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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36화 (36/133)

36화

7장. 북풍이 불어오면(11)

조금 전부터 등 뒤가 다시 축축해졌다.

뜨거운 것이 맞닿은 공자의 몸에서부터 흘러나와 등을 적시고 있었다.

“공자님… 차라리 제 머리털을 뽑으세요. 민머리가 될지언정 지금 제가 겪는 시련은 무게가 너무 버겁다고요.”

헛소리를 해도 돌아오는 타박이 없었다. 케인은 뜨끈한 코를 거하게 들이마시며 조심조심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철창 감옥을 벗어나 레온을 등에 업고 길을 나선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

자세히는 몰라도 대략 그 정도는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도 영주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밖에 어떻게 나가냐고.”

공자에겐 미안하지만 케인은 메리나 부집사를 구출할 생각이 없었다. 곧장 워렌을 찾아내 이곳을 빠져나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레온의 상태가 좋지 않다. 지혈도 잘 되지 않은 데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온몸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 날씨에 이런 몸 상태를 한 레온을 들쳐 업고 밖으로 나간다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아, 내가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 멍청이!”

케인이 제 뺨을 톡톡 두드리는 동안 레온이 고개를 파묻은 목 언저리에서 고통에 겨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업혀 있는 상태는 레온에게 그닥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일단 벗기긴 했는데.”

케인이 제 손에 들린 단단한 사슴 가죽을 바라봤다.

레온의 온몸을 죄고 있던 가죽을 벗겨내면서 케인은 제 후손이 실추시킨 명예에 대해 혀를 차고 있을 가문의 어른들께 속죄해야만 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여인의 몸을 본다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 레온이 죽으라면 정말 죽어야 할 정도의 크나큰 죄였다.

“일단 절 죽이려면 살아나셔야 할 겁니다, 공자님.”

어째서 몬데이어 공작가의 장남이자 폰네시의 후계자가 여인의 몸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레온을 살리는 일이었다.

케인이 레온을 고쳐 업고 공용 욕탕에서 빠져나왔다.

영주성 분위기가 이상했다. 둘씩 짝지어 돌아다니던 병사들이 여덟 명씩 무리를 지어 험악하게 곳곳을 수색하고 있었다.

‘누구도 믿을 수 없어.’

비밀 통로 따위도 소용없다.

영주성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식솔들이 히스 토바를 두려워하며 적이 되길 자처했으니, 그저 들키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케인은 추운 공기에도 땀이 삐질 흐르는 것을 느꼈다.

지나가다 혼자 있는 병사를 발견하면 무기라도 빼앗을 요량이었다.

“이봐! 명을 전달받지 못한 거야? 어서 성벽 쪽으로 이동하라고!”

“무슨 일이야. 밖에서 나는 폭음은 대체 뭐고?”

“전투가 시작됐어. 페르탈린군이 우리를 배반했어!”

“뭐? 어째서? 히스 공… 아니, 영주님은?”

“성벽에서 적군을 쓸어버리고 계셔. 수색대가 1층부터 다시 살펴본다고 하니, 우리는 철수해서 곧장 성 입구로 가면 돼.”

“젠장… 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꼴이야, 이게.”

병사 여럿의 인기척이 멀어졌다. 허름한 기둥 뒤에 숨어 있던 케인이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1층부터 수색한다고?’

적절한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타이밍만 잘 맞추면 그들의 수색을 벗어날 수도 있으리라.

문제는 다시 새어 나오는 레온의 피였다. 새로 지혈할 것을 찾지 않는다면 핏자국으로 흔적을 들킬 가능성이 있었다.

케인이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 달렸다. 욕탕 안에서 널브러진 오래된 천 조각을 발견했던 기억이 있었다.

“공자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케인이 휘청거리며 복도 벽을 짚었다. 물기의 흔적이 미끌미끌하게 남아 있는 석벽을 한참 따라가다 보니 발밑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차이는 게 느껴졌다.

“…뭐야, 쥐?”

아니, 아니다. 쥐새끼라고 보기엔 몸집이 제법 컸다.

시선을 내리자 털을 부풀린 작은 짐승이 보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짐승이 굳세게 달려들었다.

그것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 만큼 강력한 턱 힘으로 발목을 물어뜯었다.

“악! 뭐야, 안 떨어져?!”

크르르릉.

작은 털 뭉치가 컁컁거리며 발목을 물어댔다. 떨쳐내기 위해 케인이 걸음을 옮기자 또다시 들러붙었다.

아무리 달려도 발목에 꿀이라도 발라놨는지 달라붙는 폼이 목적이 있어 보였다.

“뭐냐고, 대체!”

크르르릉!

크릉!

“야, 너 설마 지금 피 냄새 맡고 그러는 거냐? 하, 돌아 버리겠네!”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짐승에게 얼마나 쫓겼는지 모른다.

누군가에게 들킬 거란 걱정이 달아날 만큼 작은 짐승은 작정하고 덤벼들었다.

멈추면 물어대고, 발로 차면 할퀴는 통에 쉴 수도 없었다.

이제는 정말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기진맥진한 케인이 거대한 문 앞에 몸을 기댄 순간이었다.

크르르르르.

온몸으로 위협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방금 전까지 시늉만 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소름 돋는 그 위협에 케인이 손끝을 달달 떨었다.

끄르.

작은 맹수가 한 걸음 다가왔다.

얼굴만큼 두툼한 발바닥 사이사이에선 검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나 있었다.

“…야.”

뒷걸음칠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제 몸까지 다친다면 레온의 생명은 더욱 위태로워질 것이다.

케인은 하는 수 없이 문을 등지고 달칵, 문손잡이를 돌렸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이 안에 있는 게 어떤 운명이든 지금은 저 작은 맹수를 피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그래, 어쩌면 치료제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조용한 걸로 봐선 사람이 없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다못해 깨끗한 침구류라도 있다면 다시 레온의 상처를 돌볼 수 있을지 몰랐다.

케인이 두 눈을 와락 감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기 전 작은 맹수가 거세게 튀어 올라 케인에게 달려들었다.

크르르릉!

“아악! 나 살려!”

케인이 두 눈을 질끈 감고 털썩 주저앉았다.

작은 짐승이 살을 헤집을 거다. 뼈와 뼈 사이까지 모두 발라먹고 나는 결국….

“응?”

우려와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케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주변을 살폈다.

작은 짐승이 등 뒤에 올라타 레온의 머리칼을 핥고 있었다.

“도련님!”

오른편에서 소리가 났다. 침대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늙은 중년 부인이었다. 본 적이 있다. 공자의 유모인 메리 부인이었다.

“맙소사, 유모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도련님께서 대체….”

“이럴 때가 아니에요, 지혈부터 해야겠어요!”

잿빛 의복을 차려입은 메리의 옆엔 이 영주성의 안주인인 토바 부인도 함께였다.

케인은 제 등 뒤에서 레온을 받아내는 유모 메리를 보며 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대체 이게….”

새끼 맹수는 작은 머리통으로 정신을 잃은 레온의 몸을 툭툭 밀어내고 있었다.

메리가 레온을 바닥에 눕히는 동안 토바 부인이 묵직한 침대를 밀어 입구를 가리기 시작했다.

벙 쪄 있던 케인도 눈치껏 그녀를 도왔다.

“피를 멈추려면 상처를 봉합해야 해요. 부인, 바늘과 실이 있을까요?”

메리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들러붙는 새끼 맹수에게 떽! 훈육까지 해가며 레온을 살리기 위해 정신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게 보였다.

토바 부인이 침대를 케인에게 내맡기고 침실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바느질엔 영 취미가 없는 막내딸의 방이라 걱정이 많았지만 그래도 숨겨놓은 바늘과 실 정도는 있었다.

‘자, 잠깐. 공자께선 비밀이 있는데….’

멍하니 눈앞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지켜보던 케인이 벌떡 일어났다.

이제 막 메리가 대충 가려놓은 레온의 옷을 벗기려던 참이었다.

케인이 전속력으로 달려 레온의 눈을 가렸다. 아니, 눈을 가릴 게 아니지!

“자, 자, 잠시만요. 그게 그러니까.”

케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차마 어쩌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는 게 메리의 눈에도 케인의 진심이 전해질 정도였다.

메리와 토바 부인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다.

메리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때였다.

“난 딸을 네 명이나 낳았어요. 저 달라붙은 옷 속에 보이는 실루엣이 뭔지는 누구보다 잘 알지 않겠어요?”

잠시 놀란 듯 보였던 메리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케인을 바라봤다.

주름 깊은 그 늙은 눈가 주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난 도련님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 무엇 하나 모르는 게 없답니다.”

“…그러셨군요. 하긴… 유모님이라면.”

“알았다면 이제 저쪽으로 가 계시죠, 기사님?”

“아! 예, 알겠습니다! 당연하죠!”

결국 이곳에서 방해가 되는 건 오직 자신뿐이었다.

케인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도로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등을 돌리고 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독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너도 좀 저리 가 있고!”

새끼 맹수도 쫓아낸 메리가 벌어진 레온의 상처를 살폈다.

칼에 몹시 깊게 베이고 상처가 오염돼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메리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제가 할게요.”

“…부탁드려요, 부인.”

그렇잖아도 눈물이 앞을 가려 메리는 도저히 제가 모시는 도련님의 상처를 꿰맬 수 없을 것 같았다.

메리가 억척스럽게 눈물을 닦아내며 침실 구석에 위치한 세면대로 다가갔다.

찬장을 뒤지자 오래된 과실주가 보였다. 깨끗한 물이 없으니 이걸로라도 상처를 치료해야 했다.

“부인! 여기 과실주를 찾았어요.”

“대체 이게 왜 여기서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흠흠! 다행이네요. 이곳에 뿌려주세요. 제가 피가 새어 나오기 전에 서둘러 봉합할게요. 그리고 거기 기사님!”

“예, 옙?!”

“이리 와서 우릴 도와요.”

케인이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동안 토바 부인이 그에게 두꺼운 천을 던졌다.

냉큼 받아든 케인이 레온의 머리맡에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소리가 새어 나가면 우리 모두 발견될 거예요.”

레온은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생살을 봉합하는 동안 깨어날 수도 있을 터.

케인은 제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아채곤 곧바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레온의 입을 막았다.

“시작하겠어요.”

“…준비됐습니다.”

“저도 준비돼, 됐습니다. 됐어요!”

세 사람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느새 다가온 새끼 맹수가 케인의 신발 밑창을 거세게 물어뜯을 때였다.

가장 먼저 메리가 레온의 어깨에 과실주를 들이붓기 시작했다.

피가 옅어진 틈을 타 토바 부인이 꿰어낸 실로 레온의 생살을 꿰매기 시작했다.

“…으, 으윽!”

레온의 푸른 눈이 번쩍 뜨였다. 케인이 거대한 손으로 레온의 입을 막았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레온의 열 기운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 몸짓에 케인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공자님… 용서하세요!’

레온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흘렀다. 온 얼굴이 새빨갰다. 이제는 과실주도 바닥을 보였다. 반절밖에 꿰매지 못한 토바 부인이 속도를 냈다.

발버둥치는 레온의 손을 붙잡고 메리가 기도했다.

제발, 제발 힘을 내세요, 도련님.

세 사람의 간절함 덕분이었을까.

토바 부인이 빠른 속도로 상처를 꿰매고 그 위에 깨끗한 천을 올렸다.

길게 찢은 천으로 상처를 단단히 짓누르고 나니 더 이상 피는 배어 나오지 않았다.

“…….”

“…….”

가장 먼저 케인이 나자빠졌다.

레온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고 나자 메리가 레온을 들여다봤다.

“정신이… 드세요, 도련님?”

레온이 눈을 깜빡거렸다. 토바 부인이 긴장한 상태로 레온의 대답을 기다릴 때였다.

쾅쾅쾅!

“…….”

절망적이게도 문밖에서 거친 노크 소리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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