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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23화 (23/133)

23화

6장. 새로운 시대(2)

폰네시의 중정 한가운데로 전서조가 날아들었다.

북부에선 흔히 전서조로 쓰는 흰발톱흑눈새 중에서도 특히 덩치가 크고 깃털이 아름다운 전서조였다.

“쉬이.”

루시오가 손을 뻗어 전서조를 불러들였다. 그 팔에 앉아 아르고가 레온의 서신을 전했다.

“…무사히 도착했구나.”

행선지를 끝까지 함구하고 템프 폭포까지 동선을 숨긴 건 잘한 일이었다.

루시오는 그 무엇보다 레온이 안전하게 센느에 도착했단 소식에 겨우 마음을 놓았다.

‘이제 헤리스만 잡아들인다면 궁성 내 불순 세력을 확인할 수 있겠지.’

거대한 전서조가 날아갈 준비를 마쳤다. 루시오는 써두었던 서신을 다시 아르고의 발목에 매어주고 부리를 쓰다듬었다.

“내 뜻을 레온에게 잘 전해주렴.”

묵직한 팔을 하늘 높이 쳐들자 아르고가 거세게 날아올랐다.

“영주님.”

중정 뒤편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몰려왔다.

가장 선두에 선 노기사 크리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골랐다.

“기사단장 헤리스 타린이 붙잡혀 왔습니다.”

추적조를 붙였다더니 삼 일도 지나지 않아 끌려왔다. 이토록 쉽게 붙잡힐 거면서.

“어디에서 발견했나.”

“폰네시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습니다. 길라로 향하는 숲속에서 잡혔습니다.”

크리크가 본관 뒤편 석탑을 가리켰다.

루시오는 무거운 표정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도대체 왜.’

아니, 어째서 배신했는지 따위는 궁금해할 게 아니다.

루시오는 그간 제 등에 칼을 내리꽂는 자들을 수없이 마주했다. 그리고 그런 자들에게 자비를 베푼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배신자는 배신자다.

오래도록 알고 지낸 유일한 친우이자 제 목숨을 내맡긴 기사단장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

루시오가 피투성이가 된 헤리스를 마주했다.

잡혀 오는 동안, 혹은 이곳에 잡혀 온 후 모진 고초를 겪었는지 상태가 아주 볼품없었다.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부디 주변을 물러주십시오, 영주님.”

헤리스가 피를 뚝뚝 흘리며 부탁했다. 제대로 된 발음이 아니어서 알아듣기 힘들었다.

“모두 물러가라.”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헤리스의 부하였던 자들이다.

루시오는 마지막 배려로 주위를 무르려 했다.

“안 됩니다, 영주님.”

그러자 노기사 크리크가 강력하게 반대했다.

“반역자와 단둘이 둘 순 없습니다.”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영주님.”

병사들이 모두 반대했다. 거절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루시오는 꿇어앉혀진 헤리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어째서 레온을 뒤따라갔지?”

눈이 부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헤리스는 흐린 초점으로 주변을 파악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진실을 밝히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길라까지 공자님을 보호하려 했습니다. …그보다.”

“거짓말을 하는군. 설령 그 말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내게 보고도 없이 급히 떠날 이유가 어디에 있지?”

몇 년 전부터 루시오는 이 폰네시에 데로니스 세력이 들어와 있다고 느꼈다. 물론 당연한 일이었다.

루시오 역시 데로니스에 제 정보책을 규모 있게 심어두었다. 데로니스라고 폰네시에 그런 일을 못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점차 내부 핵심에 그들을 돕는 자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데로니스가 세력을 확장하는 모양새가 그랬다.

폰네시가 필요로 하는 세력은 반드시 며칠 내에 빼앗겼다.

“이미 레온의 곁엔 침묵의 기사단 중 정예 병력이 붙어 있을 텐데.”

헤리스를 의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기사단장으로서 폰네시 내부의 병력을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인물이었다.

“영주님.”

헤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주변 모두를 의심하십시오. 그 누구도 믿으시면 안 됩니다.”

헤리스가 진심을 건넸다. 이것만이 중요했다. 다른 그 어떤 것들보다 루시오 공작이 마음에 새겨야 할 건 그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는 분명한 진실뿐이었다.

이제 곧 있으면 데로니스군이 쳐들어올 것이다.

헤리스는 루시오가 믿지 않아야 할 사람 안에 자신 역시 포함할 거란 사실을 알았다.

“…….”

“…….”

두 사람이 오래도록 서로를 바라봤다. 나누지 못한 감정이 오가는 사이 석탑 전체가 거세게 흔들렸다.

성문 경비를 담당하는 병사가 숨도 못 쉬고 서둘러 달려왔다.

“큰일 났습니다, 영주님!”

“…이런.”

어쩌면 그 목소리에서 이미 상황을 파악했을지 모른다.

“데로니스… 데로니스군이 밀려옵니다!”

루시오 공작이 일그러진 얼굴로 운명을 받아들였다.

***

“어려서부터 북부를 일으킬 재목으로 유명했다더군요.”

덴 없는 덴의 방에서 브라운이 보고를 이어나갔다.

“센느가 그나마 지금까지 어디에도 침략되지 않고 버틴 건 모두 히스 토바 덕분이라는 평가가 있다고 합니다.”

“도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까지 평가가 후한데?”

“검술이 무척 뛰어나고 인망이 두터워 주변 소영지들과 관계를 돈독히 쌓아오고 있는 모양이에요.”

혹한 중에 혹한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답게 센느는 자력으로 버티는 게 불가능한 환경이었다.

혹독한 추위는 말할 것도 없고, 인근 영지와도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어 고립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센느는 주로 주변 영지에서 의뢰를 받고 센느와 맞닿은 숲속에서 무리 짐승들을 토벌하며 버텨 왔습니다.”

영주성과 맞닿은 숲속을 말하는 건가. 식량도, 자원도 부족한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사실 그런 것밖에 없었다.

“히스 토바의 실력이 대단해서 문제였던 무리 짐승들을 싹 다 정리했다고 하네요.”

“인망이 두터울 수밖에 없겠네.”

“그렇죠, 공자님.”

이유가 있는 자신감이었다.

히스 토바가 이름을 떨치기 이전의 센느는 그저 북부의 끝, 황량함의 극치인 그 어느 것 하나 존재하지 않는 땅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가 북부의 문제였던 무리 짐승들을 토벌한 후 위상이 달라졌다.

북부 사람들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고 자연스레 인구가 늘었다.

‘문제는 문젠데. 이대로 둔다면 북부인들이 변하지 않는 얼음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도 있어.’

이런 상황에서 거래 조건으로 얼음의 땅을 언급한다면 히스 토바가 의문을 품을 게 분명했다.

똑똑하고 야욕이 있는 자다. 그런 이에게 본심을 쉽게 드러낼 순 없었다.

“센느에 머무르는 기간이 조금 더 길어질 수도 있겠어, 브라운.”

“다행입니다.”

“왜? 빨리 폰네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혹한의 절기가 찾아왔잖아요. 아마 올 때보다 돌아가는 게 더 어려워졌을 거예요.”

마부석에서 고생해야 하는 자신이나 워렌은 더더욱 그랬다.

브라운이 몸을 떠는 것을 보며 레온은 창밖을 살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흉흉한 소리와 함께 거센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똑똑똑!

“덴 공자님이십니까?”

오래도록 자리를 비워줬으니 충분한 실례였다.

브라운이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곧바로 문을 열었다.

“아뇨, 미셸인데요?”

이런, 낭패였다. 브라운이 미안한 표정으로 레온을 돌아봤다.

“무슨 일입니까, 미셸 양?”

“센느에 오신 지 벌써 삼 일이 됐는데 아직 구경 한번 제대로 못 하셨잖아요.”

“…그야.”

“오늘은 몸 상태가 좀 괜찮으신 것 같아서 소개해 드리려고요.”

어제도, 그제도 레온은 미셸의 만남을 거절했다.

감기 기운이 있다는 핑계와 고된 여행길로 피로감이 몰려왔다는 이유였지만, 오늘마저 거절이 먹힐 것 같지는 않았다.

“아가씨,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브라운이 곧장 문을 닫고 레온에게 다가왔다.

침대에 기대앉아 있던 레온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더 이상 토바 가문에 결례를 범하지 마세요. 만남을 청해오는 아가씨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면 싸움의 빌미가 됩니다.”

“이게 그 정도야? …정말 돌아 버리겠네.”

작정하고 다가오는 미셸을 밀어낼 방도가 전혀 없었다.

결국 레온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활짝 문을 열어젖히자 방긋 웃는 미셸이 보였다.

“…감사한 마음으로 센느를 소개받겠습니다.”

“잘됐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브라운이 멀찍이서 손을 흔들었다. 꼭 어디 슬픈 곳에 끌려가는 표정이라 마음이 착잡했다.

“마을 한가운데에 제가 좋아하는 아주 예쁜 우물이 있어요.”

미셸이 너무 조급하지 않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 미셸 역시 제니레이처럼 목적이 있을 것이다.

모두가 센느를 떠날 수 있다면 떠나고 싶어 한다니 미셸도 그런 이유이지 않을까.

‘결혼을 해야만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가? 정말 귀찮네.’

말이 나오지 않도록 좀 손을 써야겠다. 레온은 폰네시에 돌아가게 된다면 루시오에게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말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쩜 이리도 잘 어울리실까!”

“우리 아가씨에게 어울리는 짝이 드디어 나타났네요!”

“아가씨, 정말 아름다우세요!”

“대단한 한 쌍이십니다.”

영주성의 낡은 해자를 넘어가면 센느의 민가가 나왔다.

두 사람이 그곳을 걷는 동안 영지민들은 쉬지 않고 찬사를 쏟아냈다.

레온은 너무도 좋아하는 미셸과 썩 진심 같지 않은 표정의 영지민들을 보며 주변을 모두 둘러봤다.

“레온 공자, 폰네시에 비하면 우리 센느는 아주 보잘것없는 곳이죠?”

하마터면 그렇다고 대답할 뻔했다.

“뭐, 나름대로 사람 사는 냄새가 납니다.”

“어머나, 냄새가 나요?!”

“아니, 그 냄새가 아니라.”

“역시 공자에겐 민가보다 우리 영주성 구경이 더 낫겠네요!”

“둘 다 필요 없습니다.”

“아니에요. 여태껏 덴 오라버니의 방에만 계셨죠? 제가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가 드릴게요.”

미셸이 레온의 손목을 콱, 붙잡았다. 그러곤 귀한 분께 누추한 곳을 보였다며 쉬지 않고 입을 놀려댔다.

이런 문제에 대해 잘 모르는 레온도 이대로 끌려가면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레온이 재빠르게 걷는 미셸을 붙잡았다.

“잠깐, 구경하고 싶은 곳이 따로 있습니다. …미셸 아가씨가 내게 그곳을 보여준다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어딘데요?”

폭주하는 미셸을 겨우 붙잡아 세운 레온이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굴려야 산다. 레온이 갈 곳 없는 센느의 곳곳을 떠올리는 동안 미셸이 입술을 씹었다.

‘그래, 거기가 있었어.’

갈 만한 곳이 한 군데 있다.

레온이 영주성 오른편, 울창하고 빽빽하게 솟아난 겨울 숲을 가리켰다.

“금지된 곳이라고는 하지만… 입구 쪽만 살짝 가보는 것도 안 될까요, 미셸?”

“어머나? 저긴 너무 으슥한데.”

레온이 하늘을 바라봤다. 잠시 잠잠해졌던 눈보라가 다시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마음속에 피어나는 불안이 더 강력했다.

“아니… 그럼 그냥 다음을 기약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에요. 가요, 우리.”

미셸이 그대로 레온의 손목을 붙잡고 빠른 걸음으로 어둡고 으슥한 숲 쪽으로 향했다.

“토바 가문은 원리 원칙을 중요히 여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호호! 그런 건 우리 오라버니들이나 중요히 여기죠. 전 어차피 혼인을 하면 토바 가문도 아닌걸요.”

힘이 왜 이렇게 세.

평소 단련 한번 제대로 해보지 않은 레온은 미셸에게 질질 끌려 금지된 숲속 안까지 도착했다.

앙상하지만 빽빽한 나무들이 몰아치는 눈보라를 막아주었다.

미셸은 어둑어둑한 주변을 둘러보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레온을 돌아봤다.

“자, 그럼….”

그녀가 레온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두 발자국 멀어진 레온이 주변을 둘러봤다.

뭔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 단둘이 함께 있는 걸 들킨다면 히스 토바가 목 끝에 칼을 겨눌지도 몰랐다.

“저기, 미셸.”

돌아가자는 말을 하려 한 순간이었다.

레온을 바라보던 미셸의 두 눈이 두려움에 질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레온이 뒤돌아본 순간 어둠 속에서 피투성이의 누군가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꺄아아아악!”

미셸이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

어두운 숲속에 레온을 홀로 내버려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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