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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45화 (45/133)

45화

9장. 얼음 요새(4)

세상이 뒤집혔다.

눈을 뜨자마자 흔들거리는 현실을 마주한 레온이 몽롱한 정신을 되찾기 위해 두 눈을 비벼댔다.

‘뭐야… 왜 눈이 거꾸로 내리지?’

하늘 높은 곳에서부터 아주 높게 거대한 빙벽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주변을 메우는 눈 조각들도 차분히 세상을 역행했다.

가만있어 보자…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정신을 잃었던 것 때문인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그저 두 눈을 깜빡였다.

거꾸로 된 세상은 움직이고 있었다. 레온은 점점 맑아지는 정신에 제가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뭐야, 나 왜 움직이는데?

“공자님, 일어나신 겁니까?”

“아, 깜짝이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워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상치 못한 그 목소리에 레온이 발버둥 쳤다.

다시 한번 세상이 뒤집히며 푹신한 눈 바닥에 나자빠져 워렌을 마주했다.

“…뭐야. 너 지금 나 들쳐 업고 있던 거야?”

“예, 거기 가만히 있다간 죽을지도 몰라서요.”

워렌이 쓰러진 레온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날카로운 눈 결정에 피부가 좀 상하긴 했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상황 파악이 빠른 걸 보니 머리도 다친 것 같진 않다.

워렌이 손을 내밀었다. 눈 속에 푹 파묻혀 있던 레온이 그 우직한 얼굴을 바라보며 후욱, 한숨을 내뱉었다.

“야, 아무리 그래도 나를 짐짝처럼 들고 오면 어떡해. 네 체력도 아껴야지.”

“그게… 이제 짐이 공자님밖에 없어서 괜찮습니다.”

“뭐라고? 짐이 없어?”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레온은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펴봤다. 용케도 혼자서 먼 곳까지 걸어왔는지 눈 폭풍을 맞았던 곳과는 전혀 다른 주변이었다.

어느새 대륙이 끝나고 높은 설산, 아니, 빙벽이 쌓여 있는 스노우 탑 근처에 도착한 것 같았다.

“왜 짐이 없어? 잃어버린 거야?”

“그것까지 지킬 손이 없었습니다.”

이제 워렌에겐 검 한 자루가 다였다. 레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소하까지는 앞으로 며칠 더 가야 한다. 추위와 몸을 지킬 것들을 잃은 건 큰 낭패였다.

“이 근처에 빈 성터가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면 일행들을 만날 수도 있어요.”

“음… 확실히 헤어지기 전에 거기에서 보자고 하긴 했지.”

문제는 눈 폭풍을 맞은 게 두 사람뿐만 아니란 사실이었다.

정면에서부터 갑작스레 들이닥쳤으니 일행들도 고스란히 폭풍에 휘말렸을 것이다.

과연 모두 무사할지, 괜찮다면 제시간 내에 이곳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너 다쳤잖아, 워렌.”

레온이 홱 주저앉았다.

들쳐 업혀 있을 때 그의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레온이 손을 뻗어 워렌의 오른 발목을 꽉 움켜쥐었다.

“너 아프지?”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아프냐고 물었어.”

워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프다는 물음에 괜찮다는 대답이 왜 안 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말도 없는 지금 너까지 다리를 다치면 나는 기동력을 잃는 거야. 내가 너처럼 이고 지고 갈 수도 없는데 똑바로 대답하시지?”

“확실히 쉬었다 가는 게 나을… 근데 지금 저를 말 취급하시는 겁니까, 공자님?”

“넌 나 짐짝 취급했잖아.”

“예?”

워렌이 쭈그리고 앉은 공자를 내려다봤다.

아주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레온이 콧방귀를 뀌며 탁탁, 옷을 털었다.

“이제 짐은 나밖에 없다며?”

워렌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공자가 없던 말을 지어낼 리는 없으니 거짓은 아닐 것이다. 설령 그렇게 표현했다 하더라도 진심이 아니란 건 누구보다 잘 알 텐데.

한 번 더 아픈 발목을 꽉 쥐어 잡는 레온을 보며 워렌은 입만 벙끗거렸다.

“너한테 짐짝 취급당하기 싫으니까 조용히 하고 따라와. 저기라면 눈보라를 피할 수 있을 거야.”

레온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빙벽 아래로 다가갔다.

울퉁불퉁한 벽면에 제법 넓게 홈이 파여 있는 곳이라 다른 곳보다 바람을 피하기에 제격이었다.

레온이 고단한 몸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졸지에 말 취급을 당한 워렌도 느릿느릿 다친 발목에 힘을 풀고 곁으로 다가왔다.

“이리 와서 앉아.”

쓰러지듯 앉고 나니 온몸이 시렸다. 바람에 노출된 것과는 다른 차원의 추위였다. 숨만 쉬어도 이가 떨렸다.

그때 덜덜 떠는 레온을 보며 워렌이 제 망토를 벗었다.

지금 저걸 벗어 주겠다고?

두 다리 사이에 푹 고개를 파묻고 있던 레온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죽으려고 작정했어? 이 추위에 그걸 나한테 벗어주면….”

워렌은 눈만 깜빡이고 있다.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원하는 게 있는 눈치.

레온은 워렌의 손끝에 붙잡힌 제 망토 끝자락을 바라봤다.

뭐야, 뭐 하자는 건데.

“공자님, 망토 좀 벗어 주십시오.”

“…왜?”

“지금은 이렇게 하는 게 효율적입니다.”

결국 레온의 망토까지 손에 넣은 워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레온과 붙어 앉았다.

그리고 조금 더 짧고 도톰한 레온의 망토를 두 사람의 다리에 나눠 덮었다.

크기가 더 크고 넓은 워렌의 망토는 두 사람의 등을 감싸는 몫이었다.

“이렇게 하면 등 뒤에서 느껴지는 한기와 외부에서 몰아치는 바람을 모두 차단할 수 있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그럴 게 뭐가 있어. 같은 남자끼리.”

아주 주름까지 제대로 펴서 완벽하게 바람을 차단하는 워렌이었다.

“원래 전장에선 이렇게 추위를 견딥니다.”

위치를 들켜선 안 되는 전쟁터에서 추위를 버틸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지금은 불씨를 살려둘 상황이 아니니 이런 방법밖에 없습니다.”

워렌이 어깨를 감싸고 있는 망토 아래서 꼼지락거렸다.

레온이 흘끔 시선을 돌리니 뭘 하려는지 잠시 망설이는 게 보였다.

방금 전처럼 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민망한 상황을 만들까 봐 입을 다물었다.

그때 워렌이 팔을 뻗어 레온의 어깨를 감쌌다. 졸지에 그 품에 안기게 된 레온이 상황 파악을 위해 워렌을 바라봤다.

“이렇게 하면 금방 추위가 물러갈 겁니다. 전쟁터에선 이 방식이 불보다 낫습니다.”

머리 바로 위에서 들리는 음성은 레온을 뻣뻣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숨 쉬는 것조차 불편했다.

워렌이 조심스레 힘을 주어 레온을 끌어당겼다. 어깨 위에 팔 하나만 얹어두려고 이런 불편함을 자처한 게 아니다.

“지금은… 체온이 가장 따뜻할 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뭐래. 왜 자꾸….”

말할 때마다 워렌의 몸과 맞닿았다. 결국 레온은 끝까지 말을 마치지 못했다.

“…….”

“…….”

불편한 만큼 따뜻했다. 두 사람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눈 앞에 펼쳐진 새벽하늘이 점차 밝게 물들고 있었다. 곧 있으면 밤마다 몰아치는 눈 폭풍이 물러날 시간이다.

새벽과 이른 오전 사이가 되면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한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까지면 된다. 잠시만 이대로 버티면 일행들을 찾아 떠날 수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이러다 죽겠어.”

아무 말 없이 하늘만 바라보니 졸음이 쏟아졌다.

이 추위에 이런 곳에서 잠들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아무것도 못 했는데 이런 이유로 죽을 순 없잖아.

“그럼 이번엔 검술의 응용 편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미안한데, 그때 해준 기초도 기억에 하나도 안 남았거든?”

“…그 쉬운 게 말입니까?”

앞만 보던 레온이 시선을 돌렸다. 의문을 품고 있는 워렌을 보자 이 자식이 진심이란 게 느껴졌다.

“무슨 문제 있어?”

“물으시니 대답….”

“없다고 해야 할 거야.”

“없습니다. 전혀.”

레온이 워렌의 가슴팍을 손등으로 팍 쳤다. 괜히 때렸다 싶을 정도로 아팠지만 자존심에 억 소리도 내지 못했다.

“뭐, 하긴 공작가의 후계자가, 그게 아니라도 한 가문의 장남이 검술조차 배우지 않은 건 흔한 일은 아니지.”

레온이 무릎을 웅크리고 앉아 그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워렌은 복슬복슬한 모자를 쓴 레온의 뒤통수를 보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나중에 시간 나면 기초라도 알려줘.”

옷 사이에 파묻혀 웅얼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똑똑히 알아들었다.

워렌은 아무 소리라도 해야 하는 김에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했다.

“왜 배우지 않으셨습니까.”

“뭐가. 그동안 말이야?”

“예, 제가 아는 공작 저하는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멈춰 있는 것을 지켜볼 분이 전혀 아니십니다.”

“그렇긴 한데. …뭐, 아버지는 내 뜻을 억지로 꺾을 분도 아니니까.”

죽은 진짜 레온 대신 그 이름을 빌려 살기로 한 뒤로부터 루시오는 늘 제게 미안함을 품고 있었다.

“난 그냥 그걸 배울 필요가 없었던 것뿐이야.”

그때는 얼마 안 있어 운명대로 죽어줄 생각이었다.

우스운 일이었지. 죽고 사는 문제를 내 마음대로 설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그래도 지금은 아니니까. 그 누구보다 데로니스를 쳐부수고 싶으니까 살아야겠지. 그래서 내 몸 정도는 지킬 줄 알아야 하고.”

레온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다행인 일이었다.

이번 일로 깨달았다. 제가 지키려 하는 의지와 상관없이 레온이 쉽게 위험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것을.

폰네시를 떠났으니 앞으로는 같은 상황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다. 대비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도울 생각이었다.

“제가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지킬 뿐만 아니라 남도 지킬 수 있는 검을 쥐어 드리겠습니다.”

지금껏 검을 잡은 이유는 그게 전부였다.

남을 지키는 것.

레온을 지키는 것.

오직 그것만을 위해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베어왔다.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는데.”

“목적 없는 검은 그 누구도 지킬 수 없습니다. 휘두른 검 끝에 이유가 없다면 그건 단순한 살인일 뿐이니까요.”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그토록 애쓰는 게 어쩌면 버티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레온은 이 젊은 기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한 일이다. 워렌의 과거를 아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곁에 두기로 결정한 후 워렌에 대해 조사했지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었다.

“있잖아. 나 궁금한 게 있는데.”

“하명하십시오, 공자님.”

“전에 그랬지? 아버지에게 명예를 바쳤다고.”

“예, 지켜야 할 것을 지키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아버지랑은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보통 궁성 기사들이 그렇게까지 목숨을 걸고 맹세하던….”

“쉿.”

순간 워렌이 재빨리 레온의 입을 막고 몸을 감싸고 있던 망토를 머리 위까지 뒤집어썼다.

순식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레온이 망토 안에서 놀란 눈으로 워렌을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심장이 쿵쿵거렸다.

“밖에 누군가가 있습니다.”

“뭐?”

일행들은 아니었다. 그들이 이토록 조용히 접근했을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두 사람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숨죽일 때였다.

근처를 배회하던 누군가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워렌이 검집에 손을 올렸다. 여차하면 당장에라도 휘두를 찰나.

킁킁킁킁.

“…응?”

익숙한 소리가 이어졌다. 이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소리는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다.

레온이 서둘러 망토를 벗어냈다. 그러자 흰 눈 사이로 벌름거리는 새카만 코가 보였다.

“…너!”

갑작스레 레온이 나타나자 다가온 작은 짐승이 경계 어린 모습으로 털을 곤두세웠다.

레온은 그 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새빨간 스노우 울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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