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6장. 새로운 시대(4)
이번엔 덴과 함께 모두가 덴의 방에 모였다.
“…이제 어쩌시게요?”
브라운이 조금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메리는 워렌의 곁에 딱 붙어 작고 귀엽지만 충분히 위협적인 소리를 내는 새끼 스노우 울프를 유심히 살펴봤다.
“…….”
레온은 말없이 새끼 스노우 울프와 눈싸움 중이었다.
‘내 옷은 왜 물고 갔지?’
일단 구해줬으니 궁금한 문제에 대해 대답할 의무가 있었다.
레온이 묻자 새끼 스노우 울프도 순순히 대답했다.
-피를 멎게 하려고.
‘…네가 지혈을 안다고?’
-날 무시하지 마라! 나는 설호의 피를 물려받은 스노우 울프다!
새끼 스노우 울프는 용맹하게 몸을 부풀렸다. 세모난 귀가 쫑긋해지며 깜빡거렸다.
“네가 설호라고?!”
레온이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꾸벅꾸벅 졸던 덴이 고함을 지르며 의자에서 깨어났고, 브라운은 뒤편으로 서너 걸음 물러났다.
메리는 에구머니! 비명을 지르며 워렌의 팔뚝에 붙었고, 워렌은 칼을 빼 들었다.
“…….”
“…….”
모두가 레온을 이상하단 듯이 바라봤다. 그야 당연했다. 말없이 스노우 울프와 눈싸움을 하던 중에 혼자 고함을 질렀으니, 충분히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네가 설호란 말이야? 정말?’
-설호의 피를 이어받은 스노우 울프라고 했다!
예민한 문제인지 새끼 스노우 울프가 다시 한번 레온의 발치를 앙앙 물었다.
그래봤자 이를 드러내지 않아 간지럽기만 했다.
“공자님?”
설호라면 수인족이다.
서대륙이나 동대륙과 달리 아주 먼, 레온도 잘 알지 못하는 세상 반대편에서나 실재한다던 존재.
그래서 나랑 말이 통했구나. 이제야 모든 게 설명됐다.
“…우리 뭐 엄청난 걸 주운 것 같은데.”
“예?”
어미가 스노우 울프의 우두머리라고 했으니, 이 갓 태어난 새끼 스노우 울프… 아니, 눈 호랑이를 어찌 감당해야 할지 고민됐다.
“…공자님.”
이상한 적막이 감도는 방 안에 워렌의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죄송하지만 잠시 나가 보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높은 덴의 방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그가 시선을 돌렸다.
레온이 새끼 짐승을 발로 밀어내며 창가로 다가섰다.
“…우리 병사인가?”
“예, 공자님의 전언을 들고 폰네시로 돌아간 병사입니다.”
몇 안 되는 믿을 만한 부하였으므로 워렌은 곧바로 그자를 알아봤다.
레온도 기억이 났다. 루시오에게 섣부르게 행동하지 말라는 뜻을 전하기 위해 돌려보낸 이였다.
“이런, 히스 공자가 우리 병사를 붙잡았습니다.”
“메리, 저 자식을 부탁해.”
“예, 예?”
“성질 나쁜 아기니까 잘 돌봐줘.”
어찌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병사는 맥도 못 추고 히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레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곧장 정문으로 향했다.
위에서 바라본 대로 히스가 폰네시의 병사를 붙잡고 레온을 맞이했다.
“공자님!”
잔뜩 골이 나 있어야 할 히스가 웬일로 웃고 있었다. 그가 붙잡고 있던 병사를 놓아주었다. 지체없이 병사가 레온의 곁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큰, 큰일 났습니다.”
어찌나 달려왔는지 이 추운 날씨에 병사는 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레온이 숨을 헐떡거리는 병사의 어깨를 붙잡았다.
“제대로 보고해.”
“…그게.”
폐가 터질 것 같다. 시린 찬 바람이 목을 갈기갈기 찢을 것처럼 아프게 만들었다.
“폰네시가… 위험합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뭐라 그랬어?”
아니, 그런 행운은 없을 것이다.
“폰네시가 습격당했다고요, 공자님!”
병사가 땀에 뒤섞인 눈물을 훔치며 절규했다.
***
“…이럴 수가.”
견고한 궁성은 그 어떤 공격에도 거뜬히 버틸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수많은 공격이 한 번에 쏟아지자 희망이 무너졌다.
헤리스는 귀를 아프게 만드는 소음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여길 빠져나가야 해.’
루시오가 위험했다. 그를 지킬 수 있는 자는 많지 않다.
적어도 죽어야 한다면 그의 곁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봐, 나를 풀어주게.”
헤리스가 철창 앞을 지키고 있는 병사에게 소리쳤다.
“영주님이 위험해! 당장 이 문을 열어주게, 제발!”
주변에서 이미 열기가 느껴졌다. 궁성 근처의 광장이 불바다가 된 건 뻔했다.
‘적군이 아주 가까이에 있어.’
이대로 손을 놓는다면 루시오는 가장 먼저, 가장 많은 이들에게 공격당할 게 뻔했다.
적어도 그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루시오의 편이 있어야 한다.
“나 헤리스 타린. 가이아와 폰네시, 그리고 내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이 문을 열고 나가는 즉시 나의 주군 루시오 몬데이어를 지키러 갈 것이다. 그러니….”
“죄송합니다, 기사단장님!”
달칵.
철창 앞을 지키던 병사가 곧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헤리스의 손목을 죄고 있던 수갑 역시 풀어주었다.
“함께 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 내가 대신 가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헤리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모진 고초를 겪어 이미 온몸이 제 맘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귀를 멀게 만들 것 같은 폭음과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헤리스를 달리게 만들었다.
루시오를 지켜야 한다, 오직 나만이 루시오를….
“…….”
정문을 향해 내달리던 헤리스의 발길이 멎었다.
울부짖는 여인들의 목소리에서 일리아의 부탁이 들리는 듯했다.
“…레브를.”
반드시 레브 그 아이 하나만큼은 살려달라던 울부짖음이 귀를 찢을 것처럼 맴돌았다.
헤리스가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 궁성 내부까지는 밀고 들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궁성도 함락될 것이다.
‘만약… 증거가 남아 있다면?’
궁성 내부에 레온의 비밀이 밝혀질 만한 증거가 남아 있다면 큰일이다.
그들에게 레온이 여자란 사실을 들킬 순 없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안 돼.”
헤리스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레온의 거처를 향해 점차 속도를 내며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언젠가 이 순간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온이 여자란 사실은 반드시 숨겨야만 했다.
‘그게 일리아와 루시오를 위한 길이야!’
헤리스가 전속력으로 달렸다.
레온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그곳을 향해.
***
“데로니스 군대가 인근 동부 숲속에서부터 밀려들고 있습니다.”
“…믿을 수가 없군.”
루시오가 발밑에 펼쳐진 끔찍한 현장을 바라봤다.
수많은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그 불길에 침묵의 기사단이 짓밟히고, 폰네시의 영지민들이 피를 토해냈다.
더 이상 평화로운 폰네시는 없다.
끔찍한 비명과 전장을 누비는 병사들의 고통 어린 절규만 가득할 뿐이었다.
“어째서.”
이 수많은 병력이 이곳까지 밀고 들어오는 순간, 왜 단 한 차례의 보고도 없었는지 모르겠다.
루시오는 그제야 제 곁에 믿을 수 있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적수도 되지 못하는 싸움이었을지 모른다.
“크리크, 나 대신 우리 영지민들을 반드시 살리게.”
“…….”
“그들의 요구가 무엇이든 영지민들을 살릴 수 있다면… 내 말 알아듣겠나?”
“예! 반드시 따르겠습니다!”
루시오가 칼을 빼 들었다.
그간 수많은 자를 베고 쓰러뜨린 보검을 들고 루시오가 궁성 밖으로 돌진해 나갔다.
‘이런 지옥에 네가 없어 다행이다, 레온.’
루시오가 달려 나가자 곧바로 수많은 불화살과 날카로운 검날이 날아들었다.
“영지민들을 보호해라!”
그의 명에 침묵의 기사단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쓰러진 영지민들을 일으켜 세우고 궁성 안으로 호위하는 병사들과 반대 방향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눈앞에선 끊임없이 데로니스의 군대가 밀려들었다.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이 전투로 모두가 목숨을 잃게 된다.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영주님! 피하십시오!”
“으윽!”
가장 앞에 서서 수많은 칼을 받아내고 있는 루시오 몬데이어를 바라보자 사그라들던 용기가 샘솟았다.
그를 따라 이곳에서 죽는 게 대단한 운명처럼 느껴졌다.
침묵의 기사단이 데로니스의 군대를 차례차례 무찌를 때였다.
“워, 월랜드의 기마 부대가 달려옵니다!”
월랜드의 병사들이 끊임없이 궁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이 휘두르는 철퇴에 병사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루시오가 주변을 살폈다. 제 곁을 든든히 지키던 병사들이 하나둘, 달려드는 철과 불화살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레온.’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자들은 반드시 쓰러진다.
루시오를 지키기 위해 공격을 받아내던 병사들은 결국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죽음에 이르렀다.
“…….”
루시오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코앞까지 밀려드는 적군을 보자 더는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았다.
이대로 끝인가?
루시오가 제 손을 무겁게 짓누르는 보검을 바라봤다.
“일어나라, 루시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충격에 빠진 루시오를 일깨웠다.
뒤편에서 헤리스가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가 루시오에게 쏟아지는 화살을 모두 베어냈다.
“…헤리스… 네가 어째서.”
“정신 차리고 눈앞을 봐! 이대로 포기하면 안 된다! 죽지 마라, 루시오 몬데이어!”
으아아악!
굉음을 내며 헤리스가 달려드는 월랜드의 병사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몸을 숙여 철퇴를 피하고 말의 다리를 깊숙이 베었다. 쓰러진 적진의 머리를 도륙하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도 믿지 말라더니!”
“나 역시 나를 믿을 수 없으니까!”
루시오와 헤리스가 등을 맞댄 채 주변을 살폈다.
두 사람은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했다.
“…내가 아직 일리아를 잊지 못했다고 생각하나, 루시오?”
죽음이 이르기 전에서야 진심이 오갔다.
“아니라곤 못 하겠군.”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왔다. 루시오는 그사이 몇 차례 더 달려드는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내가 일리아를 사랑한 세월보다 널 주군으로 받든 시간이 더 길다는 걸 왜 모르지?”
“…….”
“…네가 아니래도 나에게 네가 내 주군인 건 변하지 않아. 아마도 영원하겠지. 여기에서 죽는다면.”
루시오가 고개를 돌렸다. 줄곧 충신으로서 제 곁을 지킨 친우의 늙은 얼굴이 이제야 똑똑히 보였다.
“피해, 헤리스!”
집채만 한 장검이 날아들었다. 루시오가 헤리스를 밀어냈다.
“윽!”
“루시오!”
어찌나 상처가 깊은지 루시오는 단 한 번 일격에 몸 깊은 곳까지 신경이 끊겨 나간 것을 느꼈다.
푹, 루시오가 칼을 땅에 박고 간신히 버텼다.
헤리스가 쓰러지려는 루시오의 몸을 지탱했다.
“…가서 나 대신 내 아이를 지켜줘, 헤리스.”
눈앞이 어두컴컴해졌다.
루시오는 다시 한번 온 힘을 다해 헤리스에게 달려드는 적군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 일격으로 루시오의 가슴 깊이 검이 박혔다.
헤리스가 다가오는 수십 명의 적군을 쓰러뜨렸다.
“기사단장님!”
“모두 두 분을 보호해라!”
침묵의 기사단이 달려왔다. 헤리스가 쓰러진 루시오를 부축했다.
등 뒤에선 칼과 칼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끔찍한 전쟁의 절규가 이어졌다.
“으윽.”
“…루시오!”
얼마 가지 못해 루시오가 쓰러졌다. 그가 울컥, 피를 토하며 붉게 충혈된 눈으로 헤리스를 바라봤다.
“…내 아이와 함께 라리카로 가.”
레온에게 숨겨둔 이야기를 전해야 했다.
“그, 그곳으로 가 술사 바네티오를 찾아내게….”
“안 돼, 루시오! 제발 정신을 차리란 말이다!”
“아니….”
여기서 끝이다.
“마지막까지 부탁만 해서 미안하군, 헤리스 타린.”
루시오가 울컥, 다시 한번 피를 토해냈다. 헤리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안 돼….”
그가 뱉어낸 새빨갛고 끈적거리는 피가 온 얼굴을 뒤덮었다.
온통 붉은 피범벅 속에서도 감지 못한 푸른 눈동자만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루시오 몬데이어.
폰네시 영주의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