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8장. 변화하는 것(3)
모든 것들이 너무도 빠르게 변화한다.
브라운은 그 변화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세상 전부를 이해하려 애써왔다.
힘들지 않았다. 뛰어난 학자와 집사들을 배출해 낸 가문의 일원답게 디카르테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두려움이 없었다.
다만, 이해되지 않는 것들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예를 들면.
“공자님, 조심하세요! 계단이 많이 가파릅니다!”
“…….”
“제 손을 잡으십시오!”
세 걸음에 한 번씩 뒤돌아보는 기사 케인의 행동이라든가, 사연 많아 보이는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유모 메리의 관계성 같은 것 말이다.
도무지 이해할 틈이 없네. 내가 살피지 못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브라운이 가장 뒤편에서 앞서 걷는 일행을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였다.
“메리.”
“예, 도련님.”
“내 검 어디 있어?”
“거, 검이요?”
“단검 말이야. 자꾸 시끄럽게 구는 게 눈앞에 알짱거리는데, 확 거꾸로 매달아 어떻게 해버릴까 싶어서.”
“허어억!”
케인이 재빨리 제 머리통을 가렸다. 드디어 나왔다. 소문으로만 듣던 그 악취미 말이다.
케인이 불안한 눈동자로 입을 꾹 다물고 레온이 지나갈 때까지 숨을 참았다.
“한 번만 더 거슬리게 하면, 그땐 진짜 악취미가 뭔지 알려줄 거야.”
아직은 안 된다. 아직 이 붉은 머리로 해야 할 게 남아 있었다.
뭘 하든 머리칼을 잃은 상태로는 평소보다 자신감 있게 행동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케인은 레온이 앞서 지나갈 때까지 한참이나 벽에 붙어 있다 겨우 숨을 내쉬었다.
브라운이 그런 그를 눈을 좁게 뜨고 바라봤다. 케인이 제 발 저려 브라운에게 털어놨다.
“…이게 다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 그런 겁니다.”
“말할 수 없다면 티도 내지 마셔야죠.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이 정도겠네요, 케인 님.”
툭툭, 브라운이 케인의 어깨를 두드리고 레온을 뒤따랐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케인이 온기가 남은 어깨 위를 더듬거리다 사라진 일행들을 찾아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가, 같이 가요!”
끼이이익.
영주성의 가장 안쪽, 접견실과 정반대에 위치한 만찬회장 문이 활짝 열렸다.
레온이 모습을 드러내자 미리 모여 있던 반가운 얼굴들이 그를 맞이했다.
“어서 와, 레온.”
센느의 새 영주가 된 덴이 어색한 표정으로 맞은편 자리를 권유했다.
“브라운, 메리, 그리고 케인. 모두 어서 자리하세요.”
그가 이 성의 주인답게 일행에게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길고 넓은 테이블 한가운데로 레온이 위치하자 차례대로 모두가 자리를 잡았다.
“잘 어울린다, 덴. 아니, 이제 센느의 영주님이니 예를 갖추는 게 좋을까?”
“그러지 마, 레온!”
덴의 얼굴이 쑥스러움에 붉게 타올랐다. 아직 새로 마주한 영주의 자리가 익숙지 않은 탓이었다.
“무슨 소리야! 오라버니 너는 이미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영주야. 그러니 자부심을 가지라고!”
“미셸, 그렇게 말하기 전에 그 버르장머리 없는 말투부터 고치렴.”
“어머, 전 영주의 동생이에요.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요?”
“됐어, 됐어! 괜찮아요, 어머니. 그냥 내버려 두세요.”
덴이 재빨리 손사래를 내저었다. 하여간 말괄량이 미셸 덕분에 쑥스러울 타이밍도 놓치고 말았다.
덴은 미소 짓고 있는 레온에게 부끄러운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아직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했다.
“비로소 네 자리를 찾은 것 같아. 진심이야, 덴.”
“…고마워, 레온. 많은 걸 잃고 얻어낸 자리인 만큼 더는 아무것도 잃지 않도록 노력할 거야.”
“그것 역시 너답다.”
처음 폰네시를 찾았던 어리숙한 삼남은 더 이상 없다.
레온은 사랑하는 센느를 지키기 위해 그간 덴이 해온 것들을 모두 기억했다.
그는 축하받을 자격이 있었다.
“몸은 괜찮아졌소, 레온 공자?”
“재스퍼 경.”
두 사람이 충분히 인사를 나눌 때까지 기다려준 재스퍼가 잔을 건넸다.
레온은 잠시간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편히 불러주세요. 경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런 순간을 맞이하지 못했을 거예요.”
지난 성벽 전투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활약을 했는지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게다가 재스퍼는 루시오의 오래된 친우였다.
선대 몬데이어 공작의 가르침 아래 형제처럼 자랐다는 것을 이제는 여기 모인 모두가 알았다.
“루시오를 볼 낯은 겨우 챙긴 게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다행이구나, 레온.”
재스퍼가 친우를 쏙 빼닮은 레온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봤다.
눈을 보니 그리운 것들이 떠올랐다.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이르게 잊어버린 것들이 레온에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네 아버지 일은 정말 안됐다.”
“기억해야죠.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전부를요.”
이제는 레온도 전부 알았다.
루시오의 마지막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그리고 데로니스의 세상에서 폰네시인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도 말이다.
현재 폰네시엔 데로니스 왕조의 이름 모를 사령관과 동부 인근 소영지 월랜드의 병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궁성 내 살아남은 가신들을 심하게 고문하고 모조리 죽여버렸다. 살 수 있는 기회 따윈 절대 쥐어주지 않았다.
레온을 자극하기 위함인지 마지막 전투 이후 살아 있는 영지민들 역시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목숨을 얻기 위해 폰네시를 떠나야만 했다. 폰네시에 남길 선택한 이들은 모조리 몰살당했다.
“그나저나 동부 그 자식들, 내 언제고 그런 식으로 뒤통수칠 줄 분명 알았지.”
재스퍼가 쾅! 테이블을 내려쳤다. 이야기를 듣는 덴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동부 사람들은 늘 그렇죠.”
“그래, 근본도 모르는 마다비아 인간들이 섞여 있으니 늘 폰네시를 배신할 틈만 노리고 있겠지.”
엔드해와 맞닿아 있는 동부 구석엔 자유 도시 마다비아가 있다.
그곳엔 바다를 타고 이곳저곳에서 모여든, 출신과 가문을 알 수 없는 이들이 자유롭게 살아갔다.
월랜드의 영주도 아주 오래전 그곳에서 정착했다고 하니 북부인들로선 언제고 그들이 폰네시를 배신할 줄 짐작하고 있던 것이다.
“우린 기만하지 않아. 화합하지 않을지언정 등 뒤에서 칼을 내리꽂는 형편없는 짓은 하지 않지.”
배반을 그 무엇보다 불명예스럽게 여기는 재스퍼로선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레온은 거칠게 포도주를 마셔 넘기는 그의 분노에 위안을 얻었다.
“다른 곳 상황은 어때요?”
폰네시가 데로니스에게 넘어갔으니, 주변 소영지들의 운명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레온의 물음에 재스퍼와 덴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 듣기 좋은 소식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무서운 속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어서 말이지.”
“월랜드를 중심으로 동부 세력들이 전부 데로니스 왕조에 충성을 맹세했어, 레온.”
“역시… 그럼 길라는?”
“그곳이라면… 가장 먼저 데로니스에 충성을 맹세했다더군.”
“이런… 크루네 가문의 피타 공자는 너와 가장 친한 친우였잖아?”
덴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레온을 바라봤다. 예상한 일이지만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안다. 피타가 거절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닌 것도, 전쟁 앞에 고작 친분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란 것도 이제 알고 있다.
‘길라를 빼앗겼으니 동부 쪽으로 갈 수는 없어.’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월랜드와 길라는 건너갈 수 없는 ‘그레이트 대협곡’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동북부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게 바로 그 두 곳이다.
“월랜드는 진작 배신을 택했고, 길라도 살길을 찾았으니 큰일이군.”
재스퍼가 다시 한번 독한 포도주를 마셔 넘겼다.
이제 그들의 심장부인 덴버그에 쳐들어가기 위해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역시… 그곳밖에 없는 건가.’
레온이 생각을 정리할 때.
만찬회장 밖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덴이 고개를 빼고 입구를 바라보자, 늙은 시종 하나가 당황한 표정으로 재빨리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그게… 아, 아르고가 왔습니다. 처음 보는 전서조와 함께요.”
“뭐? 전서조가?”
서둘러 문을 열라는 고함 소리가 이어졌다.
덴의 명령과 함께 만찬회장의 문이 활짝 열렸다.
흰발톱흑눈새 두 마리가 빠른 속도로 내부에 달려들었다.
“오, 맙소사. 아르고, 이게 무슨 짓이야?”
아르고가 좁은 실내를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날개가 휘날릴 때마다 참기 힘든 먼지가 일었다.
공중에서 날개만 퍼덕거리던 다른 전서조 한 마리가 위용 있게 울음소리를 뽐내며 덴에게 달려들었다.
“서신이 온 모양인데, 덴?”
레온이 전서조의 발끝에 묶인 서신을 가리켰다.
덴이 조심스럽게 서신을 빼 들었다.
그러자 새로운 전서조가 제 역할을 다했다는 듯 다시 한번 거친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
“…….”
모두가 숨죽여 덴을 바라봤다.
북부의 전서조가 날아들었으니, 인근 영지에서 소식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컸다.
서신을 살피던 덴이 심각한 표정으로 레온을 바라봤다. 적힌 내용은 제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소하에서 서신이 왔어.”
“소하라면! 마리사 언니가 보낸 서신이야?”
“그래, 미셸.”
덴이 레온에게 서신을 건넸다.
소하는 북부 지역 중 가장 비밀에 싸인 영역이었다.
그들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오래도록 문명과 단절된 채 독립적으로 지내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소하에서?’
레온이 받아 든 서신을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소식이 전해졌다.
“…폰네시에 머무르고 있는 데로니스 세력이 동부 지역 곳곳에 정찰단을 파견했다는 소식이야.”
좋은 소식이었다.
그들은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곧 북부 차례가 올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내용이군.”
대비가 필요했다.
혹한의 절기라 당장 데로니스 세력이 이곳 북부로 밀고 들어올 가능성은 적었다. 물론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곧 있으면 맹추위는 물러가고 눈 폭풍이 걷힐 테니, 북부도 서대륙의 일원임을 증명해야 할 날은 분명 다가올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린 어쩌죠?”
눈치만 살피던 케인이 물었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이 그리웠지만 이제 더는 폰네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모두가 숨죽였다. 레온은 그들의 시선이 제게 향하는 것을 느꼈다.
“…….”
당장 눈앞에 들이닥친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모두가 숨 가쁘게 달려왔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그 누구도 섣부르게 결정할 수 없었다.
길을 정하고 방향을 잡는 건, 오직 레온이 해야 할 일이었다.
레온이 저를 바라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동자를 모두 바라봤다.
“이제 할 일을 정해야겠지.”
더 이상 굳건한 폰네시는 없다.
가이아 왕조를 다시 세우는 것도, 데로니스 왕조와 힘을 겨루며 반대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할 덩치 큰 공작가도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나, 레온 몬데이어.”
내가 살아 있다.
그 비극의 과거와 앞으로 일어날 전부를 알고 있는 내가.
“폰네시의 정통이자 살아 있는 유일한 몬데이어.”
다시 되돌려 받는다.
잃어버린 것들을.
“북부에서 내 세력을 모으겠어.”
이런 운명을 맞이하게 된 분명한 이유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순서는 데로니스 왕조를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꿈꾸든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 거야.”
폰네시의 꿈을 앗아갔으니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레온의 푸른 눈동자가 형형히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