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48화 (48/133)

48화

10장. 태초의 설인(1)

불행을 꿈꾸는 취미 같은 건 없다. 오히려 역경을 극복하고 고난을 이겨내는 데서 얻는 성취감 따위를 이해 못 하는 부류와 더 가깝다.

어려움 없이 일이 흘러가 주기만 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어, 그러니까. 아무도… 아니, 아무 반응도 없는 게 말이 돼?”

이건 경우가 다르다. 외부 침입자 취급을 받으며 목숨이 위태로운 줄 알았더니, 이건 뭐.

소하의 요새 입구는 잠잠하기만 했다. 지나가는 생명체라곤 아직 명명되지 못한 미세한 무언가쯤 될까.

“무슨 작정이지?”

레온과 워렌, 두 사람은 소하에 도착한 직후부터 벌써 몇 시간째 이곳에 방치되어 있었다.

고요가 지나가고 폭풍이 물들기 직전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었다.

레온이 끝도 없이 높게 쌓여 있는 빙벽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켜보고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으니 이쪽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전혀 없었다.

“워렌, 너 이런 건 못 베?”

레온이 고심하다 물었다. 흘러내린 후드를 겨우 정돈한 워렌이 진지하게 정문의 높이를 가늠했다.

“음.”

칼을 박아 요새 위까지 올라가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나 이곳에선 문의 두께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다.

차라리 뛰어올라 뒤편에 있는 인물들을 모두 처리하고 정문을 열어젖히는 게 빠를 것 같았다.

“내부로 진입은 가능합니다.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

“그래?”

레온의 눈이 반짝였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듣기 좋은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못 갑니다. 공자님을 혼자 두곤 아무것도 안 합니다.”

“으음.”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은 이곳에서 레온을 혼자 두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다.

끙, 인상을 찌푸릴 뿐 레온도 더는 고집부리지 않았다. 뼈저린 실수는 한 번이면 족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일행들이 도착하지 못한 걸까요?”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이곳까지 오는 길에 칼과 일행들의 마차 잔해를 발견했다. 처참하게 부서져 불타 있었으니 쓰러진 칼을 데리고 이곳까지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전염이 쉬운 정체불명의 병이다. 내내 칼과 붙어 있던 병사 둘의 상태가 괜찮으리란 보장 역시 없었다.

메리와 브라운의 소식도 알 수 없다. 미리 도착해서 저곳에 있는 건지, 그래서 꿍꿍이가 있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뭐가 됐든, 지금은 좀 나오라고….”

감정이 담긴 레온의 목소리에 워렌이 흘긋, 망토를 들어 안쪽에 안겨 있는 작은 스노우 울프를 살폈다.

새하얀 털에 흰색 잿빛 반점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형형한 푸른 눈동자는 힘없이 외까풀 안에 갇힌 지 오래였다.

“공자님, 실례지만 무게가 어느 정도 나가십니까?”

“…무슨 무게. 내 몸무게?”

이대로라면 서둘러 달려온 보람이 의미 없이 지나갈지도 모른다.

워렌이 깊게 고심하며 빙벽 위와 레온을 번갈아 봤다. 무슨 상상을 하는지 딱 봐도 알겠다.

“뭐야, 진짜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공자님.”

“그렇다고 나까지 이고 저길 오르겠다고?”

“공자께서 저처럼 빙벽을 오를 수 있을 거라 믿지 않습니다.”

“맞긴 한데, 이게 진짜.”

점차 눈발이 굵어지고 있다. 투명했던 어두운 하늘엔 먹구름이 몰려와 눈앞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이제 곧 폭풍이 몰려올 시간이다. 새끼 스노우 울프의 상태도 물론이고, 이대로라면 오랜 시간을 바깥에 머물렀던 두 사람도 위험했다.

“어쩔 수 없지.”

내키진 않지만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 수모는 평생 체력 단련 안 해본 제가 자처한 일이었다.

레온이 워렌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워렌이 팔을 뻗었다.

끼이이이이익.

그때 철옹성처럼 꼼짝 않고 버티고 있던 거대한 문이 소름 끼치는 소음과 함께 열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쌓여 있던 눈들이 먼지처럼 시야를 흐트러뜨렸다.

워렌이 뻗은 손 그대로 레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앞에 누군가가 있다. 두 사람이 정체를 살피기 위해 인상을 찌푸렸다.

“어서 오세요.”

백색 망토를 땅 끝까지 길게 늘어뜨린 인물이 천천히 다가왔다.

청아한 음색이었다. 만난 곳이 이곳이고, 상황이 이런 식만 아니었다면 계속 듣고 싶을 만큼.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온보다도 작은 인물이 워렌의 앞에 멈추어 섰다.

그녀가 머무르자 짙게 내려앉은 잔 눈이 걷히고 그 뒤의 펼쳐진 상황이 파악됐다.

수백 명의 전투원들이 녹지 않는 얼음의 창을 들고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이.

“오늘이 오기만을 평생 기다려 왔습니다.”

그들이 동시에 창끝으로 얼음 바닥을 내려쳤다.

천둥처럼 몰아치는 그 강렬한 소리가 두 사람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환영합니다, 밀라쿠 님.”

정말이지 온몸에 소름이 돋게 하는 위협적인 환영이었다.

***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브라운은 티 내지 않기로 했다.

트랩에 붙잡혀 있던 일행들은 갇힌 지 하루도 되지 않아 따뜻한 숙소를 제공받았다.

“도대체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래요?”

모두 워렌과 레온이 이곳을 찾은 직후의 이야기였다.

“두 분이 정말 도착하긴 한 걸까요?”

“마리사는 그런 걸로 쓸데없이 떠들지 않아요. 조금 재수 없긴 하지만 적어도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니까.”

케인의 질문에 미셸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그녀는 옆으로 길게 누워 푹신한 털가죽에 몸을 묻고 추위를 녹이는 중이었다.

아주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나저나 여기도 얼음 속인데 진짜 따뜻하네요. 역시 바람이 안 불어서 그런가?”

걱정은 금세 잊은 듯 미셸이 냉큼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빙벽을 든든하게 쌓아 바람을 완전히 차단한 곳이었다.

소하인들의 주 거주지로 얼음굴이라 불리는데, 빙벽 내부에 거대한 동물의 뼈로 터를 세우고, 그 위에 모포를 덮어씌운 일종의 이중 보온으로 효과를 극대화시킨 집이었다.

“마리사가 왔다고 했으니 사실일 겁니다. 무사히 도착하신 건 반길 만한 일이지만 어째서 태도가 달라진 건지는… 마냥 좋아할 수가 없네요. 무슨 꿍꿍이지.”

비교적 가볍게 상황을 즐기던 케인과 미셸이 미소를 거두었다.

브라운은 생각이 깊었다. 소하에서 또 레온을 인질로 잡고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거라면 이는 일종의 미끼란 소리였다.

“우리를 안심시켜 놓고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겠네요. 공자님께 우리의 안위를 담보로 뭔가를 협박할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마리사는….”

그녀를 두둔하려던 미셸이 입을 다물었다. 마리사가 그럴 리 없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녀는 뼛속까지 소하인이다. 이제 더는 센느의 장녀도, 토바 가문의 영애도 아니란 뜻이었다.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적.

낯설고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 바로 자신과 이름을 나눠 쓰는 언니가 속한 곳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게 걱정만 하는 것도 안 될 일입니다.”

“예?”

“공자님과 워렌 경이 무사히 도착했으니 앞으로 벌어질 일 같은 건 함께 깨부수면 되는 거죠. 전투력이라면 저도 뒤지지 않습니다.”

늘 헤실거리던 케인이 오랜만에 진지하게 코를 훔쳤다.

폰네시의 둘도 없는 비검이 워렌 라일리라면, 자신은 루시오의 뒤를 지키는 최후의 짱돌 정도는 됐다.

“누가 뭐래도 공자님을 지킬 이유는 충분하니까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찾으러 가면 됩니다.”

“근데 저 수많은 감시는 어떻게 뚫고요?”

분위기 깨는 소리였지만 가만 듣고 있는 미셸이 질문했다. 지키는 것도 좋고, 찾으러 가는 것도 다 좋은데 너무 위험한 발상이었다.

아무 말썽도 일으키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도움 되는 일 아닐까?

“그건 제게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뭔데요, 케인?”

“우리 중 하나가 난동을 부리는 겁니다.”

“…난동이요?”

“얼음 굴을 깨부수든, 과실주를 먹고 행패를 부리든 시선이 그쪽으로 쏠리면 나머지 사람들이 두 분과 합류하는 거죠.”

“합류하고 나면… 난동을 부린 그 사람은요?”

“그땐 일행들이 구해줄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미셸.”

“예에?! 왜 내가! 어째서 일이 그렇게 되는 건데요?”

“미셸은 그래도 이곳에 가족이 있지 않습니까? 만약 인질로 붙잡혀야 한다면 가장 적임자 아니겠냐고요.”

“아니!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됩니까!”

두 사람이 동시에 브라운을 바라봤다. 팔짱을 끼고 대화를 경청하던 브라운이 잔뜩 성난 표정의 두 사람을 마주하며 고개를 저었다.

“두 분 다 고민하실 필요 없습니다.”

“왜! 브라운도 케인 말이 맞다 이거예요?”

“아님 제가 생각한 작전이 가치 없다 여기시는 겁니까?”

“둘 다 아닌데요.”

브라운이 심오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고개를 젓다가 이내 미소 지었다. 그러곤 곧은 손가락을 펴 뒤쪽을 가리켰다.

“저기, 두 분이 오시니 말입니다.”

“헉! 레온 공자!”

“고, 공자니이임!”

장막이 열리며 워렌과 레온이 나타났다. 케인이 비명과 같은 소란을 내지르며 레온에게 달려갔다. 어찌나 걱정했는지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지켜보던 브라운도 몸을 일으켰다. 표현이 마음보다 부족해선 안 되는 법이다. 그도 양팔을 활짝 벌려 두 사람을 맞이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만. 밀라쿠 님에게서 떨어져라, 외부인.”

두 사람 뒤에 가려져 있던 마리사가 날카로운 얼음 창으로 워렌과 브라운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졸지에 창으로 위협당한 브라운이 제자리에 멈추며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뭐라고?

“밀라쿠요? …누가?”

“응, 쟤가.”

거대한 늑대개 같은 케인을 밀어내며 레온이 대신 대답했다.

“밀라쿠 님이래. 소하인들이 평생을 기다려 온.”

“예에?”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어차피 설명이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레온이 워렌의 곁에 딱 붙은 마리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필요한 순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잘된 일이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온전히 모여 있는 제 일행들을 보며 레온은 안도했다.

“겨우 만났네.”

추위에 곤해 잠든 메리부터 투닥거리는 케인과 미셸, 그리고 울 것처럼 글썽거리는 브라운까지 모두 보고 나니 이제야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참.”

이제는 빼놓을 수 없는 놈도 하나 생겼다.

레온이 잠든 메리의 품에 색색, 숨을 내쉬고 있는 아기 스노우 울프를 내려두었다.

일행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이 레온과 워렌 두 사람 사이를 빠르게 오가기 시작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갈 테니 편히 쉬십시오, 밀라쿠 님.”

“…….”

“잘 자라, 미셸.”

마리사가 다소 무뚝뚝하게 인사를 건네고 공간을 벗어났다.

낯선 이가 떠나고 나자 케인이 성큼성큼 워렌에게 다가갔다.

왜 갑자기 다른 이름으로, 그것도 이 북부의 신적인 존재로 전해져 오는 밀라쿠가 된 건지 설명이 필요했다.

“당신! 진짜 밀라쿠는 아니죠?”

“그럴 리가.”

“게다가 이 새끼 스노우 울프는 또 어떻게 된 건데요?”

이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무뚝뚝한 기사보다는 냉정한 공자가 더 적임자 같았다.

결국 모든 일행이 레온을 돌아봤다.

“별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모여든 일행이 꿀꺽, 침을 삼키고 경청했다.

레온은 그들을 보며 여섯 시간 전 겪었던 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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