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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31화 (31/133)

31화

7장. 북풍이 불어오면(6)

낡은 서고의 문이 달칵 열렸다.

재스퍼 밋치는 히스의 안내에 따라 거대한 몸을 이끌었다. 그리고 바로 맞은편에 자리한 이가 누구인지 자세히 살펴봐야 했다.

“…저자가 아이작인가?”

“맞습니다. 아이작 토바.”

놀라웠다. 아이작은 낡은 의자에 앉아 꽁꽁 묶여 있었다. 아니, 사실 제대로 묶을 필요조차 없었다.

원래도 좋지 않았던 하반신은 이전에 겪은 고초로 이미 못 쓰게 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물을 깔고 앉은 아이작이 멍투성이의 부르튼 얼굴로 시선을 회피했다.

“…믿을 수가 없군.”

등 뒤에서 병사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스퍼는 히죽거리며 서 있는 히스 토바를 바라봤다.

목적이 분명하고 추진력이 뛰어나다고 평가할 만했지만 전대 영주를, 그것도 제 아버지를 이렇게까지 무너뜨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센느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죗값은 받아내야죠. 분명한 건 그것뿐입니다.”

히스 토바가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비웃음을 받고 있는 이가 고개를 저었다.

이까짓 수모는 얼마든지 겪을 수 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 되돌릴 수 있을 때 말려야 했다.

“…재스퍼 경, 경까지 이게 무슨 과오입니까?”

“또 헛소리를 하는군.”

“헛소리라니! 정말 폰네시가 땅을 빼앗겼다고 해서 끝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히스!”

아이작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다시 한번 아들을 구슬리기 위해 소리쳤다.

“가이아 왕조가 데로니스 대공가의 반역으로 무너지고, 지금 어떻게 됐는지 봐라. 평화를 맞았더냐? 진정 서대륙을 손에 넣었어?”

먼 북부 끝에 위치한 이곳에서도 서대륙의 비극은 모를 수가 없었다.

“아니, 지난 20년간의 전쟁을 기억해라. 폰네시가! 그들의 지지 세력이 데로니스와 맞붙었던 그 끔찍한 전쟁을 기억해! 지금도 가이아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이 서대륙을 노리고 있어. 폰네시의 후계자를 넘긴다면 우리 센느도 그 표적이 되는 거라고, 히스!”

이건 단순히 데로니스와 손을 잡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가이아 왕조의 가장 큰 지지 세력이자, 데로니스의 가장 큰 적대 세력인 몬데이어 공작가, 그 유일한 후계자를 넘기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다 어디 있는데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기에 아버지가 이렇게 벌벌 떨고 있죠?”

“…뭐?”

“가이아 왕조는 무너졌고, 지금 서대륙을 차지한 건 데로니스 왕조예요. 실패한 자들이 두려워 우리 센느가 살아날 기회조차 버리자고요?”

히스가 저벅저벅 걸어 아이작에게로 향했다.

겁만 많고 용기 하나 없는 이 늙은 영주는 더 이상 입을 놀릴 필요가 없었다.

히스 토바가 검을 꺼내 들었다. 뒤편에서 바라보던 모두가 말은 안 해도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한 번만 더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다시는 말하지 못하게 하겠어요. 자식으로서의 도리는 이게 마지막이니, 제가 불효를 저지르지 않게 협조 좀 하시죠.”

톡톡. 히스 토바의 검 등이 아이작의 어깨를 두드렸다.

재스퍼 밋치는 낡은 서고 내에서 벌어지는 이 보기 힘든 부자지간의 싸움을 더는 견디고 싶지 않았다.

“얼굴은 봤으니 됐소. 이만 돌아가서 인질을 만나는 게….”

“재스퍼 경, 당신만은 그러면 안 되지!”

뒤돌아서려던 히스의 인상이 살벌하게 뒤틀렸다.

“선대 몬데이어 공작께서 자네의 스승이 아니던가? 기사 노릇을 하게 해준 그분을, 검을 나눈 형제의 자식을 어찌 죽이려 해!”

“정말 돌아버리겠네.”

그렇지 않아도 마음 쓰고 있는 문제였다.

이 일로 재스퍼가 뜻을 거둔다면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히스 토바가 냉큼 아이작의 앞으로 가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우리 센느를 이 모양으로 몰락시켜 놓고 당신의 판단을 믿으라고?”

그런 일만은 막아야 한다.

“나서야 할 때와 나서지 말아야 할 때를 제대로 구분조차 못 하면서!”

북부 끝 아무도 찾지 않는 이 쓸모없는 땅덩어리를 얼어붙게 만든 건 다른 이들이 아니었다.

시대 흐름도 읽지 못하고, 비위조차 맞출 능력 없는 무능한 선대 토바들이 가문을 이 꼴로 무너뜨렸다.

아이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 절기에 찾아왔던 그 유일한 희망을 이도 저도 못 하고 저울질만 하다 놓쳐 버린 게 바로 이 멍청한 자였다.

“저 망할 후계자를 넘기고 우린 폰네시를 차지하겠어.”

그게 협상 조건의 첫 번째였다.

아이작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아들이 끔찍한 짓을 하는 걸 도저히 두고 볼 자신이 없었다.

“땅을 차지한다 한들, 그곳에 남아 있는 영지민들이 너를 따르기나 하고?”

운 좋게 폰네시를 차지한다 하더라도, 그곳에 남아 있는 모두가 센느와 페르탈린을 저주할 것이다.

살아 있는 유일한 몬데이어를 넘긴 대가를 살아가는 내내 치러야 할 것이다.

“폰네시의 은혜를 잊지 않는 이들이 곳곳에 있어. 그들 모두와 적이 되고 싶다면 폰네시에 가서도 외톨이 꼴을 면치 못하겠군.”

“…닥쳐.”

히스 토바가 검을 빼 들었다. 검집이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스산했다.

말릴 수는 없겠군.

재스퍼 밋치가 두 눈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센느군 병사들이 두려움에 온몸을 벌벌 떨었다.

“레온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람이다.”

아이작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히스에게 외쳤다.

“세상엔 네 생각과는 다른 일들이 항상 많다, 히스!”

“닥치라고! 으아아아!”

“으윽!”

빠르게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무언가 둔탁한 것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던 병사들은 뜨겁고 축축한 것을 뒤집어쓰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딴 개소리.”

주변이 고요해졌다.

“닥치라고, 영원히.”

히스 토바는 비로소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

“정말 여기가 맞아요?”

“분명하다니까.”

콜록콜록!

케인이 옷소매로 코와 입을 급하게 가렸다. 물론 이미 늦었다.

매캐한 탄내가 코끝을 찌르고 두 눈을 맵게 만들었다. 케인이 눈물을 질질 흘리며 앞을 더듬었다.

“분명 여기 어디 입구가 있을 거야.”

공자님은 화 속성인가. 도대체 왜 저렇게 평온하시지?

케인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잠자코 출입구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영주성 구석탱이에 위치한 화롯가를 누비고 있었다.

바깥에선 눈 폭풍이 몰아치고, 주변엔 불길로 피어오른 새하얀 연기가 가득했다.

레온은 그 안에서 내부로 진입하는 출입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내가 분명 탄내를 맡았어. 여기 어딘가에 문이 있…다! 찾았어!”

“예? 정말요?”

“그래, 이거!”

“제 손인데요?”

차갑고 딱딱한 게 분명 문손잡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레온이 홱 케인을 노려봤다.

케인이 얼어붙은 제 손을 소중히 품에 안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때 복도에서 정말 탄내가 진하게 났는데.’

숨겨진 뒤편 복도에서 분명 뜨거운 열기와 탄내를 느꼈다.

정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답은 쪽문밖에 없다.

반드시 찾아야 해.

레온이 다시 한번 벽면을 더듬을 때였다. 바로 옆 벽면에서 작은 벽돌 하나가 툭 떨어졌다.

“…공자님, 저, 저기.”

케인이 손을 뻗었다. 열심히 연기 속을 뒤지는 레온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레온이 켁, 숨이 막혀 고개를 돌릴 때였다.

“공자님!”

벽돌이 무너지고 그 안에서 금속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연기가 문을 밀어내며 시야가 트였다.

레온은 그 안에 멀뚱히 서 있는 두티스를 확인하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티스? 대체 어떻게?”

“저야 늘 이쪽으로 다니… 아니! 그보다 한참을 찾았습니다. 도대체 어디에 계셨던 거예요? 아! 우선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두티스가 지난번처럼 주변을 경계 어린 표정으로 살폈다. 그러곤 레온과 케인을 두루 챙겨 숨겨진 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케인이 레온에게 딱 달라붙어 두티스를 노려봤다.

그러자 레온이 그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한참 찾았습니다! 아이작 영주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몰라요.”

“영주는 괜찮으셔? 난.”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자님에 대한 소문이라면 이미 영주성에 파다하게 퍼졌으니까요. 그보다 이쪽으로 오실 거라 예상하긴 했는데….”

정말 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병사 하나를 매달고 말이다.

“두티스, 아이작 영주께선 내가 안전하길 바라시지?”

“예, 이제나저제나 공자님의 안위만을 바라는 분이시죠.”

“그럼 날 좀 도와줘야겠어.”

“당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 역시 공자님을 찾아다녔는걸요.”

두티스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운 좋게 길을 안내해 줄 좋은 길잡이를 만난 건가.

케인이 경계 어린 표정으로 주변을 살펴보다가 얼굴에 묻은 검댕을 슥슥 문지르기 시작했다.

“내 유모와 부집사를 찾아야겠어.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두 분은 안전하게 잘 있습니다. 제가 안내해드릴 테니 우선은 영주님께 먼저 가시죠. 오래도록 공자님을 기다리셨어요.”

두티스가 공손하게 자세를 낮추고 등을 돌렸다.

화롯가 근처라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기에, 주룩 흐른 땀을 닦아낸 그가 요리조리 고개를 빼고 주변을 경계했다.

“바깥 상황을 아실런지 모르겠어요. 새로운 군사들이 쫙 깔렸답니다. 들키기 십상이니 어서 저를 따라오세요.”

정말로 공자님을 도울 모양인데?

케인은 믿음직한 늙은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뒤에서 이어지는 발소리가 없자 고개를 돌렸다.

레온은 여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

“어째서 안 오고 거기 계십니까, 공자님?”

두티스가 물었다. 케인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자가 아무 말 없이 날 선 표정으로 두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브라운이 잘 있다고?”

“…예? 예, 그럼요. 아이작 영주께서 안위를 보장하라 하셨는걸요. 두 분은 지금.”

“거짓말.”

“…….”

브라운이 안전하게 잘 있을 리 없다.

덴과 브라운은 페르탈린군에게 꽁꽁 묶여 영주성으로 끌려왔다.

토바 가문인 덴이라면 모를까, 브라운이 안전을 보장받고 있을 리가 없었다.

“너, 영주를 배신했나?”

레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케인이 허겁지겁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늙은 두티스를 단박에 제압하며 그의 목을 졸랐다.

“공자님이 하명하신다! 묻는 대로 대답해, 영감탱이!”

“사, 살려 주십시오! 저도… 저도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서 그랬습니다요!”

“히스 토바가 날 잡아오라고 시켰어?”

케인의 우람한 팔뚝에 끼인 두티스가 고개를 간신히 끄덕였다.

“자, 잡아 오지 않으면… 저도 죽인다고 했습니다. 영주성에 있는 모두를 죽인다고 했어요!”

두티스는 아직 기억했다.

몇 시간 전 지하 서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이다.

“모두가 공자를 잡으러 올 거예요. 히스 공자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모두….”

“너 지금 우리 공자님을 협박하냐? 삶과 죽음의 경계 좀 오락가락하게 만들어줘. 어?”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때 비좁은 비밀 통로 천장에서 흙이 부서져 내렸다. 수많은 이들이 몰려오는 진동이었다.

두티스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이상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우리 센느는 끝났습니다.”

그 말에 레온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벗어날 수 있을까?

마주친 케인의 눈빛에도 자신이 없어 보였다.

“…젠장.”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진다.

벗어날 구멍 같은 건 하나도 안 보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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