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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32화 (32/133)

32화

7장. 북풍이 불어오면(7)

발밑으로 피가 흘러들었다.

미셸은 열린 문틈 사이로 쓰러진 아버지의 시신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제발… 제발….”

꿈이었으면 좋겠다. 모든 게 지독한 악몽이어서 이제 그만 이 꿈에서 깨어나고 싶었다.

미셸은 피에 젖어 들어가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게 어린 미셸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잔인하고 끔찍했다.

‘어떻게… 히스 오라버니가.’

아버지를 죽일 줄은 몰랐다. 그토록 손쉽게 사람을 죽이다니.

‘괴물… 개자식.’

일이 벌어지는 동안, 서고 안에서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손으로 입을 막아가며 간신히 버텼다.

숨을 참고 억지로 눈을 떴다. 하지만 눈물이 터져 나와도 절대 감지 않고 모두 지켜봤다.

두려워서 아버지의 끝을 이대로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적어도 한 사람은 그를 지켜주어야 했다.

“흑… 흐윽.”

마음과 달리 자꾸만 눈물이 났다. 히스와 몰려왔던 일행이 물러가고도 미셸은 한참이나 그곳에서 숨죽여 울었다.

더 이상 볼일이 없는지 주변은 고요했다.

장식장 아래 숨어든 미셸의 치마가 온통 피로 물들 때까지 이곳을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는 어떻게 눈물을 그쳐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일어나는 법도 까먹었다.

미셸은 모든 게 멈춰 버린 공간 안에서 홀로 울기만 했다.

“…미셸.”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깨웠다.

“…미셸, 너 여기 있니?”

조심스레 장식장 문이 열렸다. 옛적 그랬던 것처럼 먼지 묻은 휘장을 거두어가는 손길이 느껴졌다.

미셸은 일렁이는 시선 너머로 덴의 얼굴을 보았다. 늘 자신을 찾아주던 그 바보 같은 얼굴을.

“데니!”

“쉿, 쉬잇.”

미셸이 덴의 목을 끌어안았다. 덴은 늘 이런 식이었다. 언니들의 괴롭힘에 하루 종일 숨어 있을 때도 덴은 늘 미셸을 찾아 성 곳곳을 살폈다.

미셸이 울부짖으며 생각나는 대로 제가 보고 겪은 것들을 모두 토해냈다.

“히스가 아버지를 죽여 버렸어. 병사들을 이끌고… 모두가 지켜보는데… 히스가 아버지를!”

“쉿, 괜찮아. …괜찮아, 미셸.”

덴이 동생의 등을 토닥였다. 먹고 입는 것이 부족한 곳에서 막내로 태어나 항상 형제들에게 치이기만 했던 불쌍한 아이였다.

비록 버르장머리가 좀 없긴 하지만, 그 되바라진 성격도 아버지의 죽음을, 그것도 오라비가 죽이는 걸 지켜볼 만큼 대단하진 않았다.

“어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브라운이 톡톡, 덴의 등을 두드렸다. 아직 핏물이 남아 있는 걸로 보아 누군가가 치우러 올 가능성이 있었다.

센느군이건, 페르탈린군이건 시선을 피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겨우 빠져나왔는데 다시 붙잡힐 순 없잖아요. 서두르세요, 공자님.”

“하지만… 미셸이.”

가여운 미셸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오래도록 숨어 있었는지 걷는 것조차 쉬워 보이지 않았다.

덴이 미셸의 퉁퉁 부어버린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었다.

통곡하려는 미셸의 입을 겨우 막고 브라운을 바라보자, 그가 손을 뻗었다.

“아가씨, 죄송하지만 실례 좀 하겠습니다.”

브라운이 미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덴이 아래위로 그를 살펴봤다. 어째 힘 하나 못 쓸 줄 알았더니 영 그렇진 않았나 보다.

“눈빛에서 뜻이 읽힙니다, 공자님.”

“흠흠, 어, 어쨌든 나를 따라와, 브라운.”

“예, 갑니다.”

두 사람은 페르탈린군의 경계가 약해진 틈을 타 탈출했다.

오는 동안 눈 폭풍에 밧줄이 얼었다 녹았다 하기를 반복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아무튼 탈출하는 데 머리를 쓴 건 브라운이지만, 이곳은 제가 태어나서부터 지냈던 영주성이다.

그러니 성의 작고 좁은 길 하나하나 모르는 곳이 없었다.

덴이 브라운을 좁은 나무 복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미셸을 안고 있는 브라운이 그녀를 더욱 가까이 안아 들었다.

“…어머.”

“불편하셔도 조금만 참으세요, 아가씨.”

미셸은 브라운의 목을 꽉 끌어안고 코를 훌쩍였다. 이게… 불편한 게 맞나?

“근데 데니, 어디로 가는 거야? 어머니의 방으로 가는 게 가장 안전하지 않아?”

“네가 숨어 있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미셸.”

“…무슨 말이야?”

“우리 모두가 히스를 피해 몸을 숨기게 됐단 뜻이지…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고.”

“뭐?! 그 개자식이 어머니도 건드렸어?”

“쉿, 죄송하지만 진정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가씨.”

“어머나? …미, 미안해요.”

브라운이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연한 갈색 눈을 바라보자 미셸은 심장이 쿵쿵거리는 것을 느꼈다.

주변의 모든 게 이 운명적인 상황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코끝을 간질이는 먼지마저도 로맨틱했다.

미셸은 점차 브라운에게 맞닿은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안겨 있기가 부끄러웠다.

“내, 내려주세요.”

“예?”

“어서요! 당장!”

미셸이 다리를 파닥거리며 서둘러 브라운의 가슴팍을 밀쳤다.

하는 수 없이 미셸을 내려두자 그녀가 급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시선을 돌렸다.

지금 뭐 하는데?

덴이 뚱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이런 상황엔 어울리지 않는 의심 섞인 오빠의 눈빛이었다.

“저쪽으로 가면 되던가요?”

“그래, 브라운.”

“상냥하게 대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공자님.”

브라운이 복도의 좁은 벽 틈을 지나 한참이나 걸었다.

등 뒤에선 남매의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딱히 내용을 듣고 싶지 않아 브라운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저기 말씀하신 거죠? 보입니다, 공자님.”

벽과 벽 사이 비어 있는 공간 아래 만들어놓은 작은 방이 보였다.

성의 빈 공간에 몰래 지어 놓은 식솔들의 비밀 거처였다.

브라운이 서둘러 그곳으로 달렸다. 그러곤 조악한 판자문을 툭툭 두드렸다.

“부인, 저희예요. 미셸 아가씨를 찾았습니다.”

고요하던 공간 안에서 환호성 비스무리한 게 터져 나왔다.

곧이어 문이 활짝 열렸다.

수척해진 토바 부인이 눈물을 훔치며 모두를 맞아주었다.

“오, 이런. 정말 감사합니다.”

“어머니!”

“미셸!”

미셸이 재빨리 달려 어머니의 품에 와락 안겼다.

외벽 감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무서운 것을 보고 겪은 직후라 그녀의 품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다.

“고생 많으셨어요. 우리 도련님은 못 찾은 거죠?”

“…예, 살필 수 있는 곳은 모두 살폈지만 어디에도 안 계세요.”

토바 가족들이 상봉하는 동안 브라운도 식구라 할 수 있는 유모 메리의 곁을 지켰다.

미셸을 찾는 동안 레온의 거취도 살폈지만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건지….”

메리의 치맛자락 안에 숨어 있는 새끼 스노우 울프의 꼬리가 세게 바닥을 내려치고 있었다.

잘은 몰라도 이 상황이 딱히 마음에 드는 것 같진 않다.

브라운도 한숨을 내쉬었다. 레온도, 워렌도, 케인도. 모두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이 영주성에서 사라져 버렸다.

“저어….”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된 것 같자, 이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영주성의 시종 하나가 입을 열었다.

“폰네시 병사들은 모두 페르탈린군에 붙잡혔습니다. 지원품도 모두 빼앗겼어요.”

고작 열둘이었지만 폰네시의 정예병은 센느군과는 비교도 안 되는 뛰어난 병사들이었다.

게다가 실전 경험도 풍부했다. 그들만 있다면 페르탈린군과 협상을 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브라운이 한숨을 내뱉었다. 레온도 없고, 워렌도 없는 마당에 병사마저 잃었으니 손에 쥐고 있는 패가 전혀 없었다.

“생각, 생각을 해. 브라운 디카르테.”

디카르테는 답이 없는 상황에서 답을 찾아내는 자들이다.

루시오 공작이 서대륙을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던 저를 불러들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레온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 몬데이어가 갈 길은 디카르테가 만들어야 했다.

브라운이 초조하게 주변을 살피며 머리를 쥐어짜내는 동안 미셸이 그를 바라봤다.

이름이 브라운 디카르테구나. 흐흥.

남들 모르게 미소 짓던 그녀가 짝! 하고 박수를 쳤다.

“참! 폰네시에서 서신이 왔어요!”

“예?”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다.

미셸이 꾸깃꾸깃 제 치마 허리춤에 숨겨두었던 루시오 공작의 마지막 서신을 꺼냈다.

“아르고가 가져온 걸 제가 몰래 빼냈어요. 아버지는 레온 공자에게 전하라고 하셨지만….”

미셸이 브라운을 바라봤다. 연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꼭 그에게 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제게 주세요. 전 읽을 자격이 됩니다.”

브라운이 손을 내밀자, 미셸은 홀린 듯 그 위에 피에 젖은 서신을 전해주었다.

‘그래, 영주님을 믿어보자.’

머릿속에 흐릿하게나마 떠오르는 해결책이 하나 있었다.

브라운이 서둘러 서신을 펼쳐 들었다. 끝이 피로 물들었지만 내용을 알아보기엔 전혀 문제없었다.

“뭐라 쓰여 있어, 브라운?”

“폰네시에서 온 게 확실한 거예요, 부집사님?”

덴과 메리 부인이 조바심 내며 브라운에게 물었다.

브라운의 연한 눈동자가 안에 담긴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

본래라면 레온이 읽었어야 할.

레온에게 전하는 루시오 공작의 마지막 편지를 읽으며 브라운이 숨을 몰아쉬었다.

“왜, 뭔데 그래.”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혹시라도 이 내용이 잘못된 것일까 여러 번 확인했다. 하지만 이미 적힌 내용이 변할 리는 없겠지.

브라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두에게 전했다.

“…페르탈린으로 가라고 적혀 있네요.”

“…뭐?”

안위를 걱정하고 안녕을 바라는 내용 이외에도 루시오는 만일을 대비해 레온에게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페르탈린은 폰네시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혹시라도 어려움이 생기면 반드시 그곳으로 가라고 적혀 있습니다.”

페르탈린의 영주 재스퍼와는 서로의 검에 피를 나눠 영원한 명예를 건 사이이니, 믿어도 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말도 안 돼.”

루시오는 무엇을 우려했을까. 모든 상황을 예측한 걸까?

멀리 떨어진 레온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상황을 대비했던 걸까?

“하지만 페르탈린군은….”

덴이 차마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지금도 빈 벽 밖에선 페르탈린군이 이들을 찾아 쉴 틈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폰네시의 병사를 붙잡았다. 또 레온 몬데이어를 데로니스에게 넘기기 위해 전군을 이끌고 온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직접 그들에게 붙잡혔었잖아. 재스퍼가 진격 명령을 내리는 걸 두 귀로 똑똑히 들었잖아, 브라운!”

모두 사실이었다.

고작 서로의 검에 피를 묻혀 명예를 약속했다 하더라도 그건 아무도 모를 둘만의 맹세였다.

재스퍼는 그 검을 들고 이곳 센느로 달려왔다. 레온을 찾기 위해.

“이제 어쩔 거야?”

브라운은 제 손바닥 위에 놓인 구겨진 서신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글쎄요.”

하지만 레온을 찾아내려는 게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면.

위험에 빠진 레온을 되찾기 위해 전군을 이끌고 이곳에 온 거라면?

“…도박 한번 해 봐야겠어요.”

수많은 경우의 수 중에서 찾아내야 하는 건 가능성이 가장 큰 확률 따위가 아니다.

“어떻게?”

레온 몬데이어를 살리는 것.

찾아야 할 건 오직 그 정답뿐이었다.

“제가 그분을 직접 만나야겠어요.”

비록 그 정답으로 제가 죽는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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