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9장. 얼음 요새(5)
새끼 스노우 울프의 모습은 처참했다. 녀석은 흰 눈과 구분되지 않는 털에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나타났다.
레온이 녀석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왔던 스노우 울프가 콧잔등을 옴짝거리며 순식간에 멀어졌다.
붙잡을 수도 없을 만큼 아주 빠른 속도였다.
“어딜 다친 걸까요? 다리를 절진 않는 것 같은데.”
워렌이 떨어진 것을 주워 들고 레온의 어깨에 다시 망토를 걸쳐주었다.
레온은 눈이 불어닥치는 흐린 시야 너머로 작은 짐승의 곳곳을 살폈다.
처음 센느를 떠나던 날보다 모습이 많이 상했다. 풍성하던 새하얀 털은 여기저기 엉키고 뭉쳐 볼품없는 모양새였다.
게다가 저 피, 얼어붙은 피범벅의 외관은 인상을 찌푸리게 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어딜 다친 것 같진 않은데.’
한참 녀석을 바라보던 레온이 결론을 내렸다.
“됐어. 신경 쓸 필요 없어.”
야생성이 강한 새끼 스노우 울프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지켜봤다.
미동도 없었다. 잠시지만 익숙한 냄새에 이끌려 찾아온 것이리라.
더 이상 손 내밀 필요도 없었다. 레온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하늘을 살폈다.
“폭풍이 물러가고 있어. 곧 날씨가 잠잠해질 테니 서둘러 떠나자.”
“예, 공자님.”
고요가 시작되면 최대한 빠르게 이동해야 했다.
뒤돌아선 레온이 워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그전에 나, 검 좀 줘.”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워렌은 이미 답을 알았다. 레온의 시선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스노우 울프에게로 향했다.
“위협만 할 거야. 더 이상 내가 받아주질 않는다는 걸 알게 만들어야지.”
자꾸만 따라오니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레온이 손을 뻗었지만 워렌은 공자를 말리지 않았다.
다만 물었다.
“왜 보내려 하십니까?”
그런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레온은 저 새끼 짐승을 떠나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적어도 워렌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내 감정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불쌍하다는 찰나의 감정 때문에 더 이상 저 새끼 짐승의 운명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쟨 가족을 잃었어. 어쩌면 세상을 잃은 걸지도 모르지.”
하나뿐인 전부를 잃었으니, 의지할 곳이 필요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내가 되어선 안 된다.
단호하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새끼 스노우 울프의 눈동자는 오직 레온에게 향해 있었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넌 그 운명을 쟤가 또 겪는 게 납득이 돼?”
또다시 무언가를 잃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런 감정은 피할 수 있다면 아예 없는 게 낫다.
“아직 센느로 돌아갈 수 있어. 내가 위협한다면 더 이상 따라오지 않을 거야.”
“글쎄요. 그런 거라면 이미 늦으셨습니다.”
“뭐?”
“처음 거두신 순간부터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데려가지 않으려는 이유가 정말 그런 것뿐이라면, 레온은 이미 새끼 짐승이 겪지 않아도 될 그 시련을 이미 경험하게 하고 있었다.
워렌이 북풍 속에 홀로 버티고 있는 새끼 스노우 울프를 바라봤다.
녀석은, 그 작은 짐승은 내치려는 레온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곳까지 따라왔다.
“처음 선택한 순간 운명은 정해진 겁니다.”
눈치 보던 작디작은 짐승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시작이 있으니 반드시 끝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모든 관계가 그렇듯이요.”
“…….”
“그러니 그 끝을 몇 번이고 미리 겪게 하진 마세요.”
밀어내는 순간순간이 새끼 짐승에겐 전부를 잃는 순간이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워렌의 단호함에 레온이 한숨을 내쉴 때였다.
크르르릉.
내내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미약한 경계심이 새어 나왔다.
제 존재를 알리듯 천천히 다가오던 새끼 스노우 울프가 몇 발짝 남겨두지 않고 풀썩, 쓰러졌다. 순식간이었다.
레온과 워렌이 시선을 마주했다. 휘둥그레진 표정으로 두 사람이 서둘러 스노우 울프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마자 피 냄새가 훅 끼쳐 들었다.
“…설마.”
레온이 눈도 못 감고 정신을 잃은 새끼 스노우 울프의 몸 곳곳을 살폈다. 다친 곳은 없다. 그럼 이 피는.
“…우리가 버리고 온 말.”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이 녀석은 잿빛 반점이 온몸에 뒤덮인 그 말을 사냥한 거다.
전염병으로 오염된 사냥감을 먹었으니 몸이 성할 리 없었다.
“이 먹보!”
레온이 정신을 잃은 새끼 스노우 울프를 안아 들었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도 없었네.
“몸이 많이 차. 서둘러야겠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두 손에 쥐고 있는 녀석의 무게가 보잘것없이 너무 가벼웠다.
고요를 틈 타 두 사람이 서둘러 소하로 향하기 시작했다.
***
“자, 여러분. 우리 이제 결정해야 할 순간이 왔습니다.”
머리에 둘둘 붕대를 감은 브라운이 양반다리를 하고 일행들을 바라봤다.
“…뭘요, 브라운? 설마 두 사람을 이대로 두고 가자는 말이에요?!”
미셸이 던진 말에 케인이 헙,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곁에 앉아 있는 메리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예, 그러자는 말입니다.”
브라운이 눈가를 꾹꾹 눌렀다. 날아오는 돌무더기에 그대로 머리를 맞고 쓰러진 지도 벌써 사흘.
만나기로 한 근처 성터에서 하루가 다 지나가도록 조난당한 두 사람을 기다려 봤지만 둘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소하로 곧장 가고 있을지도 몰라요. 이 성터를 찾는 것보다 그곳으로 가는 게 더 가까웠을지도 모르고요.”
눈 폭풍에 휘말려 짐 몇 개를 잃고 난 후 일행들은 두 사람을 찾기 위해 무척이나 애써왔다.
그 무엇보다 체력을 아껴야 하는 시기에 잃을 수 없는 두 사람을 찾으려 계속해서 시간을 허비했다.
다만, 이제는 결정해야 했다.
“유모님의 몸 상태도 좋지 않고, 이대로라면 기사 케인 님의 부담감도 커지겠죠.”
“…그건….”
“사흘간 계속해서 보초를 서고 있잖아요.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브라운이 팔짱을 풀고 손을 뻗었다. 그가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케인과 메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우리라도 소하로 떠납시다. 워렌 경이 함께 있을 테니 분명히 공자님께서도 그곳에 오실 거예요.”
슥슥. 다정한 손길로 두 사람의 손을 쓰다듬는 것을 보며 미셸이 입술을 삐죽였다.
메리가 브라운의 손을 맞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리 도련님께서는 강인한 분이니 분명 별일 없을 거예요. 믿는 수밖에 없을 테지요.”
“…메리, 괜찮아요?”
“예, 해볼 수 있는 걸 다 해봤잖아요.”
메리가 제 부르튼 손끝을 바라봤다. 혹시라도 눈 속에 파묻혀 있을까 지난 시간 동안 얼마나 눈을 파헤쳤는지 모른다.
메리의 그런 고생을 알기에 일행들도 쉽사리 떠나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더 이상 결정을 미룰 순 없다.
“하루빨리 그곳에 가서 도련님이 전하려는 뜻을 이야기하는 게 낫겠어요.”
그녀의 결단에 브라운이 빙긋 미소 지었다.
“이 디카르테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방법을 꼭 찾겠습니다. 절 믿으세요.”
정말 믿음직스러운 말이었다.
브라운의 단언에 기사 케인도, 천방지축 미셸도, 인자한 메리도 모두 희망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일행들이 소하로 떠난 지 열흘 후.
“당장 저들을 잡아들여라!”
“아니! 저희 말 좀!”
“입부터 막아. 외부인과의 대화는 절대 금지야.”
며칠이나 지속된 드넓은 얼음 평야를 얼마나 걸었을까.
높게 쌓아 올린 빙벽, 얼음 요새에 도착하고 난 후 일행들은 곧장 소하의 전투원들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모두 바닥 아래까지 길게 늘어진 백색 망토를 입고 있었다.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미셸이 울먹거리며 다가오는 그들을 둘러봤다.
이래 가지곤 마리사가 누군지 알아챌 수도 없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녀를 전투원들이 거칠게 잡아끌었다.
“읍! 으읍!”
그들은 덩치 큰 케인도 단번에 제압할 만큼 움직임이 노련했다.
케인이 반항하며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일행들이 모두 꽁꽁 묶여 소하의 얼음 감옥에 갇혔다.
그곳은 미로 같았다. 한 번 갇히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것처럼 높은 빙벽으로 시야를 차단하고 복잡하게 방향이 정해졌다.
“타티아나 님의 명이 있을 때까지 너희를 이곳에 둘 것이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전투원이 거칠게 일행들을 밀어 넣었다.
그녀는 얼음으로 만든 날카로운 창을 들고 있었다.
녹지 않는 얼음.
브라운은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이 전설 속 밀라쿠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명이 떨어지면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거야.”
“…….”
“물론 죽어서.”
겁도 없이 쳐들어오다니.
그녀가 매정한 시선을 금세 거두며 감옥을 벗어났다.
찬기에 그대로 노출된 일행들만이 바닥에 엎어져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를 어쩐다.’
브라운은 가장 먼저 주변을 살폈다. 감옥의 규모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또 다른 감옥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병사들이 도착하지 않았어.’
기사 칼을 태웠던 마차와 병사 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소하까지 오는 길을 모르진 않았을 터.
탈것도 있는 상황에서 소하에 없다는 건, 이곳까지 오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브라운의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공자께서 도착한다면 분명 이곳으로 오실 거야.’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입을 막고 있는 이 천쯤이야 서로가 돕기만 한다면 금방이라도 없앨 수 있는 것이었다.
공자와 워렌을 만날 수 있다면 이후 어떻게 할지 논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도착하지 못한 것이라면.
두 사람도 병사들처럼 소하까지 도달하지 못한 것이라면 문제는 커진다.
“…으음! 음!”
케인이 꿈틀거리며 브라운에게 다가왔다. 몸통과 발목이 묶인 상태로 기어오는 그를 보며 브라운이 재빨리 몸을 뒤로 돌렸다.
손에 천이 닿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인의 몸을 옥죄고 있는 끈도 잡혔다.
이건 풀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날카로운 것이 손에 닿았다.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몬데이어 공작가의 표식이 새겨진 철 조각이었다.
“공자님께서 알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 방한 장갑에는 아주 좋은 도구가 달려 있죠.”
케인이 의기양양해 기세를 올렸다. 브라운이 철 조각을 쥐어 잡고 밧줄을 풀어주었다.
그다음부턴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케인이 가장 먼저 일행들의 입을 막고 있는 천을 빼내주었다.
“근데 저들이 다시 올 텐데, 밧줄은 그대로 감고 있는 게 낫지 않을까요?”
메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생각까지는 하지 못한 케인이 헉, 하고 브라운을 바라봤다.
브라운은 들고 있던 철 조각을 얌전히 품 안쪽에 집어넣었다.
“확실히 그렇겠군요. 우선 그들이 다시 올 때까지는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 그럼 저는요?”
“케인께선 어쩔 수 없죠. 최대한 들키지 않게 저기 구석에 쓰러져 계세요.”
다소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지자, 케인이 시뻘게진 얼굴로 황당해하고 있을 때였다.
빠른 속도로 얼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미셸이 브라운의 등 뒤에 몸을 웅크렸다.
케인도 재빨리 메리의 뒤에 커다란 몸을 숨기려 허둥지둥 발버둥 치는 순간이었다.
“미셸!”
새하얀 짐승의 두개골을 뒤집어쓴 백색 망토가 호통을 쳤다.
“…마리사?”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제 언니인 마리사의 목소리였다.
미셸이 간절한 표정으로 철창 너머를 바라봤다.
거칠게 두개골을 벗어내며 아름다운 갈색 머리칼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마리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머저리들! 피하라고 했더니 감히 여길 찾아와!?”
다소 환영받지 못하는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