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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34화 (34/133)

34화

7장. 북풍이 불어오면(9)

재스퍼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갑작스레 나타나 폰네시의 영광을 들먹이는 이 갈색 머리 청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운은 그래도 독촉하지 않았다.

이러는 와중에도 레온을 구할 시간은 부족하고 시시각각 상황이 급변하고 있을 테지만, 독촉이 능사가 아니란 건 분명했다.

“…….”

“…….”

애틋한 사이도 아닌데, 그렇게 서로만 바라보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재스퍼가 말없이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선반 위에 올려놓은 싸구려 포도주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한잔 마실 텐가?”

“괜찮습니다, 재스퍼 경.”

분위기를 풀어내기 위해선 한잔쯤 마셔도 상관없겠지만 차마 그것까지는 할 수 없었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서두른다고 해결될 건 아무것도 없지만, 레온만 생각하면 숨 쉬는 시간마저도 아까웠다.

“나에게도 확신이 필요했어.”

맛없는 포도주를 마셔 넘긴 재스퍼가 도로 브라운의 앞으로 걸어왔다.

긴 이야기를 풀어내야 할 테지만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히스 토바는 오래 전부터 주변 영지에 제 세력을 심어놨어. 그 잔당을 가려내기 위해 약간의 시늉이 필요했지.”

“페르탈린군 내에도 첩자가 있는 건가요?”

“그래, 영주성까지 입성하기 위해선 그들을 속일 필요가 있었지. 전장에선 아주 작은 흠집도 큰 결함으로 이어지는 법이니까.”

몬데이어 가문과의 인연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제가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 배운 것이었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어떻게 버텨낼지, 그 안에서 지켜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지.

“폰네시 병사들의 충심도 확인했네. 모두 레온을 지키겠다며 의지를 다졌어. 참, 병사들의 총인원수가 열 명이 맞던가?”

“열둘입니다.”

“두 명은 사라진 모양이군.”

이런 상황에 병력 이탈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게 침묵의 기사단의 명예와는 거리가 먼 일이라는 게 꺼림칙했다.

그 일로 혹시 레온의 거취가 밝혀지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잠시 브라운의 머리를 스쳐갔다.

재스퍼가 포도주를 모두 마셔 넘기고 대검을 집어 들었다.

“우리는 오늘 밤 이 영주성을 손에 넣고 레온을 구출할 계획이다. 디카르테의 생각은 무엇이지?”

페르탈린은 폰네시를 배반하지 않았다. 폰네시를 배반한 히스 토바를 무너뜨리려 했을 뿐.

재스퍼의 얼굴에서 그 뜻을 분명히 전해 받은 브라운이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센느군의 군사력은 수준 이하입니다. 페르탈린군과 맞붙는다면 얼마 가지 않아 분명 대패할 거예요.”

맞는 말이다. 뛰어난 몇몇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재화를 얻기 위해 병사가 되었을 뿐 정규 훈련 따위는 받아본 적 없는 오합지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센느군이 대부분 영주성 내에서 경계를 하는 중이고, 페르탈린군은 바깥에서 대기 중이라는 데 있습니다.”

“방어전이 지속된다면 우리 군이 불리할 테군.”

“예, 이 혹한을 버텨낼 수 있는 자들은 많지 않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는가?”

센느군이 영주성 내 출입구를 모두 봉쇄하고 있기 때문에 힘으로 밀어붙일 수도 없었다.

충돌이 일어나는 즉시 전쟁이다. 레온의 안전이 확보되기 전까지 전면전은 최대한 피해야 했다.

“지금 이곳에 혼자서 센느군 전부를 없앨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자가 누구지? 그자만 믿고 기다리라는 건가?”

“아니요. 그분은 누구와도 싸우지 않을 겁니다. 레온 공자님을 지키는 게 그분의 역할입니다.”

브라운은 이곳으로 오기 직전 워렌의 위치를 보고받았다.

히스 토바에게 진절머리를 느끼는 식솔들이 아직 남아 있는 덕이었다.

“모두가 이길 수 없는 단 한 명만 있다면 레온 공자님은 안전할 겁니다. 저희가 그곳으로 갈 테니 저희를 믿고 싸우세요.”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작정하고 숨어드는 사람들을 끌어낼 방법은 많지 않지만, 레온을 보호할 이들이 영주성 내에 있는 이상 총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 작전이군.”

재스퍼가 손을 내밀었다.

브라운 역시 그 손을 마주 잡고 미소 지었다.

“무운을 빕니다.”

***

“허어어억!”

그 시각 영주성 지하 감옥.

머리를 거하게 얻어맞고 정신을 잃었던 케인이 가쁜 숨을 내뱉으며 벌떡 일어났다.

“으윽!”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사람을 죽이려고 작정했는지 머리통을 심하게 후려쳤다.

민간인의 생존을 위한 전투력에 나자빠지다니, 침묵의 기사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하긴… 죽이려고 때리지 살려주려고 그랬겠어? 그 상황에.”

케인이 열이 오른 볼록한 머리를 문지르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그 이후 레온이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끔찍했던 칼부림 이후 케인은 곧장 레온에게 달려갔고, 제지하는 센느군에 의해 정신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레온의 상태는 심각했었다. 얼핏 목 근처를 깊게 찔렸던 것 같기도 했는데….

“…헉, 공자님!”

당연히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옆 철창에 레온이 쓰러져 있었다. 그제야 케인이 주변을 확인했다.

어두운 불빛만 일렁이는 눅눅한 철창 감옥이었다.

“공자님, 괜찮으세요?”

레온은 미동 없이 쓰러져 있었다. 죽은 건가?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단번에 제 뺨을 내려친 케인이 주섬주섬 무릎걸음으로 걸어 철창 근처를 살폈다.

지키고 있어야 할 병사들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얼핏 어둠 속에서 페르탈린군의 전투모를 본 것 같기도 했다.

‘…교대 시간인가?’

그들은 시간을 두고 영주성 내에 들어올 수 있는 인원을 제한했다. 나머지 페르탈린군은 차디찬 바깥에서 대기 중이었다.

교대한다고 해도 이곳을 이렇게 방치하진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주변에 내려앉은 건 고요함 그 자체였다. 함정 같지는 않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건 기회야.’

감옥을 지키는 이가 아무도 없다니. 그건 곧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란 소리였다.

케인이 제 팔목을 내려다보니, 엉성하기 짝이 없게 묶인 밧줄에 또다시 꺼림칙함이 밀려왔다.

마치 일부러 탈출하라고 판을 깔아준 느낌이었다.

이거 나중에 엿 먹는 거 아니야?

하지만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옆 철창에 쓰러져 있는 레온의 상태가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다.

“공자님!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가 단번에 밧줄을 끊어냈다. 다른 것 따윈 필요 없었다. 그저 손과 손을 반대로 당겨 힘으로 끊어내기만 하면 됐다.

수월하게 자유를 되찾은 케인이 철창 앞으로 향했다. 밧줄은 손쉽게 끊었지만 이건 좀 난관이다. 철창을 찢을 수도 없고 참.

“…생각해내, 멍청아.”

이제 어쩐다. 케인이 멍하니 철창만 바라볼 때 옆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자세히 들어보니 다 죽어가는 레온의 신음 소리였다.

“고, 공자님!”

살아 계세요? 아니, 살아 있으니까 말씀을 하셨겠죠.

케인이 쓸데없는 소리를 나불거리다가 또 제 입을 내려쳤다.

레온은 그가 헛소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너, 장갑 있지.”

“예? …예, 공자님! 있습니다! 혹시 손 시리세요? 이거 드릴까요?”

“…거기 박힌 철 장식을 써, 멍청아.”

“장식이요?”

거친 숨이 섞인 레온의 목소리는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케인이 급히 입을 다물고 제 손등을 뒤덮고 있는 방한 장갑을 바라봤다.

공작가의 표식이 새겨진 철 장식이 몹시도 뾰족하고 강인하게 빛나고 있었다.

케인이 이번엔 제 머리를 내려쳤다.

“예! 공자님!”

공자는 천재였다. 아니, 자신이 멍청이란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케인이었다.

케인은 철 장식을 이용해 철창의 문을 손쉽게 열었다.

기다란 장식을 넣고 찰칵거리자 놀랍게도 손쉽게 문이 열렸다.

“…….”

케인이 조심스레 바깥 상황을 살폈다. 고요함과 어둠이 깔린 복도 밖에선 그 누구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곧장 옆 철창으로 기어갔다. 무릎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공자님.”

레온이 있는 곳부터 철창 입구까지 피가 고여 있었다. 모두 레온이 흘린 피였다.

케인은 그제야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레온이 죽어가고 있다.

“이게 왜… 왜 안 되지.”

자신이 갇혀 있던 철창문이 손쉽게 열렸던 것과 달리 레온 쪽은 상황이 나빴다.

여러 겹의 자물쇠로 단단히 잠가 문이 굳세게 닫혀 있었다.

케인이 쓰러져 있는 레온을 바라봤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이대로 두면 죽을지도 몰라.

케인이 눈앞을 가로막은 철창을 양손으로 덥석 잡았다.

“히야아아압!”

사람은 위기의 순간 초인적인 힘을 낸다고 했던가. 설마설마했는데 이게 정말 된다.

아마 이 일로 걸어 돌아갈 힘이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공자가 저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냐고!

케인이 철창을 양쪽으로 완전히 휘어지게 벌렸다. 그러곤 그 사이로 서둘러 들어섰다.

쓰러진 레온에게 다가가 내려다보니 빛을 잃은 공자가 보였다.

“공자님! 괜찮….”

아니지. 이런 걸 물어볼 시간에 지혈이 우선이다.

히스 그 개자식이 휘두른 칼에 베인 어깨에서 피가 계속 새어나오고 있었다.

케인이 제 옷을 살폈다. 병사의 전투복은 찢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공자님, 저 진짜 죄송한데 살려야 하니까 실례 좀 하겠습니다.”

그가 레온이 걸치고 있던 헐렁한 로브를 벗겼다.

제대로 드러난 상처는 더욱더 상태가 심각했다.

얇은 상의는 이미 피에 젖어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벌어진 상처 안으로 딱딱하게 굳은 피들이 보였다. 옷감이 살과 상처 사이에 달라붙어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

“어쩔 수 없어요. 이거 지혈부터 해야겠어요, 공자님.”

지이이익.

레온의 로브를 길게 찢어낸 케인이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내렸다.

죽은 것처럼 창백한 공자의 얼굴을 바라보자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가 상처를 뒤덮은 상의를 벗기기 위해 레온의 옷을 조심스레 들추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어차피 같은 남자….”

침묵이 흘렀다.

“…….”

남자여야 하는데, 매일 보는 내 몸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김새를 마주했어야만 했는데.

“…헉!”

거침없이 레온의 상의를 벗겨낸 케인의 손이 공중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멈추었다.

여러 겹 덧대어 입은 납작하고 단단한 짐승의 가죽 위로 보이는 새하얀 피부가 무엇인지 이해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 아니, 도대체, 이게.”

목과 어깨를 따라 내려오는 선이 몹시도 가녀렸다.

어깨부터 쇄골, 오른쪽 가슴 위까지 길게 그어진 자상엔 감히 손댈 수 없었다. 절대. 죽어서도. 안 돼.

“…야.”

그때 레온이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일렁이는 붉은 공간 안에서도 푸르디푸른 그 눈동자가 케인을 응시했다.

“예, …예.”

케인은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레온에게 다가갔다.

부르는 목소리를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너.”

레온이 다치지 않은 손을 뻗었다. 그러곤 입을 뻐끔거리고 놀란 케인의 뒷덜미를 낚아채 그의 고개를 코앞까지 끌어당겼다.

“…말하면 죽는다.”

어쩌면 내가 죽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지만.

“…예, 절대로요.”

레온은 그 말만 남긴 채 눈을 감았다. 얼빠진 케인을 홀로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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