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7장. 북풍이 불어오면(12)
침실 문고리가 철컥거렸다.
방 안에 모여 있던 세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바라봤다.
“고, 공자님부터 옮겨야겠습니다.”
케인이 용기 있게 의견을 냈다. 메리는 겨우 눈만 뜬 레온을 부축해 뒤편 소파로 살금살금 이동했다.
레온은 이제 온몸의 열과 싸우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등 뒤가 저리고 정신을 잃을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어야만 했다.
“어머니.”
이럴 수가.
토바 부인이 휘청거렸다. 케인이 서둘러 그녀를 부축하고 다 비워진 과실주 병을 집어 들었다.
“어머니, 안에 계신 거 다 압니다.”
철컥철컥.
거칠게 문고리를 돌리고 있는 건 역시나 히스 토바였다. 그의 목소리엔 비웃음이 뒤섞여 있었다.
두꺼운 유리창 밖에선 고통에 몸부림치는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의 웃음과는 비교되는 끔찍한 소리였다.
“겨우 그깟 놈들 때문에 목숨을 잃으실 겁니까?”
뚫린 입으로 잘도 패륜아 같은 말을 내뱉는 히스 토바였다.
케인은 유리병을 쥐고 있는 손끝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냥 확 문을 열고 대가리를 후려쳐 버릴까?
선제공격 후 동시타 정도면 이 유리병 하나로도 어느 정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케인이 기회를 노리며 흘끔거리는 동안 문고리는 다시 거칠게 돌아갔다.
침대로 문 앞을 가로막아 뒀지만 문이 열린다면 그마저도 무용지물이었다.
‘정신 차려, 이 멍청아.’
케인이 헛생각을 뒤로하고 진지하게 레온을 살폈다.
겨우 눈만 뜬 공자는 버티고 있는 게 용할 정도로 힘겨워 보였다.
또다시 고초를 겪게 된다면 이 다음은 반드시 죽음이다.
“제가 뭐라도 해 보겠습니다.”
시간이라도 벌어볼 작정이었다.
히스 토바가 이곳에 왔다는 건 성벽을 지키고 있는 센느군이 후퇴했다는 뜻이었다.
성문이 뚫리는 것도 시간문제일 터. 페르탈린군만 진입에 성공한다면 히스 토바를 붙잡을 수도 있었다.
‘이걸로 일단 머리통을 쥐어박아서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자.’
의도는 좋았다. 잘나가는 기사님 곁을 졸졸 따라다니며 배운 명예로운 행동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었다.
케인이 무릎걸음으로 침대 위에 올랐다. 달칵거리는 문고리를 붙잡고 꿀꺽, 침을 삼켰다.
하나, 둘, 셋!
카운트와 동시에 문을 발칵 열자 근접한 거리에 히스 토바가 서 있었다.
양옆에 늘어선, 족히 여섯은 되어 보이는 센느군과 함께.
“이런 젠장!”
케인은 적이 판단하기 직전 도로 문을 닫아버렸다. 하마터면 창에 머리가 꿰뚫릴 뻔했다.
케인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문고리를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저 바보….”
레온은 헉헉 숨을 몰아쉬는 케인을 보며 두통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이런 멍청한 것들 때문에 아들을 배신할 작정이십니까? 어머니만큼은 자식의 편이 되어 주셔야죠.”
비웃음이 진했다. 긴장으로 얼어붙은 센느군마저 입술을 씰룩거릴 만큼 케인의 행동은 충격적이었다.
다만, 히스 토바는 그런 멍청한 짓에 정신을 뺏길 정도로 여유롭지 않았다.
몰아치는 성벽 전투에서 스스로 물러설 만큼 바깥 사정은 좋지 않았다.
반드시 레온을 되찾아야 했다. 승산은 그것밖에 없었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버틸 수 있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아이작처럼 실수하지 마세요.”
히스의 목소리에 토바 부인이 달려들었다. 케인이 그녀를 겨우 붙잡아 세웠다.
“…네가, 네가 감히 그 이름을 입에 올려!”
아이작의 목숨을 거둬간 게 누구인지 이곳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토바 부인의 울부짖는 목소리에도 히스 토바는 고요했다.
문이 덜컹거렸다. 메리가 뜨거운 불덩어리 같은 레온의 몸을 꽉 껴안았다. 이 끔찍한 순간이 지나가기나 할까?
“이래도 안 열 수 있나 볼까요?”
문밖에서 히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곧이어 복도를 가득 울리는 미셸의 비명이 이어졌다.
“미, 미셸!”
토바 부인이 절규하며 주저앉았다.
정말, 끔찍한 새끼구나 넌.
이런 상황을 뒤에서 지켜보던 레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메리가 불안한 눈동자로 그런 레온을 살폈다.
“케인, 문 열어.”
“도련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문을 열라뇨. 차라리 저를 죽이고 가세요!”
케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메리가 레온의 멀쩡한 팔을 잡고 늘어졌다.
방금 전까지 아득히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레온이었다.
대관절 무슨 이유로 문을 열라고 명하는지 모르겠지만, 메리의 머릿속엔 안 좋은 여러 개의 상황만 넘실거렸다.
“메리, 나를 한번 믿어볼 수는 없는 거야?”
고통이 몰려왔다. 이런 입씨름을 하고 있는 것조차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레온의 핏기없는 얼굴을 한참 마주 보다가 메리가 입을 다물었다.
우악스럽게 붙잡고 있던 손에서도 힘이 풀렸다.
“열어.”
문이 열렸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미셸의 목에 검을 맞댄 히스 토바가 레온을 마주했다.
덴은 이미 센느군 병사들에게 무력화당한 지 오래였다.
센느군 병사들이 곧장 침대를 치우고 레온에게 검을 겨누었다.
“아직 안 죽었나, 레온?”
“살아 있길 바란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겠지.”
“이거야 무서워서, 원.”
여유로운 척했지만 히스 토바는 긴장으로 입 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자존심에 못 이겨 레온을 검으로 베고 나서도 내내 그가 죽을까 싶어 전전긍긍하던 차였다.
“좋아, 원하는 건?”
“내가 인질 노릇을 하길 바란다면 날 제외한 그 누구도 건들지 마. 이건 부탁이 아니라 거래 조건이야.”
히스가 레온을 노려보았다.
얻어터지고 깊은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기세가 살아 있었다.
“썩 꺼져.”
거칠게 밀어내는 히스의 손길에 미셸이 토바 부인의 앞에 쓰러졌다.
친동생을 대하는 태도라곤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주변에 숨죽이고 있던 센느군 병사들의 표정이 일그러질 때였다.
“가만 안 둬, 히스!”
미셸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덴이 곧바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히스보다 한 뼘이나 작은 덴은 그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히스가 병사들에게 턱짓했다. 붙잡힌 덴의 손끝에서 나무토막이 곤두박질쳤다.
“너도 참 너다. 겨우 그런 걸 가지고 나한테 덤비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저 앤 네 동생이야!”
“그래, 너도 내 동생이지. 가치는 없지만.”
가치 없는 것들에게 쓸 시간 따윈 없다.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기회가 없는 건 히스 쪽이 더 그랬다.
반드시 레온을 되찾아야 한다. 레온만 손에 넣는다면 백만 대군이 달려들어도 이길 가능성이 컸다. 아니, 유일했다.
“곧 있으면 저깟 반란도 다 소용이 없어지겠지.”
히스 토바가 레온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여기저기 긁히고 찢어진 얼굴이 참 볼만했다.
레온이 다가오는 히스를 보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미소 짓는 그 얼굴을 보자 히스 토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야, 내 목소리 들리지.’
목적이 확실한 사람의 약점은 눈앞에 놓인 그 목적밖에 못 본다는 데 있다.
레온이 온 힘을 다해 히스 토바의 무릎 뒤를 걷어찼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가 털썩, 무릎을 꿇을 때였다.
“물어!”
순식간에 침대 아래에서 새끼 스노우 울프가 튀어나왔다.
연한 잇몸에서 날카로운 짐승의 이빨이 돋아났다. 발톱을 세운 그 작은 맹수가 곧장 히스 토바의 뒷목을 매섭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온 사방에 피가 튀고 소름 끼치는 짐승의 위협 소리가 내부를 가득 채웠다.
“으으으윽!”
히스 토바가 비틀거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살이 찢어지는 고통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놓쳐선 안 된다. 두 번 다시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갑자기 그가 눈앞에 서 있는 레온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끝에 닿기 전 케인이 히스 토바를 제압했다.
너무도 손쉽게 무릎 꿇린 히스 토바가 울분을 토해냈다.
“죽어, 죽어, 이 새끼야!”
이제 그의 분노는 방향을 잃었다. 무엇을 위해 이토록 화를 내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레온이 제압당한 히스 토바에게 다가갔다.
몸을 낮춰 시선을 맞추고 나니 분노에 일렁거리는 눈빛이 맞닿았다.
“내가 죽는 일은 없어.”
복도 끝에서부터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이어졌다. 알 수 있었다. 워렌이 달려오는 소리 정도는 이미 분간한 지 오래였다.
“여, 영주님!”
그때 눈치를 보던 센느군의 병사가 방심한 레온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히스 토바와 무리 짐승을 토벌하던 자였다.
“안 돼!”
지켜보던 덴이 빨랐다. 덴이 몸을 날려 레온의 앞을 가로막고 맨손으로 병사의 검날을 움켜쥐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더 이상 모두가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당장 검을 버려!”
워렌의 검은 적군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강압적인 주군을 잘못 선택한 죄 따위는 봐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젖어들어 가는 덴의 손에서 쉬지 않고 피가 새어 나왔다. 덴이 검을 밀어냈다. 주저앉은 병사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덴을 바라봤다.
“저딴 놈 때문에 목숨을 버리지 마.”
센느의 속한 모두가 소중했다. 그 누구도 다른 이 때문에 쉽게 목숨을 버려선 안 된다.
덴의 진심에 센느군이 결국 검을 내던졌다.
상황을 지켜보던 히스 토바가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다들 미쳤군… 다들 돌았어.”
워렌이 다가왔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그의 검 끝이 히스 토바에게 향했다.
“하명하십시오, 공자님.”
지켜야 할 존재를 하마터면 잃을 뻔했다. 이깟 놈 때문에.
워렌이 히스에게 조금 더 깊게 검을 들이댔다.
“…….”
레온은 제 말만 듣는 워렌과 덴을 부축하는 브라운을 바라봤다.
뒤편에선 성문을 열고 영주성을 함락한 페르탈린군과 폰네시의 병사들이 재스퍼를 필두로 몰려들고 있었다.
다 모였다. 필요한 사람들이.
레온이 무표정한 얼굴로 히스 토바를 바라봤다.
그는 충격에 빠져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는데….”
늘 지독한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이 혹한을 이겨낼 유일한 기회였다.
데로니스 왕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레온을 넘기는 것. 그것만이 센느가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런다고 폰네시가 돌아오나? 이런다고 너희가 데로니스의 적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야?”
분개하는 히스 토바를 보며 레온이 손을 뻗었다.
“야.”
레온이 곧장 히스 토바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러곤 그의 고개를 가까이 끌어당겨 일렁이는 푸른 눈동자로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네 생각은 틀렸어.”
“…뭐?”
“내가 왜 적수가 돼야 하지?”
그의 목을 움켜쥔 레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압당한 히스 토바의 얼굴이 점차 새빨개져 갔다.
“폰네시는 사라졌지만, 그 사실을 잊지 못한 몬데이어는 살아 있지.”
영토 따위는 필요 없다.
“내가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폰네시를 잊지 못해.”
살아만 있다면, 죽지 않는다면 잊지 않고 되갚을 수 있다.
데로니스의 결말을 알고 있는 자, 바다의 기억과 분노를 잊을 수 없는 몬데이어만 있다면 적수가 아니라 멸망이 되어줄 수도 있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 이 새끼야.”
레온이 손을 털어냈다.
내팽개쳐진 히스 토바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명을 기다리는 워렌이 레온을 바라봤다.
“북풍 한가운데에 세워놔.”
분노를 담은 차가운 목소리가 히스 토바의 자유를 끊어두었다.
그토록 떠나고 싶던 센느에 묶여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죽어서도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레온이 매서운 눈길로 히스 토바를 바라봤다.
자비 따윈 필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