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8장. 변화하는 것(1)
이제 그만 일어나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작게 머물던 소리가 아무것도 없던 공백의 머릿속에 점차 강하게 제 의견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아, 정말 시끄러워 죽겠네.’
달리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감당 안 되는 소리들을 듣고서야 레온이 겨우 두 눈을 떴다.
오랫동안 감겨 있어 묵직한 눈꺼풀을 밀어 올리고 나니 은은한 어둠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
레온이 눈을 깜빡거렸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렴풋한 잔상들만 머릿속에 이리저리 책임감 없이 흩어져 있을 뿐.
레온이 상처를 매만졌다.
뻣뻣한 손으로 가슴 부위를 만지작거리자 울퉁불퉁하게 자국이 남은 상처 위에 깨끗한 천이 휘감겨 있는 게 다 느껴졌다. 그리고.
“…너냐?”
배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엎드린 새끼 스노우 울프가 들은 척도 안 하고 제 털을 고르고 있었다.
레온이 잘 들어가지 않는 힘을 겨우 주어 고개를 바짝 들었다.
새끼 스노우 울프는 돌아누워 몸을 동그랗게 만 채, 제 두툼한 꼬리를 할짝거리고 있었다.
“야, 안 내려가? 이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시끄럽게 깨워댈 때는 언제고.
다만 실랑이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아 레온도 툭, 푹신한 베개에 도로 고개를 묻어버렸다.
‘…여기가 어디더라. 영주성인 건 알겠는데.’
눈동자만 돌려 주변을 살피자 아이작과 토바 부인의 초상화가 보였다.
아마도 영주성에서 가장 안전한, 영주의 침실이던 곳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메리는 어디 갔어?”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새끼 스노우 울프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 자식이 남의 체온을 나눠 쓰는 주제에 버릇이 없네.
결국 참다못한 레온이 새끼 스노우 울프를 밀어냈다. 그러고 보니 좀 큰 것 같기도 하고.
“유모께선 잠시 주방에 가셨습니다. 식사를 챙겨 오시겠다고요.”
“아, 깜짝이야!”
어둠 속에서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레온이 화들짝 놀라 이불을 목 끝까지 움켜쥐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언제부터 있었어?”
문 바로 옆, 침대를 마주 보고 있는 어둠 속에 워렌이 서 있었다.
“내내… 있었습니다.”
“내내? 그게 언제부턴데?”
“쓰러지신 이후부터 쭉.”
“쭈욱?”
심장이 쿵쿵거렸다. 큰 소리에 놀랐는지 새끼 스노우 울프가 훌쩍 뛰어내려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레온이 흠흠, 목을 가다듬고 주변을 살폈다.
어련히 메리가 잘 챙기겠지만 혹시라도 비밀이 티 나는 건 아닌지 확인이 필요했다.
‘옷은 잘 입고 있고.’
레온이 이불을 바로 펴고 평소의 느긋한 모습으로 돌아와 다시 워렌을 마주했다.
워렌은 눈치껏 침대를 등지고 창밖을 바라본 채 서 있었다.
“내내 그러고 있었다면서 이제 와서 뭘 어딜 보는 거야.”
“불편해하실 줄 몰랐습니다. 다음부터는 신경 쓰겠습니다.”
“아니, 뭐. 그냥 놀라서 그랬던 거야. 같은 남자끼리 불편할 게 뭐 있겠어?”
그렇다기엔 레온의 볼이 너무도 붉었다.
공자께선 정말 부끄러움이 많으시군.
워렌이 도로 고개를 돌려 레온을 바라봤다.
“참.”
레온이 쓸데없는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워렌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물어볼 게 아주 많다. 쭉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니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난 왜 여기 누워 있는 거야?”
“쓰러지셨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중요한 건 따로 있어. 내가 히스 그 개자식 앞에서 쓰러졌어?”
워렌이 힐끔, 레온의 움켜쥔 주먹을 바라봤다.
히스 토바를 북풍에 세워두란 명을 내리고 얼마 안 가 쓰러졌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제가 명을 듣자마자 히스 토바를 기절시켰기 때문에 아마 못 봤을 겁니다.”
“…확실해?”
“급소를 제대로 가격했으니 그 전에 봤더라도 기억은 안 날 겁니다.”
“그래, 그거 다행이네.”
“감사합니다.”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뭐, 기절을 시켰다니 문제 될 건 없었다.
“첩자는? 찾아냈어?”
“두 사람이 무리를 이탈했습니다. 주변 일대를 살폈으나 아직 흔적은 찾지 못했습니다.”
“좋은 소식은 아니네. 도망쳤을 수도 있으니까.”
만약 그들이 이곳 센느를 떠나 폰네시로 향했다면 제 거취를 들킬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것만큼 나쁜 소식도 없다.
어째 깨어나자마자 두통이 밀려오는군.
레온이 끄응, 인상을 찌푸릴 때였다.
쾅!
“공자니이이이임!”
“아, 깜짝이야!”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발칵 열렸다.
레온이 화들짝 놀라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발아래서 새끼 스노우 울프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공자님! 언제 깨어나신 거예요? 밖에서 목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다고요!”
“지금 누가 할 소릴 하는 거야.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일어나셔서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공자님!”
“아주 자기 할 말만 하네.”
대꾸도 없는 주제에 표정이 진실했다. 레온은 노크도 없이 벌컥 들어선 브라운을 보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워렌이 브라운에게 다가갔다.
검을 든 손으로 브라운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나타난 목적을 물었다.
“이거 실례라니까요. 저는 경계할 대상이 아니라고요.”
탁!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바로잡은 브라운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돈하고 나섰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랐지만 지금은 본분을 되찾아야 할 때였다.
“공자님.”
브라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워렌은 눈치챈 듯 이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히스 토바가 곧 죽을 겁니다.”
북풍에 세워둔 지 삼 일이 지났다. 그 몸 상태로 혹한에 방치돼 있었으니 더 이상 버티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끝은 보셔야죠.”
“그래, 내가 죽여 버려야지.”
두 사람은 히스 토바의 죽음이 레온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다.
브라운이 되찾아준 현실감에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에게 안내해, 브라운.”
***
세 사람이 접견실에 나타나자 히스 토바를 감시 중이던 페르탈린군이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교대로 단 한시도 빼놓지 않고 히스 토바를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전 정신을 잃었습니다.”
“아직 숨은 붙어 있습니다.”
간결한 보고에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찾아온 센느엔 서서히 눈 폭풍이 시작되고 있었다.
“워렌, 따라와.”
“예, 공자님.”
레온이 워렌만을 대동하고 영주성을 나섰다. 성벽 밖에 위치한 허허벌판 한가운데에 히스 토바는 주저앉아 묶여 있었다.
그의 턱 밑엔 거꾸로 꽂아 놓은 몬데이어 공작가의 보검이 놓여 있었다.
“공자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걷다 말고 레온이 시선을 돌렸다. 워렌은 레온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 저자를 살려 두셨습니까?”
“…살려뒀다라.”
성벽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워렌과 브라운은 히스 토바를 뒤쫓았다.
레온을 되찾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계획, 그리고 모두의 바람은 레온의 명으로 소용없어졌다.
그저 북풍에 세워두라는 레온의 말에 모두가 삼 일 동안 히스 토바를 뜬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넌 내가 히스 토바를 살려 두었다고 생각해?”
“죽이지 않으셨으니까요.”
“글쎄, 그렇다고 저게 살아 있다고 볼 수 있는 건가?”
오도 가도 못한 채 자유 의지를 모두 박탈당한 히스 토바는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
“천천히 죽어가게 둔 거야. 내 목숨 하나 어찌할 수 없는 그 무력감을 느끼게 하려고.”
그간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쥐고 흔들었지만 끝에 와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 같은 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짓밟아 흘려보낸 수많은 목숨이 칼날처럼 돌아와 그의 온몸을 할퀴었을 것이다.
“끝이라 생각한 순간에 맘대로 죽지도 못하는 것. 그것보다 끔찍한 건 없거든.”
그걸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게 바로 레온이었다.
마음대로 죽을 수 없는 운명은 가혹하다.
언제 죽을지 몰라 지나가는 시간마다 제 목숨값을 재고 따지는, 그 길고도 짧은 순간을 뼈저리게 느끼라고 북풍 한가운데에 세워뒀다.
레온이 시선을 돌렸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차가운 북풍 속으로 나아갔다.
“내 복수는 죽이는 게 아니야. 손쉽게 짓밟은 죽음의 가치를 알려주는 거지.”
이깟 놈에게 죽음은 후한 처사다.
레온이 정신을 잃은 히스 토바에게 다가갔다.
그는 차디찬 얼음 위에 무릎을 꿇고 내려앉은 눈 폭풍을 모두 받아내고 있었다.
“…….”
그에게 날을 들이민 검 손잡이에선 몬데이어의 표식인 사파이어가 어둠 속에서도 번쩍거렸다.
“…레온 몬데이어.”
인기척을 느낀 히스 토바가 죽을힘을 다해 핏발 서린 눈동자로 레온을 응시했다.
히스는 죽어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센느를 눈에 담아야만 했다.
제가 짓밟은 이들이 지키려 한 이곳을.
“날… 죽이러… 왔나?”
“아니, 넌 스스로 죽고 있잖아.”
히스 토바는 얼어붙고 있었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혈액이 서서히 차갑게 식고 굳어 심장이 멈춰가고 있었다.
죽어가는 인간을 죽이자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레온의 대답에 히스가 이죽거렸다.
“죽일 용기가… 없는 건 아니고?”
“너 하나쯤 없애는 데 용기까지 필요하진 않아.”
레온이 손을 뻗어 히스 토바의 앞에 꽂힌 검을 뽑아냈다. 그러곤 검을 휘두르자 밧줄에 묶여 있던 히스 토바가 맥없이 쓰러졌다.
“…….”
흰 얼음의 땅 위에 널브러진 히스 토바가 하늘을 바라봤다. 쉬지도 않고 퍼붓는 저 혹한이 싫었다.
죽어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죽어서도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네가 네 힘으로… 이룬 게 뭐지, 레온? …저들이 너를 도운 거라 생각하나?”
“…….”
“…아니, 네가 아니라 루시오를 도운 거지. 넌 아무것도 아니다, 레온 몬데이어….”
점차 숨이 차올랐다. 말을 내뱉을 때마다 폐 깊은 곳으로 날카로운 것들이 몰아쳤다.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언제까지 행운을 누리는지… 내가 반드시… 지켜보겠어.”
레온 몬데이어는 틀렸다. 그리고 폰네시를 선택한 모든 이들도 결국 틀린 결정을 내린 걸 후회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내가 맞아… 너는… 데로니스의 세상에 살게 될 것이다.”
히스 토바가 미소 지었다. 얼굴 위로 새하얀 눈발이 뒤덮였다.
레온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자 잠시간 쏟아지는 눈길이 그쳤다.
“난 누구의 세상도 필요 없어. 그저 내 세상을 살 뿐이지.”
레온이 검을 들었다. 편히 죽게 둘 줄 알았나?
히스 토바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넌 아무것도 지켜볼 수 없어.”
죽음은 곧 끝이다. 아무리 떠들어봤자 죽은 자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레온은 히스 토바에게 그런 끝을 주고자 했다.
“네가 죽고 나서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지 넌 영원히 모를 거야.”
볼품없이 죽어버린 미치광이의 끝을 기억하는 우리만 남을 뿐.
히스 토바는 오늘 이곳에 영원히 묶이게 된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센느에서 단 한 발자국도 떠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워렌.”
레온이 몸을 뒤돌렸다. 곁을 지키고 있던 워렌이 검을 받아들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뜻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최대한 천천히 죽여. 가능한 한 가장 아프게.”
“예, 공자님.”
명 한마디에 워렌이 곧장 히스 토바에게 다가갔다.
레온이 시선을 거두고 북풍 속으로 사라졌다.
“그아아악!”
고통에 겨운 비명 소리만 얼음의 땅 위에 울려 퍼졌다.
아주 오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