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7장. 북풍이 불어오면(5)
평화롭다 못해 갈등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었던 센느 땅에 수많은 병력이 밀집했다.
레온은 영주성 마당에 모인 페르탈린 전군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벌써 손을 잡았다고? 히스 토바… 작정을 했구나.’
북부의 영지들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사이기 때문에 관계가 좋을 수 없었다.
하나 페르탈린은 영지의 전 병력을 이끌고 이곳에 왔다. 이토록 빠른 결정이라니.
그의 야심은 한두 해 먹은 섣부른 판단이 아니었다.
언제고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분명 대비하고 있었던 거다.
‘이렇게 되면 아이작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불가능해.’
센느군까지는 어찌해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저 수많은 페르탈린군과 맞서 싸울 방법은 없었다.
이미 히스와 손을 잡아버린 재스퍼가 아이작의 말에 귀 기울여줄 것 같지도 않았다.
역시 사람은 믿을 게 못 돼.
레온이 고개를 돌려 영주성을 바라봤다.
‘메리와 브라운을 되찾자. 그리고 워렌을 만나는 거야.’
폰네시에서 가져온 지원품만 있다면 동대륙까지 넘어가는 일도 시도해 볼 만했다.
그곳으로 가 다이아 스틸을 깨부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레온이 케인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주변을 살피던 케인이 냉큼 고개를 돌렸다.
“상황은 좀 어때?”
“손님을 맞이해선지 오히려 경비가 소홀해졌어요. 타이밍만 잘 맞추면 진입하기 쉽겠는데요?”
“그래, 다들 정신이 없어 보여.”
동맹이라고는 하나 완전 무장한 페르탈린군이 영주성을 에워싸고 있으니, 생각 없는 센느군도 바짝 긴장한 게 느껴졌다.
케인이 계속해서 주변을 살폈다. 때가 되면 레온을 먼저 성벽 위로 밀어 올려줄 참이었다.
레온도 잠자코 그의 신호를 기다렸다.
“근데요, 공자님.”
“응, 나 올라가면 돼?”
“아뇨, 궁금한 게 있어서요.”
“그걸 꼭 지금 물어봐야겠어?”
언제 발각될지 모르는 이 중요한 순간에 도대체 뭐가 궁금하단 말인가.
“뭐, 말해봐.”
“워렌 경은 어디로 갔나요?”
시답잖은 질문이라면 등짝을 때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반드시 궁금해할 물음이었다.
“어디로 갔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요. 혹시 따로 무슨 명이라도 내리신 건가요?”
레온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폰네시의 병사들을 살펴보고 첩자를 찾아내라는 명을 내리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밀이었다.
이놈은 아직 믿을 수 없다. 그러니 케인에게 미주알고주알 모든 걸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빠져나가려면 우리만으론 안 돼요. 반드시 워렌 경이 필요하다고요. 그분은 혼자서 센느군 전부를 이길 수도 있을걸요?”
강할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주변 동료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을 줄은 몰랐다.
레온은 호오, 입을 동그랗게 모으며 놀랐다가 금세 표정을 지웠다.
“그럼 너는? 너는 어떤데?”
“저도 워렌 경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근데 그런 건 왜 물으세요? 불안하게.”
“아니, 뭐.”
“설마 워렌 경이 더 이상 공자님의 호위 기사가 아니라든가, 어딘가로 멀리 가버렸다든가 그런 비극적인 말씀을 하시려는 건 아니죠?”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너.”
레온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사실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는 워렌이었다.
곁에 호위 기사를 뒀다면 이런 어려움 따위 겪지 않아도 됐을 테니 말이다.
‘히스 저놈이 페르탈린이랑 손잡을 줄 내가 알았겠냐고.’
아이작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영주가 된 것 또한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였다.
그 정도로 패륜아일 줄은 몰랐다.
“아무튼 워렌은 찾지 마. 우리 힘으로 해결해야 돼.”
레온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슬금슬금 옆으로 이동했다.
벽에 달라붙어 게걸음을 걸어야 했지만 저 뜨거운 눈빛을 마주하고 있는 것보단 이쪽이 훨씬 덜 수치스러웠다.
“진짜 워렌 경을 어떻게… 해버린 건 아니죠?”
“뭘 묻고 싶은 건데?”
딱히 대답할 만한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근데 뉘앙스가 좀 이상하네, 누가 본다면.
“설마! 진짜 죽였어요?”
케인이 덥석 레온의 손목을 붙잡고 흔들었다.
죽였냐고 묻는 표정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레온이 살벌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너야말로 죽여줘?”
케인은 고개도 젓지 못했다. 의지할 게 서로밖에 없어 잠시 잊었는데, 제가 손목을 잡고 있는 사람은 그 유명한 폰네시의 후계자였다.
밉보이면 거꾸로 매달아 놓고 머리카락을 다 뽑아버리는 악취미를 가졌다고 했던가?
“아뇨. 전 아직 머리털을 지키고 싶은데요.”
“그럼 그만 까불고 주변이나 살펴. 영주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내가 아니까.”
레온이 홱, 손을 놓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얌전한 대꾸에도 케인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튼 워렌을 찾기 전까지는 곁에 꼭 붙어 있어야 했다.
“같이 가요, 공자님!”
지금 레온을 지킬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인 것 같으니.
케인이 성큼성큼 긴 다리로 레온을 금세 따라잡았다.
***
“폰네시가 무너진 건 확실한 겁니까, 재스퍼 경?”
“그렇소. 우리 경계 정찰병이 직접 확인한 일이니 분명하지.”
고요한 영주성 복도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유 만만한 히스 토바와 풍채 좋은 페르탈린의 재스퍼 밋치가 그 주인공이었다.
“소식에 의하면 하일 데로니스의 총애를 받고 있는 젊은 사령관이 폰네시를 차지했다더군.”
“아직 떠나지 않았답니까?”
“찾는 게 있으니 당분간 그곳에 머무를 테지.”
그게 무엇인지는 두 사람이 아주 잘 알았다.
재스퍼가 우뚝 발길을 멈추었다. 뒤따르던 시종들이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휘청이자 복도의 불빛이 일렁였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잘 따라오다가 갑자기 멈춰 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따른다.
히스 토바가 모른 척 여유 만만하게 고개를 돌렸다.
재스퍼의 형형한 눈빛을 어둠 속에서 보니 등 뒤가 서늘했다.
“인질을 폰네시까지 이동시키는 건 우리 페르탈린이 맡지.”
그는 뜻을 숨기는 법 따위는 몰랐다.
적어도 하고자 하는 말은 상대방의 면전에 던지고, 숨겨야 하는 일이라면 죽음이 닥쳐와도 혀 밑에 삼키는 게 그의 철칙이었다.
예상한 물음에 히스가 미소 지었다.
재스퍼 역시 대답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건 어렵겠는데요.”
시종들이 두 사람의 뒤에서 몸을 떨었다.
역시 동맹은 안 되는 걸까?
아주 오래전부터 북부의 지역들은 생존권을 놓고 서로 경쟁해왔다.
사이좋은 척하지만 뼛속부터 거부감이 드는 관계였다.
“우리가 계속 우리가 되기 위해선 모든 일을 함께해야 합니다.”
뜻을 같이하기로 했으니 독단적인 행보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레온을 이동시키는 것도 함께해야죠. 간 김에 폰네시 구경도 좀 하고.”
히스가 덧붙인 말에 금세 분위기가 풀어졌다.
재스퍼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괜한 일에 힘겨루기를 벌이는 건 역시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들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인질 상태는 어떤가, 히스?”
복도 기둥 너머로 두 사람을 조용히 뒤따르는 이가 있었다.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기에 좀 가르쳐 줬습니다.”
“가르쳐 줘? 뭘.”
“처한 환경을 직시하라고요. 눈바람이 몰아치는 외벽 감옥에 가두어 놨으니 현실을 좀 깨우쳤겠죠.”
“외벽 감옥이라면, 저 높은 탑층에 있는 걸 말하는 건가?”
“예, 곧 데리고 올 테니 우선 이쪽으로 가시죠. 우리의 아이작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복도를 붉게 물들인 횃불도 서서히 물러갔다.
다만, 어둠 속에서 그들을 뒤따르던 워렌은 걸음을 멈추었다.
‘공자께서 외벽 감옥에 있다고?’
워렌은 그간 레온의 명을 따르기 위해 영지민 마을을 살피고 있었다.
그곳에서 폰네시군의 행적을 추적하고 첩자를 골라내기 위해 몇 날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성과가 없던 건 아니다. 수상한 움직임을 발견한 직후 병사 둘의 이탈을 확인했다.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지체없이 레온을 찾았다.
하나 그 어느 곳에서도 공자를 찾을 수 없었다.
‘제길.’
한데 레온이 감옥에 있다니.
워렌의 표정이 말도 못하게 일그러졌다.
‘공자께서 당한 만큼 되갚아주지, 히스 토바.’
워렌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빠르게 복도를 벗어났다.
히스 토바가 나서기 전에 레온을 구하려면 시간이 부족했다.
***
영주성 지하 서고.
“아버지, 아르고가 돌아왔어요.”
미셸이 문 너머 갇혀 있는 아이작 토바에게 말했다.
“폰네시에서 서신을 들고 돌아왔니?”
“네, 오라버니가 확인하기 전에 몰래 빼내었어요. 이제 어쩌죠?”
등 뒤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불안감을 조성했다.
언제 히스가 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저리고 등 뒤가 서늘했다.
“루시오 공작이 마지막으로 남긴 서신이니, 반드시 레온 공자에게 전해 주어야겠지.”
“…하지만, 공자가 어디 있는지는 몰라요. 외벽 감옥에 가봤지만 안 보이던걸요?”
“그곳에 갔었니, 미셸?”
헙! 미셸이 화들짝 놀라 제 입을 막았다.
성인 남성들도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오르지 못하는 곳이다.
그 무서운 곳에 막내딸이 겁도 없이 찾아갔다니.
아이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갇혀 있는 늙은이가 해줄 말이 전혀 없었다.
“아버지, 대체 언제까지 거기 계셔야 해요? …제가 히스 오라버니에게 말해서….”
“미셸! 내 말 잘 들어라!”
문안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에 미셸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지금부터 최대한 네 어머니의 곁에 바짝 붙어 있어라. 위험하게 외벽 감옥에 혼자 가는 일도 해선 안 돼. 절대 히스의 뜻을 거스르지 말고. 알겠니?”
“…하지만 오라버니는 이상해요! 자기 입으로 새 영주라고 떠들어 댄다고요!”
며칠 내내 보이지 않던 아버지를 찾는 건 오직 미셸뿐이었다.
집안사람들도 모두 이상했다.
식솔은 물론이고 덜떨어진 센느군 병사들도 아이작은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린 것처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낡은 서고를 찾아왔을 때 그곳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미셸이 두꺼운 쇠사슬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대체 이게 다 뭐예요!”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바뀌어 버렸다. 목숨 줄 같던 폰네시가 넘어가고, 늘 권위적이고 무서웠던 오라버니는 미치광이처럼 변했다.
의지할 곳이 없었다. 어린 미셸이 눈물을 닦아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아버지가 자책하는 게 싫었다.
“나의 딸 미셸, 이것만큼은 절대 잊지 마렴.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건 네 목숨이란 걸. 네가 선택해야 할 건 오직 그것뿐이야. 알겠니?”
“…자꾸 불안하게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알겠으니까 걱정 마세요.”
어두컴컴한 복도 끝에서 둔탁한 발걸음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오는 모양이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미셸이 서신을 움켜쥐고 주변을 둘러봤다. 숨을 만한 곳이 필요했다.
다행히 미셸은 어려서부터 언니들을 피해 이곳저곳에 숨어 있길 좋아했다.
“누군가 와요, 아버지. 다시 올 테니 걱정 마세요.”
미셸이 복도 맞은편에 위치한 장식장 문을 열었다. 가장 하단엔 다 구겨지고 먼지가 묻은 옛 휘장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조금 켁켁거리긴 했지만 미셸은 그곳에 몸을 숨기고 휘장을 뒤덮었다.
이제 이곳에서 어떻게 서신을 전해줄지 생각이나 하면 된다.
“이곳입니다.”
“이런 곳에 아이작이 있다고?”
“제가 가둬 두었지요. 자, 그럼 어서 안쪽으로.”
따분한 시간을 보내리라 걱정하던 지금이 가장 그리워질 줄 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