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9장. 얼음 요새(6)
일행들을 내려다보는 마리사의 눈빛이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망토에 달려 있는 알 수 없는 짐승의 두개골이 스산한 분위기를 더했다.
그녀가 팔짱을 끼고 일행의 면면을 살폈다.
적의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건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죽은 자에게 의지 따윈 사치일 테니.
“…언니?”
미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마리사를 불렀다. 그녀가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고 막냇동생을 바라봤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았던 꼬마 아이가 어느덧 다 큰 아가씨의 모습으로 8년 만에 나타났다. 비록 원한 재회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여긴 왜 온 거지?”
“언니가 보내준 서신을 확인했어. …폰네시에 쳐들어온 데로니스 세력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그래, 그 일로 온 대륙이 떠들썩해. 상관없는 우리까지 휘말리게 될까 타티아나 님께서 무척이나 진노하셨지.”
소하는 태초부터 인간들과 상관없는 설인의 세상이다.
인간들이 대륙을 갖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목숨을 앗아가는 것 따윈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마리사가 시선을 낮추었다. 허리를 바짝 굽혀 엎어진 미셸과 두 눈을 맞추고 으르렁거렸다.
“그러니까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든, 아무것도 요구하지 마.”
“…….”
“살고 싶다면 닥치고 있으란 소리야. 내 말 알아들어?”
미셸은 마리사의 진한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센느에서도 늘 이런 식이었다. 언니들과 오라비들은 늦게 태어난 저를 늘 귀찮아하기만 했다.
“마리사.”
모든 일의 길을 정해두고 제게는 기회 따윈 주지 않았다. 방향도, 목적도. 해야 할 이유가 있음에도 그저 따르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 어린 날의 꼬마가 아니다.
미셸의 표정이 독하게 변했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세우고 철창까지 기어갔다.
그 틈에 고개를 바짝 들이밀고 마리사를 노려봤다.
“히스 토바가 아버지를 죽였어.”
“…뭐?”
“그리고 그 전엔 작은오라버니를 죽였지. 사냥 연습을 하다가 제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
“그래서 여기 이들이, 그리고 아버지가 지키려 했던 레온이 히스 그 개자식을 죽이고 우리 센느를 지켜줬어.”
미셸이 어깨로 쾅! 철창을 들이받았다. 가까이서 그런 동생을 바라보는 마리사의 두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러니까 나는 보답을 해야 해! 언니는 버리고 떠났지만, 나와 어머니, 덴에게는 유일한 우리 센느를 지켜준 이 사람들에게 뭐라도 갚아야 한다고!”
고문을 하든지 죽이든지 그딴 건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미셸이 가장 두려운 건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이곳을 찾아온 게 무의미해지는 일이었다.
그 폭풍을 뚫고, 모든 걸 걸고 이곳까지 왔는데 대화조차 해보지 못하고 떠날 순 없다.
“그러니까 언니가 도와.”
“…….”
“적어도 마리사 토바라면 그래야 할 거야. …우리 가족을 위해.”
이 호소가 통하길 바라며.
미셸의 날카로운 눈매가 금세 눈물로 글썽거렸다.
***
요새를 지키고 있는 소하의 전투원들이 서로 소식을 전했다.
녹지 않는 얼음의 땅을 건너온 외부인들이 붙잡혀 트랩에 갇혀 있다는 소식이었다.
“되돌려 보낼까?”
“글쎄, 그렇게 되면 비밀을 들키게 되잖아.”
“하지만 중요한 인물들이라던데.”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설인의 후예들을 제외하고, 소하를 찾은 외부인들은 모두 죽어서 요새를 떠났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이든 소하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이 안전한 요새를 지키기 위해선 세상과 단절될 필요가 있었다.
“뭐… 타티아나 님이 알아서 결정하시겠지.”
“근데 그 소식 들었어?”
붉은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한 전투원이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아주 은밀한 모습으로 곁에 서 있는 짧은 머리의 전투원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뜻이었다. 조심하는 모습에 그녀도 숨죽이고 다가갔다.
“며칠 전부터… 타티아나 님을 본 사람들이 아무도 없대.”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모두 예상하길 티나 님께서….”
“뭣들 하고 있어?!”
헙!
등 뒤에서 마리사의 신경질적인 호통이 이어졌다.
두 사람이 재빨리 간격을 유지하며 요새 밖을 살피기 시작했다.
“경계 중에 잡담을 하다니. 너희가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외부인이 이곳을 찾아왔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마리사 님.”
할 말이 없었다. 눈 폭풍 따위에 시야가 막혔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전투원들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제 역할을 마치기 위해 꼼짝도 않고 바깥을 바라봤다.
마리사가 한참이나 그곳에 서 있다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이 소하의 주인 타티아나와 그녀를 보필하는 티나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젠장, 찾아가질 말았어야 했는데.’
외부인이 이곳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떠오른 건 제 가족들의 얼굴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서신을 날렸으니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요새 외곽을 돌며 경계를 서던 마리사는 외부인이 잡혔단 말을 듣자마자 곧장 달려왔다.
그리고 그들을 가둬두는 얼음 감옥, 트랩에 찾아갔을 때 보이는 미셸의 얼굴을 보곤 머리끝까지 화가 차올랐다.
‘도대체… 도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소하는 외부인을 용납하지 않는다. 남녀를 불문하고 꿈꾸지 않은 이들은 모두 죽어야만 나갈 수 있다.
그래서 끔찍했다. 제 손으로 불러들인 가족을 결국 목 졸라 죽여야 할까 봐.
제가 만든 상황에 동생이 죽어버릴까 싶어 이 상황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티나 님, 접니다. 마리사.”
그래서 왔다. 부탁해 볼 수 있는 게 무엇일지 모르겠지만 무작정 그녀들을 찾아왔다.
거대한 짐승 가죽으로 가려진 장막이 걷히자, 그 안에서 백색 망토로 얼굴을 가린 한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키가 훌쩍 큰 마리사에 비해 반절밖에 되지 않는 작디작은 모습이었다.
“뭐지? 보고 없이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티나는 타티아나를 모시는 자였다. 이 소하의 주인이자 지배자인 타티아나가 신임하는 만큼 이곳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다.
“죄송합니다. 중요한 일이라 직접 말씀드려야 했습니다.”
“뭐, 외부인 무리 중에 네 가족이 섞여 있다는 일?”
“…그걸 어떻게.”
“타티아나 님이 모르는 게 있을 것 같아?”
티나가 한참 동안 마리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마리사의 입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거짓말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곳에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들킨 이상 신뢰는 사라진다.
바라는 간절함이 그저 개인적인 일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들어와.”
걱정과 달리 티나가 다시 안으로 들어섰다.
홀로 남은 마리사가 재빨리 그녀를 뒤따랐다.
진한 약초 냄새가 진동을 하는 내부는 마치 폭풍이 내려앉은 것처럼 코앞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캐했다.
마리사가 재빨리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리고 기침을 참았다.
티나는 익숙한 듯 마련된 소파에 앉아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아직까지 너를 살려둔 건 네가 이곳을 나만큼이나 끔찍이 아끼기 때문이야.”
마리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리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외부인을 척살하고, 이곳을 지키려 노력했지.”
하지만 그것도 이젠 지난 일이 되어버렸다.
“며칠 전에 내 전서조를 데려갔지? 그동안 가족들과 소식을 나누고 있었던 건가, 마리사?”
“아닙니다! 제 가족은 오직 이곳에 있는 소하의 전투원들뿐입니다.”
“근데 왜! 대체 왜 외부와 연락을 취한 거지?! 어째서!”
티나가 벌떡 일어났다.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마리사가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올려다본 그녀의 두 눈동자는 새빨갛게 핏발이 터지고 열이 올라 있었다.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 간청드리러 온 게 아닙니다.”
티나가 코웃음을 쳤다.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식으로 뒤돌자 마리사가 다급히 정보를 쏟아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곧 폰네시의 후계자가 이곳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폰네시의 후계자? …레온 몬데이어를 말하는 건가?”
“예, 그자는 아주 중요한 잡니다. 그간 죽였던 외부인들과 똑같이 대해선 안 됩니다.”
“웃기지도 않네. 어째서 그자가 중요하지? 그깟 폰네시, 이미 사라지고 없는 영토의 후계자 같은 게 대체 뭐라고.”
마리사가 소매 안쪽에서 정보지를 꺼내 들었다.
정찰단이 조사해 온 중요한 소식이었다.
“데로니스 쪽에서 생포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정보지를 건넸다.
티나가 서신에 적힌 내용들을 자세히 살폈다.
“죽이기 위해 찾는 게 아닙니다. 분명 그자가 무언가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러니 우리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의미 없는 무력 낭비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곳을 독립된 영역으로 유지하기 위해 그간 희생된 전투원들이 몇 명인지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이미 서대륙의 판도는 데로니스 왕조에게 넘어갔다. 이곳에 머무르는 이상 결국 그들과 대적해야 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레온 몬데이어를 조건으로 거래하면 됩니다. 그러니 그자가 나타날 때까지 일행들을….”
“뭐, 보호라도 하자고?”
마리사의 등 뒤로 땀이 주륵, 흘렀다. 이 몰아치는 혹한 가운데 온몸이 타버릴 것 같은 느낌은 처음이었다.
티나가 무심한 표정으로 정보지를 구겼다. 볼품없이 발아래 떨어져 내린 그 종이를 보며 마리사의 입꼬리가 잘게 떨렸다.
“헛소리하지 마. 설인은 외부인들과 거래 따위는 안 해.”
데로니스 왕조가 아니라 다른 누가 이곳을 빼앗으려 한다 해도 소하를 지켜내는 게 제가 할 일이었다.
티나의 냉담한 반응에 마리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였다.
“…….”
쿵. 쿵.
깊은 안쪽에서부터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티나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설마, 정신을 차리신 건가?
매캐한 연기 사이를 가르며 백발이 성성한 타티아나가 나타났다.
티나가 재빨리 마리사의 눈을 가렸다.
“…타, 타티아나 님.”
그녀의 모습을 직접 보는 건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티나의 손끝이 차가운 게 모두 느껴졌다. 마리사가 긴장된 상태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
발아래까지 길게 늘어진 백발은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처럼 상해 있었다.
온몸의 붉은빛은 사라졌으며, 그녀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게 죽음과 가까운 모습이었다.
늙은 노인의 모습을 한 타티아나가 천천히 다가와 티나를 바라봤다. 그러곤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다.”
“…예?”
“라…셨…다, 티나.”
그녀의 목소리는 듣기 싫은 쇳조각을 여러 개 지르밟는 것 같은 소리와 비슷했다.
티나가 다급하게 외치는 그녀의 입 모양을 자세히 살폈다.
몇 번이고 무어라 말하는 타티아나가 티나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말도 안 돼.”
비로소 그녀가 전하는 뜻을 알았다. 티나의 두 눈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밀라쿠.”
“예…?”
“…밀라쿠께서 오셨다. 지금 우리 소하에.”
알아들은 티나를 보며 타티아나가 겨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