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7장. 북풍이 불어오면(2)
“네가 그런 선택을 했으니 이제 내가 바라는 걸 말하마.”
루시오 몬데이어.
꿈에서도 그리운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금발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또래 보다 왜소한 체격의 어린 아이가 눈앞에 자리한 두려운 존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 없이 받은 게 있으니 이제 갚아야 할 차례였다. 짧은 인생 동안 경험한 원칙은 그러했다.
“넌 앞으로 다른 누구와 섞여들 필요 없다.”
그도 결국 다른 사람과 똑같았다.
준 것보다 배로 앗아가는 사람. 잠시 누린 것을 모두 잃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어린 소년이 고개 숙였다. 두 번의 태양이 지나는 동안 원하는 걸 이뤘으니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순 없었다.
이대로 끝이다. 곁을 지켜주는 이 하나 없었지만, 이제는 완벽하게 고립된 삶을 살아야 했다.
“너는 지금부터 오직 너만을 지킨다.”
줄곧 두려움에 떨고 있던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금, 뭐라고? 잘못 들은 줄 알았으나 눈앞의 존재는 농 따위 던질 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네 인생에 앞으로 다른 중심은 없을 것이다.”
혼란스러웠다. 모든 것을 앗아가는 줄 알았는데 다시 전부를 되돌려 주다니.
아니, 살아갈 이유조차 없던 제게 살아야만 하는 목적을 주었다.
나를 지키라니.
나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가라니.
“그렇게 살겠느냐?”
루시오 몬데이어가 물었다.
답은 과거에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무엇으로 살고 싶은지는 아직 주어지지 않았을 뿐 잃은 게 아니었다.
“…허락하신다면.”
“네 삶에 내 허락이 필요하진 않을 텐데.”
그가 은백색 망토에 휘감긴 묵직한 검을 건넸다. 어린 소년이 차마 받지 못하고 한참 바라봤다.
이걸 받는 순간 멋대로 살아가던 인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스스로 삶을 지키는 자.”
“…….”
“내가 널 뭐라 부르지?”
그건 누구의 것과도 다른 검이었다. 꼭 저를 부르는 것처럼 아우성치는 검의 기운이 느껴졌다.
금발머리의 아이가 손을 뻗었다.
“저는 워렌… 라일리입니다.”
작은 소년이 활짝 미소 지었다.
미소 짓던 그 소년이 천천히 눈을 떴다.
“…….”
금지된 숲속이었다.
며칠 전까지 거대한 성체 스노우 울프가 죽어 있던 그곳에 워렌이 있었다.
워렌이 한시도 떨어뜨려 놓지 않는 제 검을 바라봤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 빛 하나 바래지 않은 이 검이 그랬다.
워렌이 말없이 손잡이에 박힌 사파이어를 내려다봤다.
누군가의 눈동자와 똑같은 그 푸른빛이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알려주었다.
“지켜야 할 것….”
제가 살아야 할 이유를 준 루시오 몬데이어가 지키려던 것.
이유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생은 공자를 위해 살기로 결정했다.
워렌이 검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첩자를 찾으러 갈 시간이었다.
***
“같은 북쪽인데도 여긴 분위기가 확 다르네요.”
센느의 황야를 등지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위치한 소영지 페르탈린.
센느를 떠난 지 꼬박 삼 일이 지나서야 부집사 브라운과 덴 토바가 목적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이곳까진 자연의 축복이 닿아 있으니까.”
쉬이.
덴이 늙은 말을 멈춰 세웠다. 뒤편에서 따라오던 브라운도 말의 목덜미를 두드려 속도를 늦추었다.
“그런가요? 하지만 센느의 아름다운 경관이야말로 신의 축복이죠.”
덴도 동감했다. 물론 그 신이 깜빡 잊고 먹을 것과 몸을 데울 만한 것들을 모두 앗아간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북부 사람들은 사이가 좋지 않아.”
“생존을 걸고 경쟁하는 사이니까요. 그럴 수밖에 없겠죠.”
“그래. …우리가 무슨 의도로 찾아왔든 저쪽의 반응은 냉담할 거야.”
덴이 울상을 짓고 브라운을 돌아봤다. 브라운이 상냥한 표정으로 그런 덴을 위로했다.
“그래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진 못하겠죠. 저희에겐 아이작 영주님의 서신이 있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대접은 해주겠지.”
“자, 그럼 이제 들어가 볼까요?”
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넓게 펼쳐진 페르탈린의 외부 성벽을 바라봤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운데서도 높은 벽은 똑똑히 보였다.
성벽 위에서 두 사람을 발견한 경비병들이 수신호를 주고받았다.
“거기 멈추시오!”
어째서 이런 궂은 날씨에 외부인이 이곳을 찾았는지는 반드시 확인이 필요할 터.
빠른 걸음으로 내려온 경비병이 바짝 언 표정으로 물었다.
“방문 목적과 정체를 밝히시오.”
방한복 위에 겹겹이 갖춰 입은 철갑옷이 그의 표정을 더욱 차가워 보이게 했다.
덴 역시 마찬가지로 긴장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 난 센느에서 온 덴 토바라고 하네. 센느의 영주인 아이작 토바 남작의 삼남이지.”
아무리 작고 협소한 영지라지만 영주의 아들은 일개 경비병보다 그 신분이 높았다.
경비병이 급히 덴에게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토바 공자께서 이곳까지는 어찌 방문하셨습니까?”
“아버지께서 영주께 긴히 청할 것이 있다 해서 말을 전하러 왔지. 만나 뵐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레온의 거취만은 숨기기로 입을 맞춘 상태였다.
폰네시가 위험에 처해 있다면 주변 소영지의 입장 또한 난처해진다.
그들이 데로니스 왕조에 충성을 맹세하는 순간부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게… 우선 동행한 일행의 신분과 방문 목적 또한 설명해 주셔야 합니다.”
“이자는 우리 토바가의 식솔이지. 신분은 내가 보장하겠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브라운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센느인치고는 피부색이 따뜻해 보이긴 하지만…. 신뢰가 안 갈 수 없는 그 상냥한 얼굴에 경비병이 뒷말을 삼켰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절 따라오시지요.”
잠시 의심하는가 싶더니 경비병이 이내 성벽 위를 향해 손을 들었다.
확인이 끝났다는 그 신호에 페르탈린의 견고한 성 입구가 드디어 열렸다.
“요청하시니 청해보기는 하겠지만 영주님을 뵐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영주께서 오늘 새벽 병사들에게 소집령을 내리셨습니다.”
“소집령?”
그러고 보니 마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높고 넓은 성벽 아래 위치한 영지민 거주지에 페르탈린군이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었다.
“저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곧 떠나신다고 하니 서두르지 않으면 길이 어긋나겠어요. 자, 어서 이쪽으로 오시죠.”
경비병이 마을 한가운데에 위치한 영주성을 가리켰다.
브라운은 주변에 감도는 미묘한 긴장감을 온몸으로 느꼈다.
‘분위기가 이상한데.’
갑작스레 페르탈린의 영주가 병사들을 소집한 것도 그렇고, 어딘가로 떠난다는 정보 또한 의심스럽다.
병력을 이끌고 어디로 향하려는 걸까?
브라운은 덴을 따라 걸으면서도 계속해서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브라운의 발길을 붙잡는 소리가 지근거리에서 들려왔다.
“그나저나 갑자기 전시 대비라니, 이게 다 폰네시 때문인가?”
“글쎄, 내가 듣기로 그 땅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당연하지. 이미 모든 게 끝난 마당에 우리가 폰네시로 갈 일이 뭐가 있겠어?”
우뚝 멈추어선 브라운이 그들을 바라봤다.
“이제 앞날이 어찌 될지 모르겠어. 그 대단한 루시오 공작이 죽어 버리다니….”
“듣자 하니 목이 잘려 폰네시 궁성 가장 높은 곳에 내걸렸다지?”
뭐라고? 누가 어떻게 돼?
“폰네시가 이리 쉽게 무너질 줄이야….”
브라운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방금 전 들었던 소식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구시오?”
“방금 전에 한 말이 모두 사실입니까? 루시오… 공작께서 어떻게 되셨다고요?”
똑똑히 들었지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덴이 브라운의 곁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어디 눈 속에 묻혀 있기라도 했소? 여태 이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다 있군그래.”
“제발 사실대로 설명해 주십시오!”
“아니….”
다그치는 그 목소리에 병사가 주변을 흘끔거렸다.
그래, 뭐 비밀도 아닌 마당에 누군지 모른다고 해서 숨겨야 할 이유는 없겠지.
“폰네시는 보름 전 데로니스군에게 완전히 함락됐어.”
“맞아. 그들이 루시오 공작의 머리는 새들에게, 몸통은 들개에게 던져 줬다는군.”
“영지민들도 대부분 죽었다지? 폰네시 전체가 모두 불타 버렸으니 아마 사실일 거야.”
브라운이 털썩 주저앉았다.
“…설마 했는데.”
루시오 공작의 죽음은 폰네시의 끝이나 다름없다.
처절하게 끝을 맞이한 그의 죽음을 전해 듣자니 브라운은 잠시간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웬 소란인가 했더니 내 손님이 여기 와 계셨군.”
“여, 영주님.”
“영주님을 뵙습니다.”
모여 있던 페르탈린군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브라운과 덴의 뒤편에서 이곳 페르탈린의 영주인 재스퍼 밋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재스퍼 밋치의 옆엔 센느에서 온 히스 토바의 시종도 함께였다.
덴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가리켰다. 시종은 고개를 숙이고 덴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떻게 여기에 와 있지?”
“오늘 새벽 먼저 이곳에 도착했지. 너희가 나를 찾아올 거라는 소식을 전해주더군.”
몸보다 큰 대검을 든 재스퍼 밋치가 곁에 서 있는 병사들에게 턱짓했다.
그 신호에 모두가 주저앉은 브라운과 덴을 둘러쌌다.
“과연 히스의 말대로군.”
재스퍼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병사들은 이제 완전히 창과 검을 겨누고 두 사람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나를 속였어.”
브라운을 부축해 일으켜 세운 덴이 그를 올려다봤다.
어렸을 적에 두어 번 정도 봤던 명성 그대로 거대한 덩치와 위압감이 여전했다.
“폰네시는 페르탈린을 믿지 않아!”
사나운 눈빛이 두 사람에게 닿았다. 그의 포효에 병사들이 등 뒤에서 고함을 내질렀다.
얼음 위에 세운 페르탈린의 영주성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기세가 대단했다.
덴은 충격에 빠진 브라운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저희는….”
“됐다. 상황이 어떤지는 너희보다 내가 더 잘 알지.”
물론, 기회는 주지 않았다.
그가 한 손에 대검을 뽑아 들고 이내 두 사람에게서 등을 돌렸다.
도열한 병사들의 앞으로 다가선 재스퍼 밋치가 다시 한번 포효했다.
“폰네시가 무너졌다!”
원하던 방향과는 다른 그림이지만 그의 입을 통해 폰네시의 상황이 똑똑히 전해졌다.
브라운은 멍하니 그들이 지껄이는 폰네시의 끝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들어야 했다.
“이제 서대륙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날 차례가 온 것이다!”
모여 있는 전군이 흥분했다.
페르탈린의 영주가 그 모습을 눈에 담고 다시 한번 칼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나는 그 변화의 바람을 북풍으로 뒤바꿀 것이다. 모두 나와 뜻을 함께하겠는가!”
이들은 이 일을 기회로 삼을 작정이다. 그런 자들이 향할 곳은 빤했다.
“전군! 센느로 진격하라!”
폰네시의 후계자가 살아 있는 그곳으로.
“…공자님이 위험합니다.”
페르탈린군의 반역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