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26화 (26/133)

26화

7장. 북풍이 불어오면(1)

데로니스 왕국의 수도 덴버그.

“비상! 비상이에요!”

어린 소년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소리 질렀다.

그 소란스러움에 중정 비질을 하던 하급 관리인이 주변을 살폈다.

누군가가 이 장면을 본다면 책잡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쉬잇, 뛰어다니지 말라고 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엄마? 진짜 큰일이 났다고요.”

“왜 이렇게 소란이야. 무슨 일인데 그래?”

허리춤까지 오는 어린아이가 손을 파닥여 엄마의 귀를 잡아당겼다.

늘 어디선가 세상 돌아가는 소문을 잘 물어오는 아들이기에 그녀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내렸다.

“폰네시가 결국 함락됐대요.”

“뭐?”

“우리 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해서 반나절도 버티지 못했대요. 지금 궁성 근처가 온통 불바다라던데요?”

이런 건 부랑자들 사이에서 뛰어놀다 보면 너무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였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하루 종일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발치에 흘리는 귀족들의 대화를 훔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몬데이어 공작이 가장 먼저 목숨을 잃었고, 그를 위해 싸우던 정예병들도 모조리 목을 베어 거리에 던져뒀대요.”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구나.”

“그뿐이게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난밤에 불어 터진 육포를 쥐어준 일로 친해진 거지 팍스 영감 말에 의하면, 데로니스 연합군이 그 수많은 피비린내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또 사냥감을 찾아 헤맨다고 했다.

“우리 연합군이 폰네시의 후계자를 찾아 동부 전역을 뒤진다고 하니, 이제 몬데이어 공작가가 멸문하는 건 시간문제예요!”

선대 몬데이어가 죽었으니 후계자의 목숨도 바람 앞에 놓인 촛불이나 다름없었다.

영지도 빼앗기고 추적까지 당하게 됐으니 끝은 보나 마나이다.

하급 관리인이 엉망진창 사방으로 뻗친 아들의 머리를 정돈해주며 그 여린 어깨를 토닥였다.

“이제 곧 있으면 정말로 우리 데로니스의 시대가 오겠구나. 이곳에서 일할 수 있으니 정말이지 축복인 셈이야.”

“그런 거예요, 엄마?”

“그래, 그러니 최대한 말썽 부리지 말고 얌전히 지내야 돼. 알겠지?”

새 시대가 다가온다.

더는 대제국 가이아도, 그들의 심복 가문인 폰네시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다가오는 것이다.

“다행이야. 이제 곧 이 전쟁이 끝날 테니.”

수많은 이를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지난 스무 해의 전쟁이 이제야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 여행을 떠나자, 아들아.”

“좋아요, 엄마!”

그녀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루지 못할 약속을 건넸다.

그보다 더 걷잡을 수 없는, 끔찍한 전쟁이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

“레온! 히스 형이 모두 영주성 안으로 들어와도 된대!”

그 시각, 센느.

덴이 먼 곳에서 일행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어서 들어가자. 이러다 정말 얼어 죽겠어!”

레온이 제 발치에 쓰러진 병사 케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상황을 알리자마자 레온의 품에서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제가 옮기겠습니다.”

“부탁해, 워렌.”

발걸음을 옮기며 모두가 병사 케인을 흘끔거렸다.

‘폰네시로 되돌아가는 길에 우리 궁성 주변 숲에 이미 데로니스 연합군이 포진돼 있는 걸 발견했어요.’

‘도저히… 우리 병력으로 막을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궁성에 진입할 수가 없어 결국 공자님을 찾아 달려온 거예요. 상황을 알려야 했으니까요.’

병사 케인은 참담한 현실을 목격한 후 곧장 레온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템프 폭포에서 되돌려 보낸 절반의 폰네시군을 마주친 후 이곳까지 왔다.

그들이 일러준 대로 레온을 찾아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린 것이다.

“…….”

일행이 착잡한 표정으로 온기가 머무는 영주성에 들어섰다.

“어서들 오세요. 따뜻한 모포와 수프를 준비했어요. 장작도 더 마련했으니 어서 몸을 녹이세요.”

토바 부인이 얼음장처럼 피부가 하얀 케인을 불쌍히 여겼다.

어머니의 곁에 딱 붙은 미셸도 이번만큼은 말을 아꼈다.

혹독한 환경에 늘 방치되어 있던 센느인들에게도 이 상황이 절망적이었다.

“덴의 방까지 이동하기가 버거울 것 같군. 병사는 이곳에 머무르는 게 좋겠소, 레온 공자.”

여태껏 여유롭게 상황을 지켜만 보던 히스 토바가 일행을 멈춰 세웠다.

그럴싸한 이유를 대지만 폰네시의 병사가 영주성의 내부 깊숙한 곳까지 몸을 숨기는 건 허락지 않을 모양이었다.

“저곳으로 가시죠.”

그가 식솔들이 머무는 뒤편 휴게 공간을 가리키며 턱짓했다.

다른 생각 따윈 하지 못하도록 가까운 거리에 두고 지켜보겠다는 속내가 빤히 보였다.

뜻을 알아챘지만 레온은 거절할 수 없었다. 지금은 무엇보다 얼어붙은 케인을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지.”

레온이 뜻대로 행동하자 히스도 만족한 듯 물러났다.

겨우 한숨을 돌린 일행 사이엔 침묵이 감돌았다.

‘결국 일이 이렇게 돼버렸어.’

레온은 케인이 혹한의 절기를 뚫고 가져온 소식이 진실이라는 걸 이미 알았다.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미래는 변하고 있었다.

폰네시가 무너지는 것도, 진짜 레온 몬데이어가 죽는 것도 결국엔 막지 못했다.

‘그놈들이 나를 찾을 텐데.’

무엇이 운명을 변하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데로니스도 폰네시에 후계자가 없단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아마 백방으로 내 거취를 찾기 위해 움직이겠지.

“그들이 북쪽으로 올 수도 있어.”

레온이 낮은 목소리로 일행에게 말했다.

“폰네시가 함락됐으니 연합 소영지는 물론 관계없는 독립 영지들도 차차 데로니스 손에 넘어갈 거야.”

차례차례 손을 뻗쳐 오는 동안 당하기만을 잠자코 기다릴 순 없다.

비록 영지는 빼앗겼지만, 또 힘이 되어줄 루시오의 생사마저 불투명하지만 아직 기회는 있었다.

‘다이아 스틸만 다룰 줄 안다면 그들과 싸워볼 수 있어.’

어차피 싸움은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내가 싸워야 한다면 직접 내 편을 만드는 수밖에.

“브라운,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소영지가 어디지?”

“페르탈린입니다, 공자님.”

다행히 이곳 북부는 현재 지독한 혹한의 절기다.

혹한은 매일같이 눈 폭풍을 불러일으키고, 종잡을 수 없는 가혹한 바람으로 시야를 차단했다.

이런 상황에 수많은 병력을 이끌고 이동하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

데로니스처럼 대군을 이끄는 세력에게 주변 지형과 날씨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여건이었다.

“남은 시간 동안 내게 동맹이 필요해.”

브라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의 뜻을 알아듣는 건 브라운에게 가장 쉬운 일이었다.

“페르탈린에 상황을 알리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래, 가서 폰네시가 어떻게 됐는지도 알아와 줘.”

“예, 공자님.”

연합군이 들이닥친다 해도 페르탈린과 함께 대비한다면, 적어도 그만큼의 시간은 벌어볼 수 있다.

고작 열 몇의 인원으로 대항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두 달 정도인가? 이 혹한은.’

그 안에 다이아 스틸을 다루는 법을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데로니스를 피해 센느를 떠나 시선을 돌리고, 그들과 대적할 만한 무기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는 가망이 없다. 라피스를 지닌 존재가 데로니스에 있다. 그 검은 사냥개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절대 빼앗길 수 없었다.

“레온, 그럼 내 말을 내어줄게. 나도 함께 가겠어.”

그때 덴이 결심한 듯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록 나이를 먹긴 했지만 북부의 말은 혹한의 절기에서도 최고의 속력을 자랑했다.

“미셸의 말도 빌린다면 페르탈린까지 내가 빠르게 안내할 수 있을 거야.”

심장이 쿵쿵거렸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이런 일에 나서본 적 없었다.

하지만 레온을 만나고 나서부턴 모든 게 달라졌다. 그 푸른 눈을 보면 해야 할 일이 눈앞에 명확하게 그려졌다.

“괜찮겠어, 덴?”

“그럼. 게다가 우리 센느도 언젠간 결정을 내려야 하잖아. 난 당연히 너와 함께하는 길을 택할 거야.”

덴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

여태껏 봐온 표정 중 가장 용감한 얼굴이었다.

“내 허락이 필요한 것 같진 않네.”

레온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용기 낸 자를 말리는 법 같은 건 배운 적이 없다.

덴이 부리나케 달려 가족들에게 돌아가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새로운 전쟁의 첫걸음이었다.

***

“다녀올게요, 공자님.”

“레온, 우리 가족들을 잘 부탁해.”

완전 무장을 한 두 사람이 모든 준비를 마쳤다.

레온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성문 앞에서 그들을 배웅했다.

“조심히 다녀와.”

이윽고 새하얀 털을 휘날리며 북부의 말이 두 사람을 태우고 저 멀리 페르탈린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과연 내 편이 되어줄까?’

북부에 대한 정보는 바닷속에도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 서대륙에 일말의 영향도 주지 못하는 약소 영지일 뿐이었다.

다만, 앞으로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따라 중요도는 달라질 것이다.

“공자님, 날이 춥습니다.”

레온의 곁을 줄곧 지키던 워렌이 다가왔다.

북풍 앞에 서서 생각에 잠긴 지 이미 한참이나 지났다. 공자의 코끝이 빨갰다. 더 이상 추위 속에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워렌.”

“예.”

“네가 해줄 일이 있어.”

“하명하십시오.”

“우리 병사들 중 첩자를 찾아내야 해.”

레온이 시선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했다.

좀처럼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워렌의 얼굴도 예상치 못한 단어에 놀란 듯 보였다.

“첩자라고 하셨습니까?”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레온이 워렌만 들릴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상황을 일러주었다.

“케인이 템프 폭포에서 되돌아가던 우리 병사들을 마주쳤다는 건 이미 알고 있지?”

“예, 쓰러지기 직전에 한 말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가 센느로 행선지를 정하며 일부러 병력의 절반을 되돌려 보낸 것도 기억할 거고.”

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넓게 펼쳐진 얼음의 땅을 살폈다.

불어닥치는 공기가 온몸을 찢어놓을 것처럼 날카로웠다.

“난 그들에게 내 행선지를 밝힌 적 없어.”

센느로 향하는 것을 알고 있는 건 마차에 함께 올랐던 메리, 브라운, 그리고 워렌 정도가 전부였다.

“우리 말고 우리가 센느에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이곳에 도착한 병사들뿐이지.”

그들 중 누군가가 내 행적을 공유했다.

“그게 좋은 의도일 거라고 생각되진 않는데.”

어떻게 연락했는지, 또 그들의 정확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지금부터 알아봐야 했다.

“워렌, 네가 그 일을 해줘야 해.”

루시오가 의심할 정도라면 이미 기사단 내부에 데로니스의 세력이 깊이 침투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들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레온이 워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루시오가 제게 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영주성을 나가 우리 병사들을 살펴봐.”

“그렇게 되면 이곳엔 공자님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그가 뒤편을 의식했다. 성 내부에 남아 있는 히스 토바가 신경 쓰이는 탓이었다.

레온을 지켜줄 이가 단 한 명도 없다니. 호위기사로서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어차피 다시 돌아올 거잖아.”

레온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결국 돌아오기만 하면 그런 건 상관없어.”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검은 사냥개들이 훔쳐내지 못한 라피스가 이 몸속에 있으니, 그 누구도 자신을 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다녀와, 워렌.”

워렌이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 할 일은 공자의 명을 따르는 것뿐이었다. 그게 결국엔 그를 지키는 일일 테니.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워렌이 순식간에 북풍 속으로 나아갔다. 아주 빠른 몸짓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