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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24화 (24/133)

24화

6장. 새로운 시대(3)

“덴? …너, 덴이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흠뻑 뒤집어쓴 건 다름 아닌 덴 토바였다.

“레, 레온….”

충격 받은 표정으로 덴이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레온이 서둘러 덴을 부축했다.

“윽! 이게 무슨 냄새야.”

“…….”

가까이 다가가자 코를 찌르는 악취가 느껴졌다.

레온이 옷소매로 코를 막고 덴을 바로 앉혔다.

덴은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얼굴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무슨 일이야. 너, 그보다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어? 그, 그러는 너는?”

“나야….”

레온이 순순히 대답하려다 덴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봤다.

몹시 초조하게 입술을 뜯거나 손끝을 떠는 모습도 보였다.

이 자식, 지금 나한테 말 돌리는데?

“피투성이가 되어서 갑자기 나타난 건 너야. 친구로서 네가 걱정되는 건 나고.”

“…….”

“사실대로 말해, 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덴이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처음 센느를 도와 달라 청할 때만큼 무척이나 신중한 모습이었다.

레온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덴이 결국 요리조리 눈동자를 굴리다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설명하긴 어렵고… 일단 날 따라와, 레온.”

그가 먼저 뒤돌았다. 방금 전 튀어나온 금지된 숲속 깊은 곳으로 돌아가는 그 발걸음에 레온도 순순히 덴을 뒤따랐다.

폭풍 속에 있는 것처럼 주변이 고요했다. 레온은 다가갈수록 점점 더 진해지는 악취에 숨을 참았다.

“…우리 센느가 이 일대 무리 짐승들을 토벌해 온 건 알고 있지?”

브라운에게 전해 들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먹을 게 없는 곳이니까… 짐승들이 민가를 습격하는 것도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어.”

물론 센느나 북부에서 그렇게 이해심 많은 건 덴뿐인 것 같았지만.

레온은 별달리 대답하지 않았다.

“같이 공생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튼 우리 센느에선 매년 토벌대를 꾸려서 무리 짐승들을 막아왔지.”

숲속 깊은 곳에 다다랐다.

레온은 높게 쌓여 있는 암석 동굴이 꼭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덴이 눈짓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라는 그 신호에 레온이 숨을 들이마셨다.

안쪽에서부터 설명할 수 없는 악취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내부엔 거대한 눈 산이 있었다.

아니, 그건 생전 처음 보는 크기의 스노우 울프였다.

“죽은 거야?”

“…응.”

촘촘한 흰털을 뒤덮은 스노우 울프는 미동도 없었다.

목 언저리에선 아직까지도 끈적거리는 피가 고여 있었다. 다만 지독한 상처를 입었는지 다리 한쪽은 이미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피를 멈춰보려 했는데… 이미 상처가 너무 깊었어.”

피투성이가 된 덴은 거대한 스노우 울프를 살리려 했던 것이다.

“너, 그동안 몰래 스노우 울프를 숨겨줬던 거야?”

“그리 얼마 되진 않았어. 이놈을 발견했을 때부터 이미 다리가 다쳐 있었고… 상처를 치료해주려 했지만 나도 매일 이곳에 올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이곳은 예로부터 스노우 울프나 흉악한 무리 짐승이 나타나는 숲이었다.

아이작 토바가 센느인 모두에게 출입을 금한 것도 당연했다.

크르르릉!

그때 스노우 울프의 뒤편에서 미약한 위협이 이어졌다.

“…설마.”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소리다.

레온이 조심스레 이미 죽어버린 성체 스노우 울프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등을 보이고 쓰러진 몸 안쪽을 보자 배 가까이, 몸을 웅크린 채 경계하는 새끼 스노우 울프가 보였다.

‘그놈이잖아?’

반항적인 푸른 눈동자를 보니 이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저놈이 아마도 마지막 스노우 울프일 거야.”

덴이 조심스레 새끼에게 손을 뻗었다. 새끼는 털을 곤두세우고 캭캭거리며 덴에게 반항적으로 굴었다.

“이놈이 새끼를 낳을 때 내가 곁에 있었거든. 고생했다고 내 밥도 나눠주며 살리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이리 쉽게 죽어버릴 줄 몰랐다.

덴이 씁쓸한 표정으로 성체 스노우 울프의 미간을 쓰다듬었다.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몸을 만지자 소름이 돋았다.

덴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마 페르탈린에서 돌아오던 히스 형에게 걸린 모양이야.”

그는 무리 짐승을 토벌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자였다.

“들키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형도 죽일 수밖에 없었겠지.”

위협이 되는 짐승들을 토벌하고 주변 영지로부터 도움을 받는 게 센느의 생존 방식이었다.

덴이 씁쓸하게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개체를 확인했으니 근방을 다시 살펴볼 텐데. 얘는 어떡하지?”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어린 새끼였다. 어미가 죽었으니 이대로 둔다면 자연히 죽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그게 운명인걸.”

레온은 썩어들어간 성체의 발치에 제 옷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걸 봤다.

‘근데 저걸 왜 가져갔지?’

새끼 스노우 울프가 훔쳐 간 고급스러운 옷감이 썩어들어간 살점과 진물에 얼룩덜룩 이미 제 본모습을 잃은 상태였다.

온해수 지역은 센느에서도 제법 멀리 떨어진 구역이다.

어째서 새끼 스노우 울프가 그곳까지 와 옷을 훔쳐 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맛있는 냄새가 났나?’

레온이 제 옷 냄새를 킁킁거릴 때였다. 머릿속에 웬 글자가 떠올랐다.

-썩 꺼져! 당장 나가라고!

이상한 경험이었다. 글자가 떠오르다니.

생각도, 목소리도, 기억도 아닌 말 그대로의 글자가 머릿속에 떠올라 레온에게 의견을 전했다.

“뭐라고?!”

“아우 깜짝이야! 왜, 왜! 무슨 일이야, 레온?”

설마, 넌가?

레온은 경계를 늦추지 않는 새끼 스노우 울프를 바라봤다.

콧잔등까지 모두 일그러진 작은 스노우 울프는 여전히 레온과 덴으로부터 어미를 지키고 있었다.

-당장 사라져! 우릴 내버려 둬라!

지금껏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동물들이 유독 잘 따른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들의 말을 알아들은 건 처음이었다.

레온이 조심스레 새끼 스노우 울프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새끼 스노우 울프가 잽싸게 발치에 달려들어 용맹하게 레온을 공격했다.

“…얘, 이도 안 났네?”

“태어난 지 보름 정도밖에 안 됐거든.”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덴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태어난 지 보름도 안 된 새끼를 죽여야 한다니. 정말이지 마음이 아팠다.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글쎄.”

머릿속에선 계속해서 ‘내버려 두라’는 새끼 스노우 울프의 울부짖음이 이어졌다.

레온은 금세 시선을 떼었다. 정신 사나운 소통법이다. 머릿속에 하고 싶은 말을 멋대로 때려 박다니.

“레, 레온 공자? …레온 공자 여기 있어요?”

그때 어두컴컴한 동굴 밖에서 미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야, 너 얌전히 있어라.”

레온이 컁컁거리는 새끼 스노우 울프에게 손짓한 뒤 동굴 입구로 다가갔다.

“윽….”

“레온 공자, …덴?”

미셸과 히스 토바가 뒤편에 수많은 병력을 이끌고 나타났다. 인파 사이엔 브라운과 워렌도 함께였다.

“공자님!”

“레온 공자님.”

두 사람이 재빨리 레온의 안위를 살폈다. 브라운은 거대한 스노우 울프의 사체를 확인하자마자 입을 떡 벌렸다.

“제, 제가 가서 사람들을 불러왔어요. 어디 다친 덴 없는 거죠, 레온 공자?”

숲속에 버리고 홀로 도망간 주제에 말이 많다.

레온이 미셸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그녀가 시선을 피해 히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이 레온 공자를 구해야 한다기에 달려와 봤습니다만… 뜻밖이로군요. 게다가 저 덜떨어진 자식이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히스가 동굴 내부를 살폈다.

조악하게 쌓아 올린 암석과 안절부절못하는 덴을 보아하니, 그간 이 골칫덩이를 숨겨주고 있던 모양이다.

“이 도움 안 되는 자식! 그간 이놈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알고 있나, 덴?”

스노우 울프의 우두머리로 보통 개체보다 크기가 두 배는 될 법한 녀석이었다.

겨우 다리 한쪽을 베어 추적했지만 그간 흔적 하나 찾을 수 없었다.

“근데 네 자식이 센느를 위험에 빠뜨려?”

의뢰받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해야만 했다.

히스가 위협적으로 덴을 나무라는 것을 보며 레온이 상황을 정리했다.

“그만하시죠. 어쨌든 임무를 수행했고, 다친 자도 없으니 된 일 아닙니까, 히스 공자.”

레온은 히스에게 웃어주었다.

“게다가 폰네시에서 들고 온 식량과 자원들도 있고요.”

“…그야 그렇지만.”

“돌아가 우리 거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군요.”

아무렴 히스가 만만하게 볼 대상이 아니라 하더라도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선 폰네시의 도움이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차일피일 거래를 미루기보단 말이 나온 김에 칼을 빼 드는 게 좋겠다.

레온의 제안에 히스 토바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내부에 모여 있던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안쪽에 있던 덴은 얌전해진 새끼 스노우 울프에게 남모르게 손을 흔들며 떠날 준비를 마쳤다.

“그전에.”

그때였다. 히스 토바가 검을 꺼내 들고 이미 죽어버린 성체 스노우 울프의 머리를 잘라냈다.

“꺄아아아악!”

“…윽!”

레온의 온몸에 피가 튀었다.

“일을 끝냈다는 증거는 가져가야 하니까.”

히스가 늘 그렇듯 히죽 웃으며 제 몸만 한 성체의 머리를 쥐어 잡을 때였다.

내내 얌전히 굴던 새끼 스노우 울프가 포효하며 히스의 손목을 물어뜯었다.

“으윽!”

레온의 발치를 물어댔을 때와 달리 히스의 손목에선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튀었다.

레온이 새끼 스노우 울프를 바라보며 명했다.

‘내 뒤로 와.’

-명령하지 마라!

히스가 욕을 하며 온전한 손으로 새끼 스노우 울프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아직 그리 크지 않은 새끼는 히스의 악력 한 번에 숨통이 끊어질 것처럼 보였다.

“새끼가 있었어? 너! 이놈을 숨겨주고 있던 거냐?!”

“그, 그게!”

살려주고 싶었던 건 아니다. 살려야 할 이유도 없었다.

“히스.”

하지만 눈앞에서 날뛰는 이 자식을 그냥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 레온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피를 뒤집어쓴 레온이 눈을 깜빡였다.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히스를 응시했다.

“내 물건에 손대지 마라,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다면.”

레온이 손을 뻗었다. 그러곤 으르렁거리는 새끼 스노우 울프를 품에 안아 들었다.

‘이 자식에게 복수하고 싶다면 얌전히 굴어.’

레온이 안아 든 스노우 울프를 거세게 옥죄었다.

숨이 막혀 발버둥치는 새끼 스노우 울프가 잠잠해지자 히스 토바가 분노를 참지 못했다.

“이 짐승이 공자의 것이라고?”

“오다 주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스노우 울프는 절대 길들일 수 없을 텐데!”

상황을 늘 제멋대로 통제해야만 성미가 차는 놈이다.

레온에게 이런 어린애 같은 머저리 유형을 다루는 것쯤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이봐, 히스 토바.”

레온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스노우 울프의 피를 흠뻑 뒤집어쓴 레온에게선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묻어났다.

“네가 할 수 없다고 해서 모두가 그럴 거라 멋대로 판단하지 마라.”

그간 어떻게 살았든 상관없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지는 레온에게 아주 깊은 상관이 있었다.

“네가 할 수 없는 것도 나는 해. 그게 뭐든.”

힘은 힘으로 누르는 것.

강자에게 약자의 모습을 보이는 어린애 같은 히스 토바를 보며 레온이 흘러내리는 피를 훔쳤다.

눈가 옆에 길게 눌어붙은 핏자국이 꼭 피눈물처럼 얼굴을 물들였다.

“워렌, 브라운. 이만 돌아간다.”

품에 안겨 있는 새끼 스노우 울프가 어두컴컴한 동굴 밖으로 나섰다.

레온과 함께 세상 밖으로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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