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9장. 얼음 요새(2)
“…북부에 예로부터 전해지는 속담이 하나 있어요.”
덜컹거리는 마차 안.
꽁꽁 얼어붙기 직전의 일행이 겨우 눈동자만 굴려 미셸을 바라봤다.
새하얗게 질린 그녀가 흐리멍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명이 간절하지 않은 자는 혹한에 뛰어논다고….”
이 눈 폭풍이 몰아치는 혹한에 먼 길을 떠나는 건 목숨이 위험한 일이란 뜻이었다.
“…정말 험준하네.”
바깥을 살피던 레온이 중얼거렸다.
센느를 떠난 지 나흘.
아직까진 지나온 자리도, 가야 할 길도 전부 울퉁불퉁한 대륙과 이어져 있었다.
하나 곧 있으면 그마저도 끝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끔찍한 얼음의 땅이 끝도 보이지 않고 펼쳐질 터였다.
“그래서 북부 사람들은 절대 혹한의 절기에 이동하지 않아요.”
미셸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음! 물론 우리에게 시간이 없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요.”
그래놓고 레온을 너무 책망했나 싶어 서둘러 뒷말을 덧붙였다.
새로운 절기를 맞이하기까진 이제 겨우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동안 레온은 이곳 북부를 제 세력으로 만들어야 했다.
“레온.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요리조리 눈을 굴리던 미셸이 조심스레 물었다.
줄곧 바깥만 쳐다보던 레온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왜 첫 행선지로 소하를 정한 거예요? 설마… 저를 위해서 그런 건 아니겠죠?”
미셸이 양 볼을 부여잡고 눈을 깜빡거렸다. 귀여운 구석이 있다.
레온이 웃는 얼굴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
“…예에 그러니까요! 그럴 리도 없으면서 왜 다른 곳보다 훨씬 멀고 구석탱이에 있는 소하로 가는 거예요? 누굴 위한 것도 아니면서.”
“뭐, 그건….”
제가 하는 모든 일에 이유 불문하고 따르는 메리나 워렌이 아니라면 첫 목적지로 소하를 정한 이유가 궁금할 만도 했다.
내심 신경 쓰고 있던 브라운이 꿀꺽, 침을 삼켰다. 레온이 별것 아니란 투로 설명했다.
“북부는 오래전부터 데로니스가 관심도 없던 구역이야. 그 말은, 그들이 의지할 곳은 오랫동안 폰네시였단 뜻이지.”
아직은 루시오가 만들어낸 영광 아래 기대해 볼 수 있는 게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손쉽게 내 편이 되어줄 거야. 재스퍼 경과 덴이 뜻을 전해주기로 했으니 분명 그렇겠지.”
“으음, 그랬구나. 하긴… 소하는 설득하기 쉽지 않은 곳이니까 직접 가 봐야겠네요.”
소하는 설인의 후예들이 산다고 전해지는, 비밀에 싸인 독립된 영역이었다.
그곳은 대륙이 끝나는 북부 끝 센느보다도 더욱 먼 북쪽에 위치해 있다.
바로 다이아 스틸이 매장된 얼음의 땅 그 한가운데.
“사실… 좀 무서워서요. 도착하기 전에 얼음이 녹아버리면 어떡하죠? …건너가는 동안 그 얼음들이 모두 깨져 버리면요?”
소하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얼음의 땅을 가로질러야 했다.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불행이 나를 피해 가리란 확신도 없으니 말이다.
“괜찮을 거야, 미셸.”
“…확신하는 거예요?”
“응.”
하지만 레온은 알고 있다.
서대륙과 맞닿은 이 얼음은 절대 녹지도, 깨지지도 않는 다이아 스틸이란 사실을 말이다.
“깨질 일은 없어, 미셸.”
그리고 설인의 후예, 태초의 소하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설인도 아닌걸요?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미셸이 새초롬하게 레온을 흘겨봤다.
이 부분에선 유능한 부집사도 레온의 편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얼음을 어찌할 수 있는 능력 같은 건 확실히 없는 편이죠, 우리 인간에게.”
“어! 브라운도 설인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거예요?”
“예, 아가씨. 전 서대륙 곳곳을 제집처럼 오랫동안 머무르고 공부하며 지내왔답니다.”
미셸이 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좋아했다. 그녀가 곁에 앉은 메리에게 달라붙어 물었다.
“메리도 알고 있죠? 우리 유모는 잠자기 전에 늘 그런 얘기를 해 줬거든요.”
“설인 얘기는 처음 듣는걸요? 설명해 주시겠어요, 아가씨?”
“헤헤, 역시 북부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구나?”
모르는 것이 없는 늙은 유모는 어린 아가씨의 마음 역시 쉽게 알아챘다.
그럼 레온은요?
미셸이 물었다.
아는 이야기를 실컷 하라고 웃어주는 모양새에 레온도 모르는 척 분위길 맞춰주었다.
“북부 전설에 따르면 얼음 속에서 태어난 설인이 있다고 해요!”
신이 난 열여섯 살 어린 아가씨가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그들은 얼음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데, 북쪽 끝 저 거대한 스노우 탑도 그들이 세웠대요. 정확히 말하자면 태초의 설인인 ‘밀라쿠’가 거대한 용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쌓아 올린 거예요.”
스노우 탑은 서대륙의 오른편, 엔드해와 맞닿아 있는 북부의 거대한 산을 칭하는 이름이었다.
그곳은 확실히 자연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쌓아 올린 빙벽처럼 보였다.
북부인들은 그것을 태초의 설인인 ‘밀라쿠’의 흔적으로 믿었다.
“밀라쿠는 산을 쌓고 대륙도 갈라봤지만 날 수 있는 용을 따돌리기엔 역부족이었어요. 그래서 얼음을 이용해 숙적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만들기로 했죠. 하지만 불 그 자체인 용에게 얼음으로 만든 무기가 통할 리 없었고, 결국 밀라쿠는 이 북부 땅을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으로 만들어 버렸대요.”
레온이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바닥을 내려다봤다.
밀라쿠가 만들었다는 그 녹지 않는 얼음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밀라쿠는 용을 무찌르고 살아남았나요?”
메리가 묻자, 미셸이 신이 나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밀라쿠는 녹지 않는 얼음을 이용해 용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어 끝내 승리했지만, 치열한 전투는 그의 심장까지 멈추게 했어요.”
“저런. …결국 죽었나요?”
“네, 밀라쿠가 죽고 나서 얼마 가지 않아 그의 피에서 다시 설인이 태어났는데, 그게 바로 소하를 세운 타티아나예요. 그녀는 여전히 얼음을 다룰 줄 알았고, 녹지 않는 얼음 요새 소하를 세운 뒤 그곳에서 영원히 밀라쿠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대요.”
“소하의 족장들은 대대로 타티아나라고 불리고 있죠. 지금까지도 말이에요.”
“역시 모르는 게 없군요, 브라운! 북부인이라고 해도 되겠어요. 흐흥.”
미셸은 진심으로 설인의 전설을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용족도, 설인족도 그들의 소식은 수만 년 전 끊어졌지만 어린 미셸은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그 환상을 철석같이 믿었다.
‘사실 그들이 다룬 녹지 않는 얼음은 다이아 스틸이지만. 뭐… 환상을 깰 필요는 없으니까.’
밀라쿠는 다이아 스틸을 다룰 줄 아는 자였다.
그가 진짜 용과 맞서 싸웠는지는 바다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다이아 스틸을 이용해 무기를 만들고 그 위에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얼음 요새를 세운 존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소하로 간다면 다이아 스틸을 다룰 방법을 찾게 될지도 몰라.’
그곳에 밀라쿠의 후예들이 있다.
‘찾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시간이 많지 않다.
동대륙까지 건너가 다이아 스틸을 녹여낼 방법을 찾기엔 당장 한 달 뒤 데로니스가 북부에 쳐들어올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소하에 아직 밀라쿠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방법이 있다.
데로니스에게 맞설 유일한 무기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레온. 아직까지 따라오는데요? 그 스노우 울프.”
신이 나서 웃고 있던 미셸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메리가 걱정 짙은 표정으로 바깥을 살폈다.
먼 곳에서 따라오고 있는 새끼 스노우 울프가 보였다.
“…데리고 가면 안 돼요? 불쌍하잖아요.”
레온이 흘끔, 마차 밖을 확인했다.
새끼 스노우 울프는 빠른 속도로 달리며 줄곧 마차를 따라오고 있었다. 벌써 열 시간도 넘었다.
“그래요, 도련님. 센느에서부터 저렇게 따라오는데 그냥 두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어요?”
“맞아요. 아직 아기잖아요.”
레온은 소하로 출발하며 새끼 스노우 울프를 영주성에 두고 왔다.
메리가 아쉬워하고 브라운이 걱정했으나 이미 결정을 내린 일이었다.
“금방 돌아갈 거야. 원래 스노우 울프의 영역으로 돌아가게 둬.”
“하지만… 쟨 어미도 잃었잖아요, 레온?”
“벌써 몇 시간짼지… 이러다 정말 큰일….”
“안 데려가겠다고 했어, 내가.”
일행들의 독촉에 레온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메리가 입을 뻐끔거렸다.
영주성에서 내내 새끼 짐승을 돌봤으니 정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데리고 갈 수 없다. 데리고 가선 안 된다.
레온이 시선을 돌렸다. 침묵이 내려앉은 마차 내부에서 브라운만 눈을 굴려댔다.
“길들일 수 없는 짐승이니 더 크기 전에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아니, 그게 분명 나을 거예요.”
“…치잇.”
미셸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메리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메리가 느린 손길로 그녀의 볼을 토닥였다.
“…….”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창밖을 바라보니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만 머무르자.”
어둠이 내려앉고 나면 눈 폭풍이 기승을 부린다. 한 걸음도 나아가선 안 된다.
“예, 공자님.”
레온의 결정에 일행들이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바람을 막아줄 나무는 없지만 작은 바위틈이 깊게 존재하는 곳이었다.
“마차를 분리하고 방한막을 설치하도록 해.”
내내 마부석에서 길을 잡았던 워렌과 케인도 야영 준비에 동참했다.
마차는 금세 분리되어 축사로, 또 조악한 야영터로 준비되었다.
두터운 방한막을 두르고 나니 나름대로 안전한 잠자리가 마련되었다.
“모두 들어와.”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다.
야영터 한가운데에 바람 하나 느껴지지 않는 바위틈도 있었다.
레온이 그곳으로 다가갔다. 두 명 정도는 거뜬할 테니 당연히.
“메리! 여기선 우리 둘이 자요.”
미셸이 늙은 메리의 팔을 잡아끌고 잽싸게 나타났다.
“딱 우리 둘 자리네요. 그렇죠?”
“…도련님이 주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부상도 입으셨으니.”
“…하지만 전 혼인도 안 한 아가씬데요?”
미셸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레온을 바라봤다.
조금 전 일로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미셸이 성을 내고 있었다.
뭐 하긴, 결혼도 하지 않은 여성과 붙어 잘 수는 없는 노릇.
메리와 단둘만 있다면 몰라도 미셸이 있는 이상 두 사람 사이에 레온이 낄 틈은 없었다.
“둘이서 편하게 자도록 해.”
“…괜찮으시겠어요, 도련님?”
레온이 메리를 안심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쪽을 살피니 모두 각자 편할 대로 자리를 정돈 중이었다.
그중 케인이 두 눈을 빛내며 제 옆을 팡팡 두드리고 있었다.
‘자야 한다면 비밀을 알고 있는 케인 옆이 제일 낫긴 하겠지만.’
레온이 몸을 잘게 떨었다. 아직 케인을 믿을 수 없다.
또 위한답시고 조잘거리며 어떤 말실수를 할지 몰랐다.
결국 레온이 한숨을 내쉬고 입구로 다가갔다.
“첫 불침번은 내가 설 테니 다들 눈 좀 붙여.”
차라리 혼자가 편하다.
레온이 방한막을 걷고 지독한 혹한 속으로 나섰다. 밤새 생각할 게 아주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