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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44화 (44/133)

44화

9장. 얼음 요새(3)

피부가 다 갈라질 것처럼 날카로운 북풍이 몰아닥쳤다.

뭐, 그래도 버틸 만하네.

레온이 추위에 떨고 있는 말의 콧등을 쓰다듬으며 주변을 살폈다.

“…….”

아직까진 대륙과 붙어 있어 몸을 숨기고 바람을 막아줄 만한 것들이 주변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곧, 며칠만 더 나아가고 나면 흙과 나무와 묻혀 있는 생명마저 없는 다이아 스틸의 땅이었다. 그땐 야영이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공자님.”

나름대로 훈기를 더해가던 방한막이 팔락거렸다.

그 안에서 붉은 머리가 쑥 나타났다. 레온이 머쓱하게 코를 훌쩍이는 케인을 바라봤다.

“왜, 뭐.”

“안 추우세요?”

“안 춥겠냐.”

케인이 바짝 다가와 옆에 섰다. 계속 안에서 불침번을 자처한 공자를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하다 배가 아프단 이유로 몰래 빠져나온 참이었다.

“용케도 머릴 썼네.”

“그럼요! 제가 지켜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네가 지켜야 하는 게 내가 아니라 내 비밀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텐데 말이야.”

“그럼요. 뭐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십니까.”

당연한 거 맞냐고.

케인이 열심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레온은 은근슬쩍 자꾸만 다가와 붙는 케인을 밀어냈다. 아주 귀찮아 죽겠네.

“추우실까 봐요. 제 온기라도 있으면 좀 낫지 않을까요? 전쟁터에선 주로 이렇게 체온을 유지한답니다.”

“난 너랑 체온 나눠 쓸 생각 없거든? 게다가 여긴 전쟁터도 아니고.”

“이 혹한은 전쟁보다도 무서운 재해죠. 그렇게 쉽게 생각하실 일이 아니라니까요.”

그때 다시 한번 방한막이 펄럭거렸다.

따뜻하게 갖춰 입은 워렌이 빠져나오다 말고 찰싹 달라붙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레온이 뚱한 표정으로 케인을 밀어냈다.

그러자 케인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뒷머릴 긁적였다.

“무슨 일이야, 워렌?”

“지금부턴 제가 살피겠습니다.”

워렌은 새빨갛게 변한 레온의 코를 바라봤다.

먼저 불침번을 서겠다는 공자를 말리지 않은 건 레온이 말린다고 말려지지 않는 사람이란 걸 파악했기 때문이다.

단시간이라도 하고자 하는 일을 하게 내버려 둔 뒤 공자를 위하는 게 낫다.

브라운과 워렌 두 사람은 이제 완벽히 레온과 어울리는 법을 알아냈다.

“다음은 부집사가 나올 겁니다. 지금은 쉬어두세요.”

“그래?”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숨을 쉴 때마다 얼어붙지 못한 눈들이 코를 괴롭혀 고통스럽던 차였다.

“케인, 너도 이만 들어가고.”

워렌이 레온의 곁에 찰싹 붙은 케인에게도 눈짓했다. 힘든 시간을 함께 견뎌내서 그런지 두 사람이 무척 가까워진 것 같았다.

물론 주군과 기사로서 지켜야 하는 선은 분명히 있다.

워렌은 케인이 그 선을 넘어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예! 고생하세요, 워렌!”

케인이 말 잘 듣는 큰 개처럼 레온의 뒤에 바짝 붙어 졸졸 따라갈 때였다.

방한막을 걷자마자 브라운이 급하게 레온을 찾았다.

잠들어 있던 메리와 미셸이 다 깰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공자님, 공자님!”

몰아치는 바람에 완전히 불길이 끊기고 말았다. 브라운이 레온의 손목을 붙잡았다.

케인은 서둘러 다시 불을 붙였고, 미셸과 메리는 바위틈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어 불안한 표정으로 상황을 살폈다.

“뭐야, 무슨 일인데 그래?”

“기사 칼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뭐?”

“방금 전 쓰러졌어요!”

모여 있던 병사 둘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가까이 다가가 살피자 쓰러진 칼은 신음도 흘리지 못하고 완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온몸이 불덩어리야. 이 추위에 대체….”

케인이 횃불을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밝은 곳에서 그를 살피니 얼굴엔 식은땀이 가득했다.

브라운이 상황을 정리했다. 우선 물이 필요했다.

다행히 식수는 넉넉한 편이었고, 불도 있으니 녹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분은 물을 준비해 주시고 케인은 천을 마련해 주세요. 그리고.”

“토바 부인께 받은 약초들이 있어요. 제가 해열초를 찾아볼게요.”

메리가 부지런히 짐 꾸러미를 살피기 시작하자, 미셸도 그 옆에서 그녀를 도왔다.

‘이상한데.’

눈 주위가 잿빛이다. 레온이 쓰러진 병사의 옷깃 안쪽을 살폈다. 목부터 시작된 잿빛 반점이 온몸에 퍼지고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 본 기억이 있다.

레온이 다급하게 병사의 손목을 걷었다. 잿빛 반점이 올라온 피부엔 열감이 하나도 없었다.

레브일 적에 본 기억인가? 아니, 폰네시에선 본 적이 없는데. 그럼 도대체 뭐지?

혼란스러웠다. 한 번에 밀려드는 기억의 무게에 레온이 두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큰일 났습니다!”

“밖에 말이, 말이 쓰러졌습니다!”

물을 찾으러 갔던 병사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레온이 횃불을 들고 방한막 밖으로 나섰다.

마차를 개조한 축사 바깥으로 축 늘어진 말이 보였다.

“아직 살아는 있습니다.”

“워렌, 잠깐 이것 좀 들어봐.”

북부의 말이 환한 달빛 아래 맥없이 늘어져 있었다.

레온이 손을 뻗어 쓰러진 말의 상태를 살폈다.

가쁜 숨을 내뱉던 말은 그래도 아직 힘이 남아 있는지 몇 번이고 발버둥을 쳐댔다.

‘…잿빛 반점.’

같은 증세다. 쓰러진 병사와 같은 반점이 말의 콧잔등에도 번지고 있었다.

레온이 그 즉시 말에게서 손을 떼고 소리쳤다.

“모두 칼에게서 떨어져!”

이건 전염병이다. 사람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같은 증상으로 목숨을 위협하는 전염성이 짙은 병이었다.

레온이 서둘러 브라운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그는 칼을 만지지 않았다. 미셸도, 메리도 마찬가지였다.

“칼을 만진 건 나뿐이야?”

“저, 저도….”

“…방금 말이 쓰러지기 전에 저도 만졌습니다.”

심각한 분위기에 모두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레온이 병사 둘과 나머지 일행들을 번갈아 살폈다.

그러곤 제 손을 내려다봤다.

어떤 경우로 병이 옮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일행들을 위험에 빠뜨릴 필요는 없었다.

“지금부터 방한막을 걷고 다시 마차를 조립하도록 해. 말은 버려두고 칼은 마차에 태워 우리와 격리한다. 바로 소하로 떠나겠어.”

눈치껏 병사 둘이 칼을 옮기기 위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메리가 불안한 시선으로 레온을 바라봤다.

그에 레온이 그녀에게 고개를 저었다. 와선 안 된다. 이 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메리를 위험에 말려들게 할 순 없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아무도… 내게 다가오지 마.”

분명 본 적이 있다. 기억만 떠올린다면 칼을 살릴 방법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전까진 이게 최선이야.’

레온이 저를 바라보는 일행들에게서 멀어졌다.

***

어차피 말 한 마리로는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없다.

레온은 쓰러진 칼을 마차 안에 싣고 마부석에 올라탄 병사 둘에게 다가갔다.

“소하로 가는 길은 알지? 그곳에 도착하면 날 믿고 곧장 얼음을 건너. 절대 깨지지 않을 거야.”

두 사람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아직 별다른 증세는 보이지 않았지만, 센느에서부터 칼과 계속 붙어 있었으니 전염병을 피해 가기란 어려울 것 같았다.

“먼저 달려가 공자님이 도착한단 소식을 전해 보겠습니다.”

“조심히 오세요, 공자님.”

“그래, 너희도 조심해. 칼을 잘 돌봐주고.”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이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행들에게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소하를 향해 출발했다.

“…….”

정말 최소한의 짐만 남았다.

레온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잠잠한 하늘 저 너머에선 눈 폭풍이 담긴 새카만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서둘러야겠어.”

야간 이동은 위험한 데다 바람을 견딜 마차마저 보내 버렸으니 상황이 나빴다.

“공자님, 얼마 가지 않아 빈 성터가 하나 있을 거예요. 터만 남아 있지만 바람을 피하기엔 문제없을 테니 그곳으로 가시죠.”

“그래, 모두 조심해서 가. 난 뒤에서 따라갈게.”

레온이 두툼한 방한 망토를 목 끝까지 끌어올리며 미소 지었다.

잠시라도 몸을 녹였으니 오늘 밤은 무리 없이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일행들 역시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지도를 볼 줄 아는 케인과 브라운이 가장 선두를 맡았고, 그 뒤편에 메리와 미셸이 가벼운 짐을 들고 뒤따르기로 했다.

워렌은 일행들과 레온 사이에서 양쪽 모두를 지킬 생각이었다.

“폭풍우가 밀려올 테니 조심하세요, 공자님.”

“걱정 말고 얼른 가.”

워렌이 한참이나 레온을 바라보다 결국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레온은 일행들의 모습이 어느 정도 보이는 거리를 유지하며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직접 봤어. 바다의 기억이 아니라 내가 직접 본 적이 있어, 분명히.’

잿빛 반점이 온몸에 돋아나는 그 끔찍한 모습은 유난히도 생생했다.

누군가가 한 꺼풀 눈을 가리고 보여주는 바다의 기억 같은 게 아니라 직접 확인한 또렷한 현실이었다.

인어였지. 바닷속은 아니었고… 그럼 그 암석 구석에 살던 땐가?

레온이 두 눈을 찌푸렸다.

생각이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인어의 기억력이 이렇게 볼품없을 리 없다.

‘분명 메모리아 라피스까지 만든 기억인데.’

영혼의 조각을 만들어내듯 인어들은 자신의 기억을 조각으로 남길 수 있었다.

조각으로 만든 기억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영영 기억을 없애기 위해선 만들어둔 메모리아 라피스를 파괴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전에 내가 죽거나.’

인어의 영혼인 라피스가 사라진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레온이 손을 들어 상처를 매만졌다.

‘…소모되고 있구나. 그래서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는 거야.’

레온이 창백한 손을 들었다. 인어도, 인간도 아닌 지금 이대로 라피스를 소모해 댄다면 평범한 인간이 되고 말 거다.

‘조심해야겠어.’

아직은 안 된다.

데로니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라피스를 알고 있는 검은 사냥개를 부숴버리기 전까지는 인어의 기억과 이 생명력이 필요했다.

레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조금 더 스스로 몸을 잘 돌볼 필요가 있겠어.

그때였다.

다짐하는 순간 눈앞에서 강한 바람이 몰려왔다.

“으, 으윽!”

순식간이었다. 몸이 밀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 레온의 주변에 휘몰아쳤다.

마른 나뭇가지와 돌무더기를 한 번에 몰고 온 강한 바람이 눈앞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다들, 다들 어디 있지?’

하늘이 캄캄해졌다. 바로 앞조차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은 검은 구름은 달빛을 모두 차단하고 코앞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어둠을 몰고 왔다.

레온이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강력한 폭풍이 번쩍거리며 금세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공자님!”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손을 뻗었다.

가린 팔 틈 사이로 눈을 떴다.

그 컴컴함 속에서도 분명히 보이는 워렌이 단번에 레온의 팔을 끌어당겼다.

“야, 미쳤어? 난 칼을 만졌다고!”

“상관없습니다.”

워렌이 조금의 고민도 없이 레온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곤 제 두툼한 전투 망토 아래 레온을 가두고 몸을 낮춰 바람과 맞섰다.

그가 온 힘을 다해야만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폭풍이었다.

레온의 어깨를 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너 진짜.”

“지금부턴 제가 소하까지 모시겠습니다.”

그때 다시 한번 강력한 폭풍이 눈앞에서 몰려왔다. 워렌이 검을 땅에 박고 레온을 더욱 끌어당겼다.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요.”

두 사람의 위로 엄청난 눈 폭풍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냉혹한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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