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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22화 (22/133)

22화

6장. 새로운 시대(1)

시끄럽게 조잘대는 덴을 겨우 진정시켰다.

레온은 한마디만 더 하면 내쫓아 버리겠단 말로 덴의 입을 막고 드디어 잠자리에 누웠다.

“참, 덴.”

“…….”

레온이 바닥에 누운 덴 쪽으로 돌아누웠다.

“영주성 주변으로 출입 통제 구역이 있던데, 거긴 어디야?”

센느의 오른편엔 빽빽한 겨울 숲이 가득 차 있었다.

센느는 영주성을 기준으로 오른편엔 대륙과 이어진 겨울 숲이, 왼편엔 바람을 막아줄 것도 전혀 없는 얼음의 땅이다.

“…….”

레온은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하지 않는 덴을 보기 위해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고집 있게 입을 다문 표정을 보니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뭐.”

“…말하면 내쫓겠다며.”

“여긴 네 방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레온이 다시 한번 매정한 표정으로 덴을 노려봤다. 그러자 덴이 기다렸단 듯 대답을 쏟아냈다.

“주변 숲속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통제 구역이었어. 자세한 건 모르지만 위험하다고 하니 아무도 들어가지 않아.”

“이유도 모르면서 그 말을 지킨다고?”

“그야, 우리 토바 가문은 원래 그래. 원리 원칙을 따라야 하거든.”

덴이 어깨를 으쓱했다. 레온으로선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이었다.

이유도 모르고 그대로 따른다고?

‘영주성 근처 어딘가에 부서진 다이아 스틸이 이미 있을 텐데.’

바다의 기억에 따르면, 먼 미래의 어느 날 이곳에서 다이아 스틸 조각을 발견하는 사람이 생긴다.

그 사람은 녹지 않는 얼음을 신기하게 여겨 손에 넣었고, 연구하던 도중 이 물질이 얼음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강력한 물질로 무기를 만들었지.’

그게 번성하던 데로니스의 세상을 무참히 짓밟을 역사의 시작이었다.

“거길 들어가 볼 수는 없어?”

“응, 왜 들어가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포기하는 게 좋을 걸?”

의심하게 두어선 안 된다.

“뭐, 딱히 특별한 목적이 있는 건 아니야. 궁금했을 뿐이지.”

“그래, 잘 생각했어. 거기 들어가면 아버지께서 부정 탔다고 삼 일을 내리 얼음 속에 세워두거든.”

당해본 적이 있는지 덴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떨었다.

레온이 천장을 보고 바로 누웠다. 달빛이 새하얀 땅을 반사해 방 안이 온통 환해졌다.

‘동대륙이나 소하로 가야 해.’

그곳에 다이아 스틸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근데 너 정말 저걸 깨뜨릴 수 있어, 레온?”

“그냥 해본 소리야.”

“…아닌 것 같던데.”

“자자, 덴.”

얼핏 보면 얼음과 똑같지만 저 땅에 널린 다이아 스틸은 지상 최대의 강철이다.

무슨 수를 써도 변하지 않고 단단한 그 형태를 유지하는 자연의 선물.

레온은 그런 다이아 스틸을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이아 스틸을 녹일 수 있는 물질이 있다.

‘산성이 강한 정제수를 통해 녹일 수 있댔지?’

그 정제수의 원물이 바로 동대륙에 있었다. 어느 지역의 호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레온이 머릿속을 샅샅이 뒤지려 노력했다. 정신을 집중하고 수만 년의 기억을 뒤졌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피곤해서 그런가.’

뭐, 동대륙으로 가보면 되겠지. 그곳으로 가 정제수를 찾아내기만 한다면 다이아 스틸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설인의 땅인 소하에서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거야.’

동대륙이나 소하, 두 곳 모두 만만한 곳은 아니었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니, 몸 사릴 필요는 없었다.

우선 이곳에서 다이아 스틸을 담보로 거래를 마무리한 후 최대한 빠른 방법을 찾아 행선지를 정해볼 생각이었다.

‘시간이 없어.’

바다의 기억대로 흐른다면, 곧 데로니스가 폰네시를 무너뜨릴 순간이 올 것이다.

물론 그들의 손에 고분고분 당해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게 바로 이 다이아 스틸이었다.

무한에 가까운 라피스의 생명력을 꺼뜨릴 무기.

레온은 상처 남은 제 심장을 매만지며 어쩌면 불리하게 일을 키우는 건 아닐까 잠시 고민했다.

“잘 자, 레온.”

“응?”

“다시 한번 센느에 온 걸 환영해.”

덴이 상념 속에서 건져주었다. 레온이 이불을 목 끝까지 푹 덮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잘 자.”

그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고민할 필요 없다. 그간 밤이 너무 길었으니 오늘은 쉬어도 되겠지.

레온은 간만에 찾아온 편안한 잠자리에 금세 두 눈을 감았다.

***

다음 날 점심 무렵.

휴식을 취하고 있던 레온을 브라운이 다급하게 불렀다.

“공자님, 토바 영주께서 뵙자 하십니다.”

무슨 일이지. 레온은 옷차림을 정돈하고 밖으로 나섰다. 고개를 내리자 좁은 접견실이 북적거렸다.

레온은 브라운을 대동하고 사람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 여기 오시는군요.”

내내 불안해 보이던 아이작 토바의 어깨가 드디어 펴졌다.

그가 제 뒤편에 서 있던 키가 훌쩍 큰 남자를 소개해 주었다.

“여긴 이 센느의 후계자, 내 장남 히스 토바입니다.”

“반갑습니다, 레온 공자. 히스 토바라고 합니다.”

히스 토바가 휘어지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레온은 인사를 나누며 토바 가문의 일원들을 살폈다.

그들은 안도와 불안이 뒤섞인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근방 이웃 영지인 페르탈린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레온 공자께서 갑작스레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돌아왔죠.”

“환대해주니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그들과 함께 올까 하다 우선 인사를 위해 먼저 돌아왔습니다.”

히스는 어제도 만난 사람처럼 친근하게 레온에게 말을 붙였다.

‘말에 칼을 숨기는 데 재능이 있네.’

레온은 히스의 표정에서 본뜻을 읽었다.

근방 소영지를 둘러보러 가던 길에 다시 되돌아왔단 소리는 예고도 없이 이곳에 찾아온 레온을 나무라는 소리였다.

게다가 주변 영지와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 건 자신이란 분명한 메시지까지 담았다.

“이런.”

그때 위쪽에서 쉬고 있던 폰네시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병사들이 모여 있는 인파를 보고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폰네시의 병사들인가?”

“내 호위로 왔지.”

분위기가 좋지 않다. 레온이 히스와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히스가 날 선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이내 다시 휘어지게 미소 지었다.

“레온 공자, 폰네시에만 있어 당연히 우리 북부의 법칙 같은 건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히스 역시 한 발자국 가까이 레온에게 다가섰다.

“무슨 목적으로 방문했든 이곳에 무장한 타 영지 병사가 들이닥치는 법은 없답니다.”

히스가 눈을 똑바로 뜨며 레온을 바라봤다.

“전쟁을 일으키러 온 게 아니라면.”

과연 아이작 토바가 믿고 의지할 만한 장남이었다.

레온은 표정 없는 얼굴로 병사들을 돌아봤다.

“그럴 리가.”

“좋습니다. 토바에 왔다면 토바의 법을 따르는 게 당연하죠.”

지친 여정에 내내 세워두는 게 좀 걸렸을 뿐, 굳이 좁아터진 이 토바성에 머무를 필요는 없다.

“식솔들의 거처가 따로 있으니 그곳으로 보내겠습니다.”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분란은 이쪽에서도 원치 않는다. 폰네시 역시 센느로부터 얻어낼 게 있었다.

저 야욕 많고 권위적인 히스를 괜히 자극할 필요는 없다는 소리였다.

“그럼 이만.”

레온은 적의를 숨기지 않는 히스에게서 뒤돌았다. 그리고 모여 있던 병사들에게 명했다.

거처를 옮길 테니 준비하라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던 긴장감이 사그라졌다.

“참.”

히스가 다시 한번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레온을 붙잡았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자?”

“너 역시 이 성에서 나가야겠다.”

검을 든 손끝이 워렌을 가리켰다. 아니, 어쩌면 그 앞에 서 있는 레온을 가리킨 건지도 모른다.

내내 레온의 곁에 서 있던 워렌에게 칼을 겨눈 형세라 남들의 눈엔 충분히 위협적으로 보였다.

“…….”

레온이 불분명하게 겨누어진 칼끝을 바라봤다.

표정 없이 가라앉은 얼굴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화가 났다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자극하려고 애를 쓰는군.’

워렌은 일반 병사들과 다르다. 그는 공자의 곁을 가까이서 지키는 호위였다.

그런 워렌에게까지 무례를 범하는 모습을 보며 브라운이 나서려던 때였다.

“내게 명하지 마라.”

워렌이 곧장 칼을 뽑아 들고 히스의 검을 쳐냈다.

수도 없이 많은 검을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워렌이 밀어낸 힘은 도저히 받아낼 수가 없었다.

히스의 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내 법은 공자님께 위협이 되는 자를 죽이는 것 하나뿐이다.”

“…….”

“내게 법이란 오직 그것뿐인데. 따라야 할까?”

“대체 무슨 말을….”

히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보기 좋게 물들 때였다.

이러다 토바 성에서 전쟁이라도 나면 어쩌지. 전전긍긍하던 아이작 토바가 금세 워렌과 히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호위 기사에게 주군을 두고 떠나라는 법은 없지요. 됐습니다, 됐어요. 이미 병사들에게 명을 내리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토바의 법을 따르셨으니 이만하면 됩니다.”

“아버지!”

“그만! 그만해라, 히스! 이 센느의 영주는 바로 나야!”

아이작 토바가 제법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뒤편에서 부들거리던 히스가 주먹을 꽉 쥐며 입을 다물었다.

‘부자간에 갈등이 좀 있어 보이는데.’

영주인 아이작보다 히스가 휘두르는 영향력이 더욱 컸다.

아이작은 그런 후계자를 믿고 의지하면서도 한편으론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그럼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관계가 저 모양이라면 원하는 걸 쉽게 얻어내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레온이 곧장 그들에게서 시선을 털고 뒤돌았다.

***

동부 소영지 월랜드 인근의 숲.

기사 헤리스가 나무 한 그루에 제 말을 묶어두었다.

“잠시 기다려라. 상황을 좀 살펴보고 올 테니.”

튼튼한 목을 툭툭 두드려주고 발걸음을 떼었다. 얼마나 쉴 새 없이 달려왔는지 입 안이 바짝 말라 타들어갈 것만 같았다.

‘제길, 칼 그 자식만 내 말을 믿었어도.’

길라로 떠난 레온, 아니, 레브의 병사들 중에 의심되는 자들이 뒤섞여 있다.

헤리스는 오래도록 추적해 온 의심스러운 무리가 공녀와 함께 떠났다는 걸 알게 됐다.

‘비록 일리아는 지키지 못했지만 레브만큼은… 반드시 그 아이만큼은 내가 지키겠어.’

그녀의 부탁을 저버릴 순 없다. 제 오랜 친우이자 주군인 루시오에겐 차마 털어놓지 못한 마음이었다.

‘아가씨만 무사하시다면 더 이상 이 구차한 마음 때문에 빚지지 않아도 괜찮겠지.’

헤리스가 월랜드의 인근 여관으로 향했다.

묵을 방이 있나 알아보기 위한 발걸음이 지독히도 묵직했다.

무려 20년 동안 마음에 담아둔 무게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잠깐.”

왠지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헤리스는 여관 주변에 들끓는 수많은 인파를 보고 본능적으로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명령은 떨어졌나?”

“동이 터오는 즉시 진격하라는 명이 떨어졌습니다.”

진격?

헤리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대화인지 알아내야 했다. 오랫동안 기사로 살아온 그의 본능이 직감적으로 전운을 읽었다.

헤리스가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인근에서 대화하고 있는 두 사람을 자세히 살폈다.

‘저자는…!’

본 적이 있다. 최후의 협곡 전투에서 직접 검을 겨뤘던 상대였다. 볼 옆부터 가슴까지 길게 이어진 자상은 바로 자신이 만든 상처였다.

‘데로니스가 목전까지 쳐들어왔군!’

월랜드라면 폰네시에 충성을 바친 소영지다. 그들이 배신을 했다.

이대로라면 데로니스가 폰네시까지 밀고 들어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서 폰네시에 알려야 해.

헤리스가 되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뗀 순간이었다.

“잡아!”

뒤편에서 고함이 이어지고 그대로 시야가 차단당했다.

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헤리스가 그대로 흙바닥에 엎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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