 관심이 아주 많았다.

지켜봐야 할 대상이나 지켜야 할 대상으로서 한 방에 내내 함께 있는 건 그 무엇보다 불편한 일이었다.

‘덴이라면 주무르기 쉬우니까.’

반면, 저 착하고 순박한 친구는 일말의 불편함도 주지 않았다.

센느에 대해서도 조잘조잘 쉬지 않고 털어놓을 테니 함께 지내기엔 적격이었다.

“흠흠! 그럼 조금 뒤 저녁 만찬에서 뵙겠습니다. 먼 곳까지 찾아주셨으니 최대한 성의 있는 음식을 대접하지요.”

아이작 토바가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내뱉었다.

레온이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제 식구들에게 명했다.

“이곳까지 오느라 모두 고생했어. 다들 쉬도록 해.”

“예, 공자님!”

***

레온은 성의 있는 만찬을 대접받고 방 안으로 돌아와 루시오에게 보낼 서신을 모두 적었다.

이곳은 우리 폰네시에게 가장 중요한 거점입니다.

토바 가문의 충성을 받아내고, 반드시 아버지께서 좋아할 만한 선물을 들고 갈게요.

언젠가 오직 바다만 알고 있는 이 센느의 비밀을 알려준다면, 그가 직접 이곳에 오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레온은 루시오의 깜짝 놀랄 얼굴을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폰네시에도 혹한의 절기가 찾아갔겠군요. 다시 만날 날까지 건강 잘 챙기세요. -레온으로부터.

“레온, 서신은 다 썼어?”

뜨겁게 데워온 포도주를 건네며 덴이 물었다.

“마침 모두 적었어, 덴.”

“전서조는 탑층에 있어. 시종을 부를까?”

“아니야. 직접 가는 게 좋겠어.”

덴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등불을 들었다. 너무도 긴 혹한의 밤은 참 빨리도 찾아온다.

레온이 컴컴한 복도를 지나 탑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한참이나 밟았다. 위로 갈수록 더욱 폭풍 같은 바람이 몰아쳤다.

“아르고.”

덴이 손을 뻗었다. 앙상한 팔에 거대한 전서조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멋있게 생겼네.”

“실례야, 레온. 우리 아르고는 암컷이거든.”

북부의 새라 그런지 깃털이 지금껏 본 그 어떤 새보다 더욱 두텁고 멋들어졌다.

레온이 손을 뻗어 아르고의 부리를 매만졌다.

동물들은 순수해서 그런가. 아무리 흉포한 짐승이라 하더라도 인어의 영혼이 담긴 레온의 손길은 곧잘 얌전히 받아들였다.

“폰네시까지 잘 부탁해.”

아르고가 발치에 매달린 서신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긴 날개를 양옆으로 멋지게 내뻗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 새하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

레온이 탑 벽 가까이 다가섰다.

“멋있지?”

아르고가 날아간 하늘 아래, 마치 끝이 없을 것만 같은 드넓은 얼음의 땅이 보였다.

“그러게.”

“내가 센느를 사랑하는 이유야.”

세상의 끝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세상이 시작된 곳일지도 모른다.

경계 없이 넓게 펼쳐진 얼음은 태초의 모습 그대로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녹지 않았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아?”

아무리 해가 떠도, 불을 가까이 두어도 절대 녹지 않는다.

“깨뜨리려 해도 전혀 깨지지 않아. 정말 신비로운 얼음이야.”

“과연 그럴까.”

“응?”

절대 녹지 않고 전혀 깨지지 않는 게 얼음일 리 없다.

“내가 깨뜨릴 방법을 알아.”

“뭐?! 정말?”

레온은 발아래 아낌없이 펼쳐진 지상 최대의 광석, 다이아 스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자. 밤이 기네.”

“어떻게 깨뜨리는데?”

“글쎄.”

“레오오온!”

손에 넣으려면 아직 좀 더 공을 들여야 한다.

그걸 위해 이 땅에 왔으니.

“너 하는 거 봐서 알려줄게.”

레온이 애타는 덴을 내버려두고 여유롭게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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