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7장. 북풍이 불어오면(4)
비밀을 갖는다는 건, 남들이 찾을 수 없는 무기 하나를 지니고 있는 것과 같다.
“이봐… 모아둔 재산은 좀 있어?”
“있겠냐. 이 거지 같은 촌구석에서 뭐 얼마나 대우를 받는다고.”
“그럼 이제 어쩌지. 저 폰네시의 후계자가 죽게 되면 우리만 죄를 뒤집어쓰는 거 아니야?”
“저도 무서운지 죽진 않게 잘 돌보라잖아. 사람을 짐승 사냥하듯 그렇게 패댈 때는 언제고….”
레온은 죽은 척 눈을 감고 병사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현재 레온은 높은 외벽 감옥 꼭대기에 갇혀 있었다.
“아이작 영주님은 괜찮으실까?”
“…괜찮길 바라야지.”
히스 토바는 영리했다.
동요하는 병사들을 보곤 곧바로 아이작을 무력화시키고 스스로 영주가 되었다.
이제 이곳 센느에서 히스의 명을 거절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문제의 싹을 잘라 버리려는 듯 레온을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가두기까지 했다.
감옥 앞을 지킬 단 두 명의 병사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윽….”
귓가에 파고드는 바람 소리만이 사나워질 때였다. 기회를 노리던 레온이 고통에 겨운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귀한 몸으로 버틸 수 없을 만큼 쉴 새 없이 분풀이를 당했기에 레온의 외관은 끔찍했다.
병사들이 놀라 철창 가까이로 달려왔다.
“고, 공자! 괜… 괜찮으십니까?”
“…물, …물 좀….”
“물! 예! 여기 있… 아니, 이게 왜 다 얼었지?”
“당연하지 멍청아, 이 날씨에!”
레온이 숨을 헐떡거리며 병사들에게 애원했다.
“…어서, 물 좀 줘.”
레온은 긴 시간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다. 적어도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두 사람이 다급하게 역할을 분담하기 시작했다.
“넌 빨리 새 물을 떠 와! 나는 히스 공자께 다녀오겠어.”
“그래! 공자,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여기서 이 존귀한 공자가 죽어버리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한평생 살기 위해 살아왔는데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쓸 순 없었다.
“서둘러! 뭘 하고 있어.”
“지금 가!”
두 사람이 우당탕 쿵쾅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외벽 감옥을 벗어났다.
한참만에야 인기척이 사라지자 레온이 서서히 눈을 떴다.
“…갔나?”
매서운 바람 소리만 들릴 뿐 더 이상 소란은 느껴지지 않았다.
레온이 벌떡 일어났다. 어깨를 깊게 베이고 곤죽이 되도록 온몸을 맞았지만, 그딴 건 나은 지 오래였다.
‘인간들이 라피스를 왜 그렇게 찾아대나 했더니.’
인어의 영혼 조각인 라피스는 모든 생명에게 활력을 주었다. 심장의 겉을 단단하게 몇 겹으로 에워싸고 생명을 보호했다.
상처가 금세 나아가는 게 느껴졌다. 라피스가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레온은 뜨겁게 반응하는 가슴을 톡톡 다스리며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다.
‘여기가 어디야… 엄청 높잖아?’
고개를 쭉 내밀고 아찔한 바닥을 내려다봤다.
외벽 감옥은 탑의 꼭대기 같은 곳에 마련돼 있었는데, 바람을 막아주거나 밖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호해줄 것이 전혀 없는, 말 그대로 벽의 바깥에 죄인을 가두는 곳이었다.
여기서 추락한다면 금지된 숲속 한가운데에 떨어지게 된다.
아마 수많은 산짐승이 살아 있던 시기엔 이곳이 더 공포스럽지 않았을까?
레온이 몸을 잘게 떨었다.
‘내가 꼼짝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말이야.’
하나 애석하게도 레온에겐 비밀이 있었다.
남들은 알 수 없는 그 비밀 덕에 금세 상태를 회복하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레온이 휘휘 고개를 내젓고 서둘러 외벽 감옥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어서 여길 벗어나자.’
깡깡 얼어붙은 얼음 조각으로 밧줄을 끊어냈다.
외벽은 폭이 좁은 돌계단으로 탑 아래까지 이어져 있었다.
눈 폭풍에 얼어붙어 있어 까딱 잘못하면 아찔한 높이에서 추락할지도 몰랐다.
‘살벌하네.’
히스 토바에게 복수도 못 했는데 이대로 죽을 순 없지.
레온이 조심조심 발을 내디뎠다. 못 움직일 거라 방심해서 그런지 탑 주변을 감시하는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두셋 정도.
체구가 작아 나무 뒤에 몸을 숨기기란 어렵지 않을 일이었다. 레온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달렸다. 금세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나… 데로니스를 쳐부수려면 체력부터 키워야겠는데?’
비쩍 마른 겨울나무에 기대어 서자 헉헉거리며 숨이 쏟아져 나왔다.
그 누구도 공격하지 않았지만 나약한 체력으론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역시 검술이라도 배워둘 걸 그랬나.’
워렌이 돌아온다면 반드시 단련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레온이 풀숲에서 빼꼼, 고개만 들어 주변을 살폈다. 영지민 마을까지는 아직도 한참 남아 있었다.
‘물론… 그전에 여길 먼저 잘 빠져나가야겠지.’
들키지 않고 나가려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레온이 상념을 지우고 다시 나무 뒤에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
작은 성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볼 것 없는 마을엔 수많은 경계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뭐야.’
병사들이 늘었다. 누군가를 찾는 움직임이 분주했다.
센느군 병사들이 죄 없는 영지민들을 살피느라 바쁜 것을 보며 레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탈출한 걸 눈치챈 건가?’
레온은 현재 다 부서져 가는 민가 담벼락에 달라붙어 있었다.
바로 맞은편에 폰네시의 병사들이 있다. 병사들은 그곳에서 레온이 가져온 지원품을 보호하며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으음… 저게 필요한데.’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센느군이 슬슬 임시 거처에 모여드는 게 보였다.
보는 눈이 너무 많다. 괜한 움직임으로 병사들마저 운용하지 못하게 된다면 낭패였다.
‘아, 정말 쉬운 게 하나도 없네.’
레온은 병사들을 이끌고 아이작 영주를 구출할 계획이었다.
이번 작전에서 아이작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기에.
“길을 비켜라!”
그때, 가까운 곳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길을 비켜라! 우리의 새 영주, 히스 토바 님이다!”
“…영주? 히스 공자께서?”
“아잇! 조용히 하고 일단 비키자고, 이 사람아.”
“쉿! 병사들이 와요.”
레온이 다시 차가운 담벼락에 바짝 달라붙었다. 코끝에서 얼어붙은 벽의 기운이 모두 느껴졌다.
‘…왜 기어 나온 거야, 저 자식.’
다행히 히스는 빠르게 이곳을 지나쳤다.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성벽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누굴 맞이하기 위해서?
혹시 덴과 브라운이 돌아온 걸까?
‘좋아, 지금이야.’
레온은 병사들을 이끌고 아이작을 구출해 히스가 아닌 센느군을 압박해볼 작정이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생존 그 자체다.
영주를 지키기 위한 정의나 개인의 명예보다 더 앞서는 두려움은 바로 죽고 사는 현실 문제였다.
‘결국 선택을 하게 만들면 되는 거잖아?’
센느엔 당장 이번 혹한을 버틸 수 있는 식량과 자원이 부족했다.
지금 센느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폰네시의 지원품뿐이다.
히스가 두려운 것만큼 또 두려운 문제를 던져준다면, 결국 그들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보호를 약속한다면 분명 아이작을 따를 거야.’
역시 지금 당장 병사들이 필요했다.
그들에게 가야 해.
레온이 숙였던 몸을 당당히 펴고 대담하게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공자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레온의 손목을 홱 낚아챘다. 순식간에 몸이 돌아가 낯선 가슴팍에 고개가 처박혔다.
뒤통수를 납작하게 내리누르는 손길에 레온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예상치 못한 얼굴이었다.
“어… 너는?”
“쉿! 적군이 옵니다.”
추위 속에 쓰러졌던 폰네시의 병사 케인이었다.
그가 다시 한번 레온의 머리통을 잡아끌었다. 등 뒤에서 빠른 속도로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너, 살아 있었어?”
“…예? 그럼요. 잠깐 죽었던 것 같긴 한데 아무튼 살아 있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몸은 괜찮아?”
“그런 얘긴 나중에 하는 게 좋겠습니다, 공자님.”
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꾸했다. 뭐라 더 물으려는 찰나, 케인이 레온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어느새 센느군 행렬이 가까워졌다.
말을 타고 순식간에 영지민 마을까지 달려온 이들이 히스 토바와 손님을 호위했다.
“째려보지 마세요. 저도 좋아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에요.”
말장난을 할 시간도 없었다. 레온이 저보다 머리 한 뼘은 큰 케인의 등 뒤에서 고개를 빼고 상황을 살피기 위해 눈을 빛냈다.
센느군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많은 병력이 히스 토바의 뒤로 줄줄이 이어졌다.
“…페르탈린의 군대네요. 그들이 전 병력을 이끌고 이곳에 왔어요.”
기수가 들고 있는 가문의 모양이 그러했다.
페르탈린이 병력을 이끌고 이곳까지 왔다면 상황은 뻔했다.
레온이 푸른 눈동자로 재빠르게 브라운과 덴을 찾기 시작했다.
“폰네시의 후계자는 어디 있소, 히스 공자?”
“여독 먼저 푸시지요. 들어가 추위를 녹이고 계시면 곧바로 만나볼 수 있을 겁니다, 재스퍼 경.”
“하긴, 오는 동안 눈 폭풍이 지독했지. 우리 병사들이 안에서 몸을 녹여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자, 어서 드시지요.”
지근거리에서 히스 토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정중한 태도로 재스퍼를 먼저 영주성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꿍꿍이 있어 보이는 태도에도 재스퍼는 여유롭게 그 말을 따랐다.
“레온 그 자식은 찾았어?”
“…여, 영주님!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건 못 찾았단 소리잖아, 이 쓸모없는 자식들!”
얼어붙은 갑옷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정강이를 걷어찬 게 분명했다.
케인은 조금 더 깊게 몸을 웅크리고 최선을 다해 숨었다. 꼿꼿한 레온의 머리통을 눌러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탑 주변부터 영지민들의 집 안 하나하나까지 모두 살펴. 참, 그리고.”
다시 한번 볼품없는 갑옷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 늙은 유모를 잘 살펴봐. 분명 제 자식 같은 도련님이 어디 갔는지 알고 있을 테니까.”
“당장 유모부터 심문하겠습니다!”
“좋아. 오늘 저녁까지 찾지 못한다면 너희 중 한 명이 죽은 레온의 역할을 대신해야 할 거다. 알겠어?”
“예, 예! 영주님!”
“멍청한 것들 같으니라고.”
히스 토바가 분에 못 이겨 발걸음을 되돌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레온이 질퍽한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돌리니 어두운 영주성 안에 있을 메리가 떠올랐다.
“공자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제가 깨어난 후로 쭉 분위기를 살폈지만 지금만큼 곤두서 있을 때가 없었어요. 몸을 피하시는 게….”
“아니, 돌아가야 돼.”
“…예? 어디로요. 설마… 성안으로요?”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안에 메리가 있다. 그리고 덴과 브라운, 제가 지켜야 할 모두가 저곳에 있었다.
“난 죽지 않아.”
“…예?”
라피스가 있으니 히스 토바가 무슨 짓을 해도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메리나 브라운은 아니다. 그들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저들이 없으면 살아서도 의미가 없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적어도 그 두 사람만큼은 반드시 되찾아야 했다.
믿을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도 그들은 영원히 내 편일 테니까.
“…공자님.”
“내가 구하러 가야 해.”
주저앉아 있던 레온이 벌떡 일어나 영주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지켜보는 케인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정말이지, 목숨을 걸고 지켜주고 싶은 공자님이었다.
“저도 같이 가요, 공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