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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42화 (42/133)

42화

9장. 얼음 요새(1)

눈 폭풍마저 가라앉은 혹한의 밤.

레온이 고요함이 내려앉은 식자재 창고를 찾았다.

‘…아, 제발. 꺼지지 마.’

센느의 영주성은 외부에서 불어닥치는 눈 폭풍을 막기 위해 방한 준비가 철저히 되어 있지만, 가녀린 불씨를 지키기엔 역부족이었다.

레온이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불안불안하던 초가 결국 훅, 꺼지고 말았다.

“이런 젠장.”

어둠이 내려앉은 창고는 코앞도 보이지 않았다.

레온이 신경질적으로 조리대 위에 촛대를 내려두었다.

이래 가지곤 뭘 집어 들었는지 눈으로 분간할 수도 없겠네.

‘내 걸 찾아야 되는데.’

불 꺼진 창고에서 식료품을 훔쳐내는 모양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레온은 폰네시에서 가지고 온, 지원품 목록에 들어 있지 않은 제 몫의 고급 포도주를 찾기 위해 이 늦은 시각에 생고생 중이었다.

“도대체 어디….”

“거, 거기 누구예요?!”

“아잇! 깜짝이야.”

등 뒤쪽에서 울렁거리는 붉은빛이 훅 끼쳐들었다.

레온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잠옷 차림의 미셸이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미셸?”

“레, 레온 공자?”

혹한의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알고 있는 센느인답게 미셸은 거대한 횃불을 들고 있었다.

레온이 떨어뜨린 촛대를 집어 들고 미셸에게 다가갔다.

잠시간 놀랐던 그녀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데룩 굴렸다.

뭔가 수상한데.

“이 늦은 시간에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미셸?”

“…그, 그러는 공자야말로 여기에 왜 혼자 있는 거죠?”

“그야 다들 자니까 혼자… 질문은 내가 먼저 했거든?”

이제 레온은 팔짱을 끼고 미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척 봐도 등 뒤에 무언갈 숨겼다. 횃불을 들지 않은 손이 그녀의 등 뒤에서 달달거리고 있었다.

“으음, 내가 찾는 게 거기 있는 것 같은데.”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레온은 여유롭게 미셸을 바라보기만 했다.

열심히 눈을 굴리던 미셸이 결국 등 뒤에서 거대한 포도주 병을 꺼내 들었다.

“잠이 안 와서요.”

“벌써부터 그런 습관은 좋지 않아, 미셸.”

“…꼭 우리 오라버니처럼 말하네.”

“영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 어서 내려놔, 그거.”

“알겠다구요, 진짜.”

미셸이 입을 삐쭉 내밀고 포도주 병을 건넸다.

레온이 불빛에 일렁이는 포도주를 살폈다. 내용물은 여전히 묵직하게 차올라 있었다.

“칫.”

확인을 끝낸 레온이 고개를 들었다. 횃불을 들고 있는 미셸이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으로 포도주를 탐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지.

레온이 주변에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빈 컵 하나를 들었다.

그러자 기대감 섞인 미셸의 눈이 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한 잔만 마시고 돌아가는 거야.”

“그럼요, 공자! 딱 한 잔만이요!”

“하여간 나이도 어린데 어째서 이렇게 술을 좋아하는 거야?”

“속으로 할 말이 너무 크게 나온 것 같지 않아요, 공자?”

레온이 어깨를 으쓱하고 미셸에게 포도주를 건넸다.

미셸은 생명수를 받은 듯 두 눈을 꾹 감고 포도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레온도 조리대에 기대서서 병째 포도주를 머금었다.

“…….”

“…….”

애써 들켰는데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었다.

미셸이 벽난로에 횃불을 던져 넣고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불씨를 레온과 함께 바라봤다.

조리대에 기대선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소하까지 동행을 허락해줘서 고마워, 미셸.”

“…뭘요. 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인데요. 어머니의 부탁도 있었고.”

날이 밝고 준비가 끝나는 대로 일행과 미셸은 북부 인근의 소하로 떠날 예정이었다.

설인의 후예들이 사는 곳이라 전해지는 신비의 영역.

소하엔 문명과 단절된 여인들이 오래도록 삶을 유지 중이었다. 그곳에 덴과 미셸의 큰누이인 마리사가 있었다.

“아마 아무도 반기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여자라곤 늙은 메리뿐이니 더더욱 경계 받을 거고요.”

미셸이 고개를 돌렸다. 토바가의 어두운 눈동자가 레온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도 새하얀 레온은 뜨거운 불빛 앞에 그대로 붉은빛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언니가 보고 싶어요.”

끔찍했던 지난 시간 동안 미셸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

가족을 그토록 증오할 수 있다는 것도, 또 영원할 줄 알았던 존재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레온이 포도주를 마셔 넘겼다. 묵직한 술기운이 부드럽게 목을 타고 흘렀다.

“미안해, 미셸.”

경험하지 않아도 될 일을 겪게 만들었다.

레온은 덤덤한 목소리로 미셸에게 위로를 전했다.

운명을 뒤틀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미셸은 아직 아이작을 잃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데로니스와 폰네시의 싸움에 센느가 엮이게 된 것 역시 제 복수 때문이었다.

“그걸 왜 공자가 사과해요. 히스 그 개자식이 저지른 일인걸요.”

미셸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레온에게서 포도주 병을 그대로 빼앗아 들고 독한 술을 꿀꺽꿀꺽 넘겼다.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한 사람에게 사과받고 싶지 않아요.”

“난 널 위로하는 거야.”

“그런 거라면… 다행이고요.”

레온이 손을 뻗었다.

미셸의 부스스한 머리를 쓰다듬고 나자 그녀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힐끔 쳐다보는 눈길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제가 공자한테 목매던 순간이 있다는 걸 까먹은 건 아니겠죠?”

“으, 응?”

“왜 그때 기를 쓰고 어둡고 사람 없는 곳에 둘만 함께 있고 싶었던 때가 있잖아요. 기억 안 나요?”

“그랬… 던가?”

미셸이 눈을 좁게 뜨고 레온을 바라봤다.

쾅, 조리대 위에 포도주병을 내려두고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야, 나 방금 뭐 잘못한 건가? 역시 머리통을 쓰다듬는 건 실례였던 걸까?

레온이 도로 미셸에게서 멀어졌다. 미셸은 레온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손목을 붙잡았다.

“…포도주 마실래?”

“싫은데요?”

새침한 그녀가 레온에게 훅 다가갔다. 레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미셸이 얼빠진 레온의 표정을 보곤 풉, 웃기 시작했다.

“걱정 말아요. 난 이제 공자한텐 관심 없으니까.”

깔깔깔!

배까지 붙잡고 웃어대던 미셸이 빨개진 얼굴로 양손을 파닥였다.

열이 오른 볼을 식히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며 레온이 헛 웃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뭐, 아무튼! 덕분에 목적도 달성했고, 저는 이제 자러 갑니다.”

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이제는 걱정을 덜었다.

미셸이 뾰족한 손톱으로 톡톡, 포도주병을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

“위로 고마워요, 레온 공자.”

이른 아침부터 소하로 가는 길을 찾으려면 고된 일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키려 한 소중한 존재가 이제는 자신을 지켜줄 테니까.

“잘 자, 미셸.”

레온이 팔랑거리며 사라지는 미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자, 그럼 나도 이제 가볼까.

비록 얼마 남지 않았지만 레온은 남은 포도주병도 챙겨 들었다.

“잠은 잘 오겠군.”

술기운이 올랐는지 기분이 좋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레온의 입가엔 짙은 미소가 남아 있었다.

***

창밖에서 거칠게 불어대는 서늘한 바람 소리도 이제 막 익숙해지던 참이었다. 물론 아쉽진 않다.

많은 일이 일어났던 한 달의 시간을 뒤로하고 센느를 떠나기 위해 손수 짐을 꾸렸다.

많지는 않다. 욕심내서 가지고 갈 정도로 혹한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공자님, 준비는 다 하셨나요?”

“응, 들어와. 브라운.”

브라운이 늘 그렇듯 미소와 함께 나타났다.

꾸려놓은 레온의 짐들을 한 손에 들고, 두고 가는 게 없나 살펴보는 일도 잊지 않았다.

“모두 모여 있어요.”

새벽부터 영주성이 소란스러웠다. 먼 길을 떠날 일행을 위해 토바 부인이 직접 든든한 식사를 챙겼고, 덴과 재스퍼도 말과 마차의 정비를 지켜봤다.

“함께 갈 수 있는 우리 병사들은 몇이나 돼?”

“세 명이에요. 부상이 심한 이들을 제외하고 정찰 인원을 빼고 나니 셋뿐이에요.”

“음, 많지는 않네.”

“어차피 소하에서 반기지 않을 병력이니 차라리 잘되었어요.”

폰네시의 병사 열두 명 중 첩자와 부상병을 제외하고 나니, 함께 떠날 인원은 세 명밖에 없었다.

나머지 다섯은 정세를 살피기 위해 동부로 정찰을 떠날 예정이었다.

“브라운, 가서 마지막으로 우리 짐을 확인해 줘.”

“예, 공자님.”

성벽 안쪽 정원엔 센느에서 가장 건강한 새하얀 말 두 마리가 튼튼한 마차를 끌길 기다리고 있었다.

레온은 덴과 재스퍼, 그리고 토바 부인과 식솔들의 따뜻한 인사를 맞으며 미리 기다리고 있던 제 일행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도련님, 어서 오세요.”

빨개진 코끝으로 메리가 레온을 맞이했다.

마부를 맡게 된 워렌과 케인은 지도를 확인하느라 바빠 보였다.

브라운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짐을 확인했고, 소하까지 동행하게 된 미셸은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덴, 재스퍼 경.”

레온은 센느에서 만나게 된 새로운 인연들에게 다가갔다.

떠나는 이들을 위해 모두가 슬픔을 참고 있었다.

“내 생애 가장 많은 일이 있던 한 달이었어요.”

장갑을 벗어 따뜻한 손을 맞잡고 나니 떠나는 게 정말 실감이 났다.

재스퍼가 말없이 레온을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레온, 너희 가문의 은혜를 되갚을 기회가 있어 영광이었다.”

“모두 주고받았으니 우리는 지금부터 처음인 거예요.”

“하하! 그래. …언제든 힘이 들면 돌아와라.”

그가 레온의 마른 어깨를 몇 번이나 쓰다듬다가 결국 레온을 놓아주었다. 겨우 손에 넣은 것을 잃게 될까 두려웠다.

하나 붙잡을 이유가 없다. 몬데이어가 결정한 일을 지지하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이었다.

“…레온!”

조금 전부터 줄줄 눈물을 흘리고 있던 덴이 기다렸다는 듯 울음을 터뜨렸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레온이 작은 덴을 마주했다.

“흡, 흐윽… 다음에, 다음에 다시 만날 땐 더 나은 센느의 영주가 되어 있을게!”

“기대된다. 지금보다 더 멋진 네 모습.”

“…네가 내게 보여준 모든 걸 잊지 않을 거야.”

레온이 센느에 와 지켜낸 게 무엇인지 덴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레온이 있기에, 아직 이곳에 살아 있기에 다음을 꿈꿀 수 있다.

무너지지 않고 센느와 페르탈린이 함께 뭉치게 된 것 역시 모두 레온이 해낸 일이었다.

“…내 동생 미셸을 잘 부탁해.”

“그럴게.”

“아마 소하에서 너희를 반겨주진 않을 거야. 워낙 외부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니까.”

고난이 예상됐지만 영지를 잃은 순간부터 쉬운 걸음은 사라졌다.

“그래도 결국… 그들은 너에게 마음을 열 거야.”

그건 다른 그 누구보다 확신할 수 있었다.

레온은 힘을 가졌다. 사람들을 결속시키고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그런 대단한 힘을.

“고마웠어, 레온. 늘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 없어서 미안해.”

덴이 주춤거리다 이내 레온을 향해 팔을 뻗었다.

레온은 내밀어진 그 짧은 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글쎄….”

레온이 덴의 팔을 잡아당겼다.

“친구끼리는 그런 말 하는 게 아니라던데.”

와락 끌어안아 그 어깨에 고개를 묻고 제게 첫 친구가 되어준 이의 품에서 잠시나마 편안함을 느꼈다.

“보고 싶을 거야.”

비록 눈앞에 펼쳐진 게 한 치 앞도 모르는 폭풍 속일지라도.

“다녀올게.”

레온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함께 걷는 이들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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