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8장. 변화하는 것(3)
새벽 내내 창문을 후려쳐대던 눈 폭풍이 물러간 후 센느에도 드디어 아침이 밝았다.
케인은 삐거덕거리는 낡은 침대 위에 모로 누워 동이 트는 걸 뜬눈으로 맞이했다.
“…죽겠네, 정말.”
엄살이 아니었다. 케인의 눈 밑이 죽은 이의 것처럼 거뭇했다. 벌써 며칠째 불면에 시달려야 했다.
눈만 감으면 닥쳐오는 그날의 기억이 도저히 케인을 잠들 수 없게 만들었다.
“공자님이 여자라니….”
으아아아아!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케인이 침대 위에서 몸을 뒤틀었다.
흐린 센느에서도 생기를 잃지 않은 붉은 머리칼이 베개 위에 아무렇게나 흩날렸다.
“진짜 미쳐 버리겠네.”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그날 마주했던 충격은 사라질 기미가 없어 보였다.
케인은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차마 입에 올릴 수도 없는 그 불손한 광경을 내쫓기 위해 제 머리를 몇 번이나 내려쳐 댔다.
“이 파렴치한. 가문에서 내쳐도 할 말 없는 놈 같으니라고.”
미래를 약속하지 않은 여인의 몸을 봤다는 건 죽음을 각오해야 할 일이었다.
물론, 이 경우엔 책임을 묻기 애매했다. 공자가 작정하고 남자인 척했으니 의도적으로 그녀를 욕보인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그녀라니.’
공자가 여자라니!
다시 한번 케인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괴상한 비명도 막을 틈 없이 온 방 안에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그러고 보면 이상하긴 했어.”
한참 침대에서 허우적거리다 보니 정신이 또렷해졌다.
케인은 여전히 붉은 머리칼을 부여잡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공자께선 단 하루도 우리와 함께 잠들지 않으셨지?’
그야 신분도 다르고 지체 높은 폰네시의 후계자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좁은 틈에서 야영을 하는 동안, 또 혹한을 맞이한 야외에서 꿋꿋이 홀로 버티는 건 충분히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이상하리만큼 유모를 곁에 두셨지.’
레온의 나이는 무려 열아홉이다. 성년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도 않은 꽉 찬 열아홉.
그런 공자가 여태껏 유모를 곁에 두는 건 가히 의심스러웠다. 세안과 목욕 시중까지 받는 걸 의아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비밀을 알고 있었다면 당연히 곁에 두실 수밖에.’
하지만 레온이 여자였고, 유모가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존재라면 이제야 모든 게 설명되었다.
“진짜 세상에서 가장 병약하고 나태한 공자라고만 생각했는데.”
힘 하나 쓸 줄 모르고, 검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레온을 무능하다고만 생각했다.
성인이 다 되도록 말 한번 제대로 타본 적 없다는 레온에게 도대체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알려줘야 하나 막막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나이대 남자라면 당연히 해내야 할 것들을 전혀 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레온이 한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레온이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할 수 없었다는 걸.
여인의 몸으로 남자인 척하느라 감수하고 있는 게 너무도 많았다는 것을 말이다.
“…….”
케인이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지난밤을 떠올렸다.
지하 감옥에 갇혀 다 죽어가던 레온을 살리기 위해 다가갔던 그 순간이 자꾸만 머릿속을 메웠다.
‘얼굴이 정말 하얬어.’
가만두면 진짜 죽을 것 같았다.
그때의 레온은 몸에 있는 피를 모두 쏟아내고 점차 생명을 잃어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밀폐된 공간엔 고요만 가득하고, 주황빛 일렁이는 횃불도 있는지 없는지 주변에 보이는 거라곤 쓰러진 레온과 바닥을 가득 채운 피뿐이었다.
살려야 했다. 그때는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가장 먼저 지혈을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상처를 살피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고 이 손으로….’
케인이 커다란 제 손을 내려다봤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 손으로 공자의 비밀을 들춰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레온의 상처를 모두 동여매는 동안 케인은 그 추운 지하에서도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나 진짜 어쩌지?”
의식하고 보니 레온은 누가 봐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었다.
앞에서 봐도, 뒤에서 봐도.
심지어 밥 먹는 데 집중하다가 입에 묻은 양념을 닦으며 흘긋 봐도 너무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머리칼만 짧다고 남자라 덜컥 믿다니, 정말이지 멍청이가 따로 없는 일이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분을 남자로 대하라고? 내가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공자의 말이니 따르지 않을 순 없다.
잘해낼 자신은 없지만 레온의 명을 어길 마음 따위는 이제 전혀 들지 않았다.
“…나 망한 것 같지?”
케인은 눈을 감아도 자꾸만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을 휘휘 지워버리려 노력하며 다시 한번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미치겠네.”
공자님이 자꾸 생각난다고!
삐거덕거리는 침대 위, 자유분방하게 발버둥치는 두 다리는 여전히 갈 곳을 잃은 채였다.
***
할 수만 있다면 놈의 기억을 메모리아 라피스로 만들어 끄집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공자님!”
바닥에 납작 엎드려 냅다 사과부터 내지르는 케인의 뒤통수를 레온은 한참이나 노려봤다.
“저를 죽여주… 아니, 그래도 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저 진짜 죽기 싫거든요!”
케인이 바짝,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머리를 찧어댔는지 놈의 이마 한가운데에 벌겋게 물든 상처가 레온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공자님.”
케인은 다시 바닥에 이마를 맞대고도 저는 아무것도 못 봤다는 둥, 긴급한 상황에 다른 생각 따윈 하지도 못했다는 둥.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느라 사서 명줄을 줄이는 중이었다.
“…어휴.”
메리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팔짱을 낀 채 그런 케인을 내려다보던 레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필이면 이런 놈한테 비밀을 들켜가지고.’
상처를 회복하고 정신을 차린 것까지는 좋았다. 큰 아픔을 겪은 센느인들에게 위로를 전한 것까지도 너무 좋았단 말이다.
하지만 레온은 계속해서 무언가 해결하지 못한 일을 잊은 것처럼 찝찝함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도대체 내가 뭘 잊었지? 대체 뭘 놓치고 있는 거야?
며칠이나 속 썩이던 문제는 생각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다.
‘여자인 걸 들켰을 줄이야.’
가뜩이나 복잡한 머릿속이 더욱 엉망이 되어갔다.
영원히 모두를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자만한 건 아니지만 이토록 일찍, 그것도 저 출처(?)도 모르는 기사 놈에게 사실을 들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날 있었던 일은 평생 저 혼자만의 기억으로 남기겠습니다.”
“평생 기억할 필요까진 없거든?”
“하지만 그 기억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
“케인 기사님, 그런 말은 안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 앗!”
레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재빨리 제 입을 가리는 케인을 보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얘는 진짜… 언젠가 실수를 하고도 남을 것 같은 불길함이 강하게 밀려들었다.
‘그래도, 뭐.’
일단 위험한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테니 어쩔 수 없나.
“야.”
한참 케인을 노려보던 레온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뭐지? 왜 다가오시는 거지?’
머리맡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케인이 흡, 숨을 들이마셨다.
레온이 다가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눈앞이 팽팽 돌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질 않았다.
나 이제 죽는 건가? 레온이 죽이거나, 스스로 죽게 되거나.
어찌 됐든 이제 자신에게 공자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됐다.
“혹시 해서 묻는 건데. 너, 다른 사람에게 말했어?”
케인의 머릿속에서 온갖 난리가 펼쳐지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레온이 물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 중요한 건 그런 문제였다.
“예?”
“내 비밀, 다른 사람에게 말했냐고.”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목소리가 제법 다정했다. 우리 공자님이 그럴 리가 없는데.
케인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너무 가까이에서 본 얼굴에 찬양을 늘어놓고 싶었지만 매서운 눈길에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아뇨. …아무에게도요.”
“그럼 앞으로 말할 생각은?”
“…절대 없는데요? 공자님께서 원치 않으시니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영원히, 제가 죽는다 하더라도요!”
눈동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 미묘함을 집어낼 수 없지만, 수천 년을 살아온 인어라면 그 정도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
레온의 목소리가 더욱 다정해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메리가 의아함에 대치 중인 두 사람을 살폈다.
레온은 이미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인 듯했다.
말도 안 돼. 저 성질머리 나쁜 도련님이 이 상황을 그냥 넘길 리가 없다.
혹시 단검이라도 숨겨두신 거 아니야?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메리가 중재하기 위해 한 발자국 다가갈 때였다.
“좋아. 그럼 됐어.”
“…정말요, 공자님?”
“응, 구해준 건 고맙다. 내가 꼭 똑같이 되갚을 날이 오면 좋겠어.”
어쨌든 목숨을 구해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케인이었다.
레온이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 꼭 꿈에서 마주한 것처럼 이상했다.
“나도 언젠간 다친 너를 구할 날이 오겠지.”
“그… 그러려면 필시 제가 먼저 다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 뭐가 됐든 죽지만 않으면 구할 수 있겠지.”
“예에?”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하고 계신 거야?
케인이 얼빠진 표정으로 웃어주는 레온을 멍하니 바라봤다.
“알겠으니까 이만 일어나.”
똑똑똑!
그때 타이밍 좋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이어졌다.
레온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케인에게서 뒤돌았다.
“들어와.”
벌컥, 문을 열고 브라운이 환하게 웃으며 들어섰다.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얼빠진 케인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공자님, 만찬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아유, 잘됐네요, 정말. 한참 기다렸는데 드디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겠어요!”
메리가 과장된 목소리로 호호 웃으며 레온의 등을 떠밀었다.
어쨌든 비밀을 알고 있는 남자와 한 방에 계속 두는 건 유모로서 마음이 불편한 일이었다.
분위기가 애매한데.
눈치 빠른 브라운은 내부 공기가 어색한 걸 알아챘지만 별다른 말을 내뱉진 않았다.
“모두 모여 있어?”
“예, 공자님. 공자님만 모시고 가면 됩니다.”
레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일을 단속하고 나니 비로소 이번 상황을 완전히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왔다.
센느의 새 주인이 된 덴 토바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폰네시를 위해 큰 도움이 되어준 페르탈린의 영주 재스퍼가 기다리고 있다.
“케인, 너도 따라와.”
레온이 방을 나서며 여태껏 꿇어앉아 있는 케인에게 명했다.
“저, 저도요…?”
“그래, 넌 날 구했잖아.”
비록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을 들켜버리긴 했지만, 뭐 그렇다고 밥도 못 먹게 만들고 싶을 정돈 아니었다. 밥은 중요하니까.
“가자.”
레온이 일행을 거느리고 어두컴컴한 탑층 방을 벗어났다.
방법을 찾기 위한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