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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28화 (28/133)

28화

7장. 북풍이 불어오면(3)

“도련님, 워렌 경은요? 부탁한 바느질이 끝났는데.”

그 시각, 센느.

레온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창밖을 바라보다 메리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죽 늘어진 홑겹 로브를 품에 안고 있었다. 워렌의 것이다.

“그냥 둬.”

“예?”

“당분간은 입을 수 없으니까 그냥 두라고.”

“어째서 입을 수 없는데요? 설마… 기사님을 어디로 내보내신 거예요?”

메리가 허름한 침대 위에 로브를 내려두고 레온에게 다가갔다.

걱정이 많은 늙은이에게 짐을 얹어주고 싶진 않은데.

레온이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요 며칠 보이지 않아 걱정했더니 설마 도련님께서 내쫓은 거예요?”

침대 아래 숨어 있던 새끼 스노우 울프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바닥까지 늘어진 로브엔 지워지지 않는 진한 피 냄새가 남아 있었다.

새끼 스노우 울프가 킁킁거렸다.

“누굴 망나니로 알아.”

“…아니라고 하실 순 있고요?”

“메리, 요즘 건강하지?”

“아프길 바라세요?”

“그런 건 아니지만.”

레온이 말장난을 관두고 도로 창밖을 바라봤다.

이른 새벽부터 몰아친 눈 폭풍이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거세졌다.

“근데 왜 자꾸 밖을 내다보세요. 내쫓아놓고 걱정은 되시나 보죠?”

“브라운을 걱정하는 거거든?”

“아, 확실히 오늘쯤이면 돌아오겠네요.”

“그리고 내쫓은 적 없다니까 그러네.”

“믿을 수가 있어야죠! 그 성정에 기사님을 또 얼마나 괴롭히셨을까.”

진짜 누구 유몬지 알 수가 없다.

레온이 뚱한 표정으로 귀를 막을 때였다. 등 뒤에서 메리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머!”

어느새 바닥 아래 널브러진 로브가 처참한 꼴을 하고 있었다.

뭉쳐진 옷감 위에 새끼 스노우 울프가 자리를 잡고 신나게 로브를 물어뜯고 있었다.

“이놈!”

크르르르르!

“어디서 버릇없이!”

옷가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새끼 스노우 울프가 털을 삐쭉 세우고 메리에게 이를 드러냈다.

메리가 주변을 둘러보다 화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새끼 스노우 울프가 옷가지를 입에 물고 쏙, 다시 침대 아래로 숨어버렸다.

쾅쾅쾅!

그때였다.

침대 아래서 한참 새끼 스노우 울프와 실랑이를 벌이던 메리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말없이 바깥을 살피던 레온도 마찬가지다.

“레온 공자님, 안에 계십니까?”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이어지더니, 이번엔 레온을 부르는 낯선 목소리도 함께였다.

메리가 탈탈 먼지를 털어내고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심스레 문을 열어 바깥을 살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아이작 영주의 시종인 두티스라고 합니다.”

살집이 있고 노쇠한 늙은이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 정중한 태도에 메리가 한쪽으로 비켜섰다.

어느새 문 앞까지 다가온 레온이 경계의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우리 영주께서 공자님을 뵙자 하십니다.”

“아이작 영주가?”

“예, 공자님.”

일행이 돌아왔을 리는 없고, 레온이 두티스를 아래위로 살폈다. 그는 확실히 아이작의 곁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알겠네. 바로 나오지.”

레온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한쪽에 숨겨놓은 몬데이어 공작가의 단검을 꺼내들었다.

메리가 불안한 눈초리로 레온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이거 받아.”

“예?”

레온이 메리의 손 위에 단검을 꼭 쥐어 주었다.

메리의 연둣빛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저도 같이 가요, 도련님.”

“아냐. 메리는 여기 있어. 아이작 영주는 괜찮을 거야.”

“그야 그렇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저 자식을 이용해. 이름값은 하겠지.”

레온은 침대 아래 숨어 있는 새끼 스노우 울프에게 들으라고 그런 말을 내뱉었다.

녀석은 다행히 메리에겐 얌전히 굴었다. 다정히 대해줄 인간이 이곳에 메리밖에 없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다녀올게. 곧 브라운이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예, 도련님.”

레온이 메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문을 나섰다.

기다리고 있던 두티스가 공손하게 허리를 굽실거리며 재빨리 레온을 안내했다.

“영주께서 나는 왜 보자 하시지?”

“저도 잘 모릅니다만… 은밀히 오시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셔서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두티스가 안내한 건 영주성 내에서 식솔들이나 쓸 만한 보이지 않는 뒷길이었다.

메인 연회장으로 가는 내부 계단엔 확실히 보는 눈이 많았다.

폰네시의 소식이 전해진 후로 배치된 병력도 두 배는 늘었다.

두티스가 뒤편 복도와 이어진 나무 문을 열고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레온은 오히려 그런 태도에 아이작의 의도를 눈치챘다.

‘히스 토바를 경계하는군.’

두티스와 함께 뒤편 계단으로 돌아 내려가자 곧 컴컴한 복도가 나왔다.

센느의 역사를 기록해두는 낡은 서고 앞이었다.

“영주님, 레온 공자를 모셔왔습니다.”

두티스가 조심스레 서고 앞으로 가 속삭였다.

“왜 대답이 없으시지? 영주님, 저 두티습니다.”

먼지와 거미줄이 나앉은 서고의 문은 미동조차 없었다.

레온이 주변을 살폈다. 횃불 몇 개에 의존해 일렁이는 어두컴컴한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얼음이 얼었다 녹았다 하기를 반복한 석벽 위엔 물방울이 흐르고, 먼지와 흙으로 질퍽거리는 바닥엔 물이 고여 바라보는 레온의 얼굴을 흐리게 비췄다.

그리고 혹독한 날씨 탓에 뒤틀린 서고의 문 위로, 오래된 먼지를 쓸어낸 손자국이 보였다.

기이이익.

“영주….”

아이작 토바의 키보다 한 뼘은 큰 높이에 위치한 손자국이.

“으윽!”

문이 열리며 코앞에서 두티스가 쓰러졌다. 그가 주저앉자마자 내부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히죽 웃고 있는 히스 토바였다.

“어서 오시오, 레온 공자.”

히스의 목소리가 신호였는지 어둠 속에서 센느군 여럿이 튀어나와 순식간에 레온을 둘러쌌다.

도망갈 틈도 없었다. 그들은 곧장 창끝을 레온에게 겨누었다.

‘제길….’

레온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야심이 일렁거리는 히스 토바의 눈동자는 어두운 곳에서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

정신을 잃은 두티스가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었다.

따로 묶어둘 필요도 없었다. 늙고 힘없는 시종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포도주를 마시겠소?”

히스 토바가 가증스럽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한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 있는 아이작 영주가 불안하게 눈동자만 굴려댔다.

“히스… 이러지 말거라.”

레온은 센느군에게 둘러싸여 창으로 위협받고 있었다.

이건 명백한 적의다. 센느의 영주성에서, 그것도 영주의 부름에 찾아온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폰네시에 대한 반역이었다.

“저만 빼고 만나려 했다니. 이거 섭섭하고 속이 상해서 말이죠.”

히스 토바가 포도주를 마셔 넘겼다. 그러곤 어둑한 서고 한가운데에 서 있는 레온을 향해 다가갔다.

곁에 서 있는 아이작이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거렸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은밀히 불러들였는지.”

마주한 두 사람이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봤다. 별로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네가 영 신뢰받지 못하는 모양이네. 아버지에게.”

레온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이작은 히스 토바 몰래 자신을 만나려 했다. 그건 히스 토바가 위험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여전히 기세가 좋군. 붙잡힌 주제에.”

“상황이 달라졌다고 상대가 달라진 건 아니니까.”

잔을 든 히스 토바의 손끝이 새하얘졌다.

부들거리던 그가 창을 겨누고 있는 병사들에게 턱짓했다.

신호를 주자마자 병사들이 레온을 억지로 무릎 꿇렸다. 지켜보던 아이작이 비명을 내질렀다.

“히스!”

“아버진 조용히 좀 하세요!”

쨍그랑!

히스 토바가 잔을 내던졌다. 아이작의 발치에서 산산조각이 난 유리잔이 그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대체…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레온 공자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 너 도대체!”

“할 수 있는 말이 그런 것밖에 없어요? 도대체 무슨 짓이냐. 이런 식으로 대해선 안 된다?”

“히스!”

“이 자식이 대체 뭔데!”

분노한 히스가 검을 빼 들었다.

주저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 앞에 곧바로 날카로운 검날이 들이밀어졌다.

“더 이상 동북부의 패권자도, 폰네시의 후계자도 아니라고!”

히스 토바가 무엇을 꿈꾸는지 이로써 확실해졌다.

‘날 넘기려는 거야.’

빠져나갈 기회를 잡아야 했다. 레온이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병사들의 표정이 어두운데.’

그들은 영주인 아이작 토바를 적대시하는 게 영 내키지 않아 보였다. 진심으로 따르고 있는 자가 없는 것 같았다.

지금 병사들을 흔들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저 머저리에게 붙잡힐 게 분명했다.

“너희의 주군은 히스 토바가 아니라 아이작 토바다.”

레온의 목소리에 아버지와 대치 중이던 히스 토바가 고개를 돌렸다.

화가 난 그의 두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레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가 칼을 겨눠야 할 건 내가 아니지 않나?”

“…….”

“반역자가 되길 자처하다니. 한심한 자식들.”

병사들이 눈만 굴려 서로를 바라봤다. 확실히 이곳에 원해서 이러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어 보였다.

히스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건 무서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영주에게 반역을 저지르는 것도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

센느의 갑옷을 입고 있는 병사들이 우물쭈물하다 결국 레온에게 겨누었던 창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두고 양팔을 들었다.

늦을세라 다른 병사들도 모두 무기를 내렸다.

창과 검이 거친 소리를 내며 낙하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레온!”

아이작이 때를 놓치지 않았다. 히스를 밀치고 서둘러 달려온 그가 레온을 등 뒤에 숨겼다.

그리고 분노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아들을 마주했다. 지금이라면 되돌릴 수 있다는 듯.

“히스, 이제 그만해라. 널 도울 자는 이곳에 단 한 명도 없어.”

“글쎄요.”

“제발 그만해! 폰네시가 무너졌다고 해서 그들에게 은혜를 입은 그 수많은 가문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니야!”

“그딴 개소리! 아버지는 늘 그런 식이죠.”

히스 토바가 위협적으로 아이작에게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순간에 아이작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히스는 그를 밀어뜨리고 다리를 짓밟아 턱밑에 곧장 검을 겨누었다.

코앞에서 상황을 지켜본 병사들이 겁에 질려 너도나도 소리를 질러대며 뒷걸음질 쳤다.

“어쩌죠? 이제 아버지를 지킬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주저앉은 병사들의 손끝이 달달 떨렸다. 늘 가까운 거리에서 봐온 히스 토바의 실력을 알기에 쉽사리 덤빌 수 없었다.

그는 괴물이다. 상대할 수가 없다.

“모두 검을 들어!”

이래선 안 된다. 레온이 그들을 향해 다시 한번 외쳤다.

“영주를 보호하고 반역에 맞서란 말이야!”

하지만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아니, 나설 수 없었다.

히스 토바가 그런 모두를 비웃었다. 쓰러진 아이작이 고통에 신음했다.

“으으….”

다리를 짓이긴 뒤 히스 토바가 시선을 돌렸다.

그저 소리치는 것밖엔 할 수 없는 불쌍한 레온이 그곳에 있었다.

“공자가 곱게만 자라 아는 게 하나도 없나 본데.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아?”

“…윽. 이거 놔!”

히스 토바가 곧장 레온의 머리채를 쥐어 잡았다. 그리고 레온을 품에 안고 목 가장 얇은 피부 위에 날카로운 검날을 들이밀었다.

레온이 파고드는 날카로운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반역이나 전쟁 그딴 게 아니라 바로 나다. 지금 당장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나.”

레온의 목에서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히스 토바가 그런 레온을 질질 끌고 아이작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이작이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히스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아버지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생각이죠.”

레온은 점점 숨이 막혀오는 걸 느꼈다. 등 뒤에서 붙잡은 히스의 손아귀 힘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의 팔을 타고 흐르는 검붉은 피가 낡은 서고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손잡아야 할 건 이 자식이 아니라, 데로니스 왕조거든.”

이제 서대륙에 폰네시는 없다.

그건 이 세상 물정 모르는 공자에게 더 이상 뽑아먹을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부터 아이작 토바를 가두고 모두 이곳을 감시해라.”

히스는 쓰러져 있는 병사들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

“이제부터 내가 센느의 영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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