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7장. 북풍이 불어오면(8)
“공자님, 저희는 이제 죽는 건가요?”
케인이 레온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너무 가까운가 싶었지만 앞뒤로 지켜보는 시선이 많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난 안 죽어.”
기대하던 대답은 아니겠지만 해줄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레온의 단호한 대답에 케인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어서 가! 이 자식아!”
“아니! 말로 하라고요!”
물론 등 뒤에서 따라오던 덩치 좋은 식솔이 걷어차는 바람에 그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레온이 한숨을 내쉬고 앞뒤를 가득 채운 식솔들을 바라봤다.
영주성의 비밀 통로도 뚫렸다. 이곳을 드나드는 식솔들이 모두 히스의 명을 따르고 있으니 더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케인, 너 아까 워렌만큼은 아니지만 너도 힘 좀 쓴다고 했지?”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제가 여러 방면으로 뛰어난 편입니다, 공자님.”
“달리기도 빠를 테고.”
“물론이죠. 폰네시에서 이곳까지 한 달도 안 걸렸습니다! 물론 뛰어서요!”
저들은 레온과 케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가장 앞장선 두티스만 몇 번 힐끔거릴 뿐, 모두 저마다의 긴장으로 이쪽까지 신경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레온이 요리조리 주변을 살피다 손을 파닥거렸다. 케인이 키를 낮춰 귀를 가져다 댔다.
“아까 말했듯이 나는 안 죽어.”
자랑하려 이러시는 건 아닐 테고.
케인은 잠자코 레온의 뒷말을 기다렸다.
“이들은 살아 있는 날 데로니스 왕조에게 바칠 생각이거든. 그러니까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날 죽이진 않을 거야.”
“…살려만 두지 큰일을 겪으시면 어쩌려고요.”
“그건 괜찮아. 문제는 우리 둘 다 잡혀버리면, 넌 가차 없이 죽게 된다는 거야.”
그러고 보니 중요한 문제를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케인은 벌써부터 칼에 맞은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목적지에 다 와 간다. 레온이 호들갑 떠는 케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넌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혼자라도 빠져나가.”
“…공자님.”
“메리와 브라운을 찾아서 여길 탈출해. 난… 절대 안 죽을 테니까.”
살아만 있다면 다시 기회는 올 것이다.
설명할 순 없지만 레온에겐 라피스가 있었다. 설령 저들이 죽이기로 마음을 먹는다 하더라도 죽지 않는단 소리였다.
레온의 절절한 부탁에 케인이 쿨쩍, 코를 들이마셨다.
목숨을 걸고 주변 사람들을 지키려는 공자의 마음이 너무 절절하게 느껴져 코끝이 시큰거렸다.
“알겠습니다, 공자님. 꼭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 케인.”
물론 이들을 뚫고 탈출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아 보였지만 말이다.
두 사람이 어느덧 만찬회장에 도착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페르탈린군과 센느군, 그리고 그 안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히스 토바의 웃음소리가 기분을 잡치게 만들었다.
“여, 영주님! 인질들을 붙잡아 왔습니다!”
행렬이 멈추어 서자 두티스가 가장 앞에서 기쁜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식사 중이던 히스 토바가 거칠게 나이프를 내려두는 소리가 이어졌다.
“드디어!”
그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재스퍼에게 체면치레를 차리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레온과 케인이 히스 토바 앞에 무릎 꿇려졌다.
두티스는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잡아온 상황을 히스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용히 보고했다.
“화롯가 근처에서 붙잡았습니다. 그 호위 기사란 놈은 보이지 않았습니다요.”
“웬일로 쓸모가 있어. 좋아, 네 딸은 내가 풀어주도록 하지.”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가봐. 난 우리 손님에게 이 자식을 소개해야 할 테니까.”
툭, 두티스의 앞으로 낡은 열쇠 꾸러미가 떨어졌다.
그걸 집어 든 두티스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뒤편으로 물러났다.
레온은 히죽거리는 개자식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케인도 덩달아 그에게 이를 드러냈다. 물론 히스의 시선은 레온에게만 향해 있었다.
“생각보다 상태가 좋아 보이는군, 레온?”
“솜방망이로 친다고 멍이나 들겠냐, 멍청아?”
허억, 도대체 왜 저러실까.
일부러 싸움을 거는 게 아니고서야 대꾸가 상당히 감정적이었다.
케인이 당황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히스 토바의 뒤편에서 덩치가 산만 한 거대한 사람이 나타났다.
“드디어 얼굴을 보는군, 레온 몬데이어.”
레온이 매서운 눈으로 그를 쏘아봤다.
꽁꽁 묶여 새파랗게 질렸던 브라운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람을 그런 꼬챙이에 끼워서 끌고 오다니.
“대장 놀이들은 좀 즐거우신가?”
주변을 가득 채운 부하들이 서로 눈치만 봤다.
이런 소리는 듣는 당사자보다 아랫사람들이 더 민망한 법이었다.
“뭐, 촌구석에서 즐거울 일도 별로 없을 텐데 이 정도도 만족스럽겠군. 안 그래?”
명백한 도발이었다.
케인은 레온이 그들을 향해 일부러 도발하고 있단 것을 눈치챘다.
거구의 남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그 옆에 서 있던 히스 토바는 달랐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레온의 멱살을 틀어쥐고 비웃음을 흘렸다.
“현실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아직도 네가 폰네시의 후계자인 줄 착각하는 모양이지?”
재스퍼가 페르탈린군을 뒤로 물렸다.
센느군은 눈치를 보다 쭈뼛쭈뼛하며 레온을 향해 창을 겨누었다.
“내 상황과 상관없이 너는 어차피 센느인이야.”
“뭐?”
“다 무너진 폰네시의 후계자 없이는 데로니스와 마주할 급도 안 되는 센느인.”
“이 자식이!”
히스 토바가 레온의 멱살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올 줄 알았다.
역시 기대 이하의 녀석이군.
“현실에 발끈하는 버릇은 절대 못 고칠 모양이네, 너?”
레온이 미소 지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잠시였다.
레온이 순식간에 히스의 급소를 걷어찼다.
발등에 맞닿은 것이 무엇인지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파들거리는 바람에 히스가 레온을 놓쳤다.
“케인!”
지금이다. 레온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온몸으로 그를 밀어붙였다.
갑자기 나뒹군 히스 토바가 등 뒤에서 두 사람을 향해 겨누던 창끝에 찔렸다.
“지금이야!”
히스 토바의 옆구리에서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했다.
재스퍼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고 페르탈린군에게 레온을 붙잡을 것을 명했다.
센느군과 식솔들이 쓰러진 히스를 보며 쩔쩔매는 동안 케인이 냅다 달렸다.
머릿속엔 레온을 위해 두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레온 몬데이어, 이 쓸모없는 자식! 당장 저 자식을 붙잡아!”
히스 토바가 피가 새어 나오는 옆구리를 붙잡고 부하들에게 명했다.
우왕좌왕하며 날뛰던 부하들이 케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저 새끼도 아는 거다. 케인이 이곳을 뛰어가 무슨 행동을 할지.
그 행동이 결국 제게 어떤 위협이 될지도 전부.
“케인! 돌아보지 말고 가! 달려!”
레온이 다시 한번 명하자, 히스 토바의 두 눈이 뒤집어졌다.
레온의 곁을 지키고 있는 페르탈린군에게 으르렁거리며 그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재스퍼가 말릴 틈도 없었다.
“이래도 갈 수 있나 보자고.”
“이보게, 히스!”
눈앞으로 날카로운 쇠붙이가 다가왔다. 재스퍼의 만류에도 히스 토바가 레온에게 단검을 휘둘렀다.
여린 살을 베어버리는 칼날 소리를 케인도 들었다.
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가야 하지만….
“공자님!”
갈 수가 없었다.
쓰러져 버린 레온을 혼자 두고는 절대.
***
한바탕 소란이 지나갔다.
식솔들이 만찬회장 바닥에 넓게 고여 버린 핏물을 지우며 흘끔, 눈치를 봤다.
온 성내에 피 냄새가 진동했다. 지하 서고에서 아이작의 시신을 수습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아 새 영주 히스 토바는 또다시 칼부림을 저질렀다.
“…말세야, 말세.”
속마음을 숨기지 못한 여시종이 화들짝 놀라 제 입을 가렸다.
그러곤 들킬세라 더 열심히 바닥의 핏물을 지우기 시작했다.
“우리가, 우리가 되기 위해선 모든 일을 함께하자 하더니, 이토록 섣부른 행동을 하는 법이 어디 있나!”
다행히 시종들의 혼잣말은 들리지 않았다.
페르탈린의 영주 재스퍼가 몹시도 분노하여 히스 토바를 질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러다 인질이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렇게 행동하는 게요!”
“죽지 않았으니 된 거 아닙니까? 그럼 그 상황에서 내가 그 자식을 봐줬어야 한다고?”
히스 토바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홧김에 저지른 일이지만 레온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어깨부터 가슴께까지 깊게 칼에 베였고, 지혈이 되지 않아 저대로 둔다면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수도 있었다.
“치료라도 해야 한다니까!”
“그럴 수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이보게, 히스!”
“두 번은 말하지 않습니다!”
제 명예를 실추시킨 죄인을 돌봐줄 수는 없는 노릇.
그러기엔 지켜보는 시선이 너무 많았다.
죄를 짓고도 벌을 안 준다면 부하들이 저를 우습게 볼 게 뻔했다.
히스가 제 자존심에 못 이겨 소리를 질러댔다.
이리저리 뒤엉켜 버린 현실이 히스가 감당하기엔 이미 너무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무튼 저 자식을 붙잡은 데 우리 센느가 더 공들인 건 사실이니, 이건 제 뜻대로 할 겁니다. 죽더라도 인질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니까, 이 문제에 대해 더는 언급하지 마시죠.”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듯 히스 토바는 자리를 박차고 사라져 버렸다.
재스퍼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멋대로 구는 어린애 앞에서 장단 맞춰줄 기분이 아니었다.
“영주님,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재스퍼의 부하 기사가 다가왔다. 곧 있으면 바깥을 지키고 있는 페르탈린군과의 교대 시간이었다.
병사들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에도 위험은 늘 존재했다.
“…지하 감옥으로 가 인질의 상태를 계속 확인해라. 죽여서 보내는 건 의미가 없어.”
“예, 알겠습니다.”
“치료가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고.”
“예.”
그가 부하에게 명을 내린 후 긴 로브를 휘날리며 거처로 돌아갔다.
‘멍청한 자식.’
치기 어린 행동을 뒷수습해 주는 취미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레온이 죽게 되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내일 아침 레온의 시체를 마주하지 않기를 바라며, 재스퍼가 임시 거처의 문을 활짝 열었다.
“…….”
그곳엔 누군가가 등을 보이며 재스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인기척에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재스퍼를 확인한 그가 예를 갖추고 인사를 건넸다.
“몬데이어 공작가의 부집사, 브라운 디카르테. 페르탈린의 영주를 뵙습니다.”
처음 페르탈린 땅에서 만났을 때와는 다른 표정이었다.
브라운은 재스퍼가 인사를 받아줄 때까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어째서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지? 탈출한 주제에 죽여 달라고 제 발로 찾아온 건가?”
사라졌다는 보고는 받았었다.
영주성에 입성한 마당에 크게 공들일 대상은 아니라 무시했을 뿐.
재스퍼가 묵직한 걸음을 옮겨 브라운의 앞으로 다가갔다.
웃음기 하나 없는 브라운이 고개를 들었다.
“죽이시건, 살리시건 찾아왔으니 뜻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그 전에.”
남자의 연한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재스퍼를 바라봤다.
“제 계획을 들어주세요. 폰네시의 영광을 되찾을 유일한 계획입니다.”
브라운이 목숨을 걸고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제가 되돌려 받아야 할 유일한 영광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