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8장. 변화하는 것(2)
그 시각, 폰네시.
“도대체가 가만히 있지를 않는군. 이번엔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동부 인근 영지인 월랜드의 영주 에이션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궁성을 활보했다.
데로니스 왕조는 폰네시 토벌을 위해 새파랗게 젊은 사령관을 보냈다.
가이아 왕조를 무너뜨릴 때 활약한 적도 없는 웬 이름 모를 사령관이었다.
‘그런 젖비린내 나는 자식에게 폰네시를 맡기다니.’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군.
에이션은 자신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번 작전은 절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우리 월랜드가 길목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대협곡에서 혹한을 맞이했을걸?’
수도 덴버그에서 폰네시까지 쳐들어오기 위해선 반드시 그레이트 대협곡을 지나야 했다.
그곳은 북부부터 동부까지 세로로 길게 이어져 있는 무시무시한 천연 요새였다.
만약 대협곡이 끝나는 지점인 월랜드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데로니스군은 세 달여 이상 폰네시군과 전투하며 시간을 낭비했을 것이다.
그것도 무척 불리한 지점에서.
“에이션 영주님, 숨어 있던 궁성의 가신들을 찾아냈습니다.”
“뭐? 사령관은. 아직 못 찾았어?”
“예, 보이지 않아서… 가신들을 어찌할까요?”
불만에 빠져 있던 에이션이 주변을 살폈다.
모든 상황을 최종 결정하는 건 사령관의 몫이었지만, 지금은 자리를 비웠으니 그를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다.
“이것 참, 중요한 문제를 오래 지체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가 맨들맨들한 머리 위에 고급 짐승 털로 만들어낸 두건을 덮어썼다.
인상을 팍팍 찌푸리고 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사령관님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까요?”
“찾아도 안 보이는 걸 무슨 수로! 됐어, 앞장이나 서.”
에이션은 큰일은 함께 이뤄놓고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는 제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데로니스가 아무리 잘나간다 하더라도 이번 정복에 기여한 공은 월랜드가 월등했다.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에이션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중정 앞으로 나아갔다.
“어디에서 찾아냈지?”
거지꼴을 하고 두려움에 휩싸인 늙은 가신 둘이 무릎을 꿇고 위협당하는 중이었다.
“몬데이어들이 묻혀 있는 영면소 근처에서 숨어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처음엔 시체인 줄 알았다니까요.”
“꼴을 보아하니 오해라고 보기도 어렵군. 자, 내 앞으로 데려와라.”
“…예? 하지만… 사령관님을 기다리지 않고요?”
“글쎄 데려오래도!”
에이션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월랜드의 병사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마음에 안 드네.
수많은 데로니스군은 도대체 무얼 하고 이깟 일로 월랜드의 병사들이 움직인단 말인가.
“영주님, 이들입니다.”
늙은 가신 둘이 바닥에 꿇어앉혀졌다.
에이션은 집중하는 척 그들을 살펴봤다.
“레온 몬데이어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나?”
“찢어 죽일 놈들.”
“알아도 너희에게 알려줄 일 따윈 절대 없다!”
에이션이 냉큼 사령관처럼 뒷짐을 지고 그들 주위를 뱅뱅 돌았다.
눈을 좁게 뜨고 표독스럽게 저를 노려보는 시선을 마주했다.
“쯧! 쓸모없는 것들.”
“가치가 없다면 반드시 죽이라는 명이 있었지요.”
에이션이 호통 칠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등 뒤에서 점잖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령관님은 어디 계십니까?”
“흠흠… 크리크 경 아니오? 외부 정찰은 모두 끝낸 건가?”
“성벽 주변은 모두 살폈습니다. 보고할 만한 내용은 없군요.”
크리크, 그가 나타나자마자 붙잡혀 있던 가신 두 사람이 더욱 흥분해 울부짖기 시작했다.
“이 배신자! 당신이 어찌!”
“감히 영주님의 등에 칼을 꽂아!”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는 오래도록 이곳 폰네시에서 침묵의 기사단으로서 활동해 왔으니 말이다.
크리크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영지민들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던 루시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별 볼 일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
하지만 어차피 적의 말은 들어줄 필요가 없다.
“중요도로 따진다면 최하급일 테니 이만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뭐, 나도 그렇게 결정하려던 참이네!”
“다행이군요, 에이션 경.”
크리크가 저를 따라온 데로니스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울부짖는 소리가 맑은 폰네시 하늘에 울려 퍼지는 동안 그들은 어딘가로 끌려갔다.
“…사령관은 어디에 있나? 자네라면 알고 있겠지?”
“당연히 영주의 거처에 계십니다. 집무실에 없다면 그곳부터 살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에이션 경.”
“내 다음부터는 그리하지.”
“그럼 전 사령관님께 보고드릴 일이 있어 이만 가 보겠습니다.”
크리크가 인사도 없이 뒤돌았다.
등 뒤에서 에이션이 씩씩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 화풀이는 그의 충직한 신하들이 다 들어줄 것이다.
“사령관님을 만나러 왔다.”
“예, 크리크 경.”
영주의 거처.
노기사, 아니, 데로니스 왕조의 대기사 크리크가 펄럭이는 새빨간 로브를 정돈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분위기는 이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은백색과 푸른색으로 뒤덮였던 공간에 짙은 암흑이 뒤섞여 활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령관님.”
사령관이라 불린 새카만 머리칼의 젊은 남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역대 영주들의 얼굴을 그려놓은 초상화 벽 앞에 서 있었다.
“다섯 번째 외부 정찰이 모두 끝났습니다. 직전과 달리 새로 보고드릴 점은 없습니다.”
“그래, 본성으로 서신을 보내고 무의미한 정찰은 이만 끝내도록 하지.”
“예.”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새카만 머리칼을 아름답게 늘어뜨린 일리아의 초상화를 바라봤다.
이곳 폰네시에 온 후로 사령관은 오래도록 그 초상화를 살폈다.
마치 그곳에 찾는 무언가라도 있는 것처럼.
“레온 몬데이어가 어디 있는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나?”
“그렇습니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 텐데.”
“인근 동부 지역부터 확인하는 중입니다. 혹한이 물러가는 대로 북부도 함께 살피겠습니다.”
사령관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일리아의 초상화만 바라볼 뿐.
***
긴장 속에 얼어붙었던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 센느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하루아침에 작은 공자께선 새 영주가 되시고, 폰네시의 후계자는 적군의 목표물이 되었구먼.”
“그러게 말이야. 사람 일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니까.”
외벽 감옥에서 레온을 지키던 병사 둘이 삐질, 흘러내린 땀을 닦아냈다.
무너진 성벽 보수 공사를 자처하며 두 사람이 초토화된 센느를 둘러봤다.
“아무튼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건 다 레온 공자님과 그 기사님 덕분이니 말이야.”
“그래, 두 분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저들 틈에 끼어 있었겠지.”
성벽 인근에 겨우 녹인 질퍽한 흙 위로 이번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시체가 나열돼 있었다.
대부분 센느군의 병사였다. 그 속엔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어린 병사도 있었다.
먹고살기 위해 영주성을 지키는 일을 자처했지만 그 끝은 죽음이었다. 센느의 영지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죽음을 슬퍼했다.
“곧 있으면 새 영주께서 연회를 베푸신다고 하니 위로가 될 테지.”
“…그런다고 죽은 자들이 돌아오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어쩌겠나. 모든 게 이미 벌어진 일인 것을.”
두 병사가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삽을 들었다.
무너진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선 부지런히 애써야 했다. 비록 흔적이 남더라도 말이다.
“엄마, 저것 보세요!”
그때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내리기 시작했다.
센느의 영지민들이 눈처럼 내리는 그 하얀 꽃잎을 바라보며 질퍽한 흙을 병사들의 위에 뒤덮기 시작했다.
아르고가 하늘을 가르고 날아올랐다. 제가 머무는 탑까지 오르고 나자 팔을 내뻗은 사람이 보였다.
발톱을 숨기고 팔에 올라앉자 부리를 비벼주는 레온의 손길이 있었다.
“고마워, 아르고.”
이미 죽어버린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위로를 건넬 뿐.
레온이 아르고를 제자리에 내려두고 덴의 방으로 돌아왔다.
메리가 활짝 문을 열고 레온을 맞이했다.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잠깐 바람 좀 쐬러.”
“찬 바람은 아직 안 된다니까요.”
메리가 입을 꾹 다물고 레온을 흘겨봤다.
침대 아래에 숨어 있던 새끼 스노우 울프가 까만 코끝만 내밀어 킁킁거렸다.
레온이 괜히 새끼 스노우 울프에게 손을 뻗었다.
크르르릉.
“근데 왜 보자고 했어? 브라운이 할 말이 많다던데.”
레온이 쓰러져 있는 동안 서대륙 내의 균형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브라운은 허락만 해준다면 삼 일 동안 있었던 일을 그만한 시간에 거쳐 다 쏟아부을 태세였다.
물론 그럴 때마다 토바 부인에게 번번이 가로막혔다.
레온을 치료하기 위해선 반드시 상의를 탈의해야 했기 때문에 브라운은 물론이고, 누구도 레온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부집사님과는 만찬에서 대화 나누시고요. 지금은 저랑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요.”
“응? 뭐야. 어디 가는데?”
“따라오세요!”
메리가 새끼 스노우 울프를 잘 밀어 넣고 탓, 문을 닫았다. 놓칠세라 레온의 손을 꽉 붙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긴 왜? 나 씻었어, 메리.”
“알아요. 저한테 말도 없이 다녀오셔서 제가 또 모시고 온 거예요.”
레온이 습기가 가득한 공용 욕탕으로 끌려왔다.
귀한 온수가 눈앞을 온통 희뿌옇게 만들었다.
“자, 이리 오세요.”
레온은 메리가 이끄는 대로 노란빛 철 거울 앞에 앉았다.
물끄러미 앞을 보자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머리가 많이 길었어요. 제가 잘라 드리려고요.”
거울에 비친 머리칼은 메리의 말대로였다.
늘 어깨 끝을 유지하던 은백색 그 고운 머리칼이 가슴께까지 자라 찰랑이고 있었다.
“벌써 두 달이나 지났네.”
폰네시를 떠난 지 두 달이 지났다. 그간 제대로 정돈하지 못한 머리는 레온의 마음처럼 이리저리 제멋대로 자라 삐죽이고 있었다.
메리가 헝클어진 은백색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잘라 드릴게요.”
빗으면 빗는 대로 고르게 펴진 머리를 어깨 끝에 닿을 만큼 짧게 잘라냈다.
이걸로 지난 두 달간의 엉망이었던 기억들이 사라지진 않을 테지만, 메리는 그 모든 것을 끊어내고 싶은 것처럼 공들여 레온의 머리칼을 잘랐다.
“흉도 많이 사라졌네요. 토바 부인의 솜씨가 좋기는 좋은가 봐요.”
흘긋, 레온의 어깨부터 이어진 자상 흉터를 바라본 메리가 덤덤한 척 말을 이었다.
어깨와 쇄골을 지나 가슴 부근까지 길게 이어진 상처 자국은 없애려 해도 사라지지 않고 끝끝내 몸에 흔적을 남겼다.
“참, 부인이 내 비밀을 알고 있다고 했지?”
“예, 이미 알고 계셨어요.”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어느새 머리 정돈이 끝났다.
가녀린 어깨에서 탈탈 머리칼을 털어준 메리가 곰곰이 레온을 살폈다.
아름다운 얼굴에 걱정이 묻어났다. 메리가 레온을 위로하기 위해 어깨를 토닥였다.
“도련님이 좀 왜소하긴 하지만 또래 덴 공자님만 보더라도 비슷하잖아요? 그런 걸로 눈치챌 순 없을 거예요.”
“그렇지?”
“물론 폰네시에서 잘 먹고 잘 자란 도련님이 이토록 마르고 작은 건 설명하기 어렵지만요.”
“뭐, 그건… 앞으로는 핑계를 댈 수 있겠네. 더는 아버지도, 영지도 없으니까.”
레온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점차 느려졌다.
레온은 철 거울에 비친 메리의 얼굴을 보며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루시오에게 있어 폰네시는 레온에게도 물론 중요했지만, 그곳에서 나고 자란 메리에게는 그 의미가 더욱 큰 존재들이었다.
레온이 천천히 메리를 돌아봤다.
어느새 늙은 주름이 깊게 자리 잡은 유모의 얼굴은 표정을 알아보는 게 더욱 어려워져 있었다.
“메리, 이미 잃은 폰네시를 되찾아 주겠다는 약속 같은 건 못 해.”
레온의 계획에 폰네시를 되찾는 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 말고도 할 일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약속할게. 그 누구도 폰네시를 잊지 못하게 하겠다고.”
메리가 나고 자란 그곳을 영영 잊히게 두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레온의 단호한 표정을 보던 메리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곤 딱딱하게 굳은 레온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이 푸른 눈동자 안에 밤하늘을 담은 궁성 호수가 있고, 이 은백색 머리칼에 폰네시의 환한 빛이 담겨 있는 것을요.”
중요한 것을 잃었지만 그보다 소중한 것을 잃지 않았으니 아무렇지 않았다.
메리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레온을 품에 안았다.
“전 도련님만 있으면 돼요.”
“…….”
“그러니, 더는 다치지 마세요.”
등을 토닥이는 그 손길에 레온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생명은 둘도 없는 거랍니다.”
메리에게 숨기고 있는 비밀이 너무도 무거워서.
“제발 스스로를 소중히 대하세요.”
레온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약속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