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10장. 태초의 설인(2)
“밀라쿠 님, 저희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대지를 울리는 강한 진동이 한참 이어진 후 그들의 대표로 보이는 작은 여성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다른 이들과 같이 백색 망토를 길게 늘어뜨렸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뭐지, 이 느낌은?’
그녀가 앞에 나타나자마자 온몸의 세포가 모두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이에게서 느껴지는 의아한 기운에 레온이 인상을 찌푸릴 때였다.
“밀라쿠 님을 보호하고 안쪽으로 모셔라.”
“예!”
그 명령에 뒤편에 서 있던 수십의 전투원들이 워렌에게 다가왔다.
워렌이 검을 쥐기 위해 레온에게 새끼 짐승을 건넸다. 그가 전투 자세를 취하자 다가오던 이들이 멈칫했다.
“경계하실 것 없습니다, 밀라쿠 님. 저희는 당신을 평생 기다려 왔습니다.”
순간 뒤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야가 흐린 사이에 전투원들이 등 뒤로 접근해 레온에게 창을 겨누었다.
명백히 한 사람만을 위협하는 태도였다.
“가셔야 합니다, 밀라쿠 님.”
근데 아까부터 진짜.
“야.”
레온이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워렌의 손목을 붙잡았다.
“너 아까부터 평생을 기다려 왔다, 경계할 필요 없다 그딴 식으로 말만 착한 척하는데.”
레온이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쥐었다. 끌면 끄는 대로 다가오는 워렌을 가까이 두고서야 마주한 전부가 레온에게 시선을 주었다.
“밀라쿠고 뭐고, 중요한 존재라면 마땅히 그렇게 대해. 원치 않는 사람한테 협박이나 해가면서 비겁하게 굴지 말고.”
일방적으로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쏟아내더니 상대방을 압박하는 태도는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게 소중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인가?”
레온은 은근슬쩍 워렌을 방패막이로 이용했다.
곧장 뒤편에서 겨누고 있던 얼음 창이 거두어졌다.
레온의 일침에 꼬마, 아니, 티나가 주먹을 꽉 쥐었다.
“…….”
저자를 데려가야 한다. 저 연한 금발머리의 푸른 눈, 타티아나가 밀라쿠라 칭한 존재를 반드시 데려가야 했다.
자신은 따르는 존재이다. 무언가를 판단하거나 이끄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타티아나의 명을 따르는.
다만 강제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강압적인 태도는 일을 그르치기만 한다.
“결례를 용서 구합니다. 죄송합니다, 밀라쿠 님.”
“나는 폰네시의 워렌 라일리다. 내게 용건이 있다면 내 요구부터 들어주길 부탁하지.”
그가 무얼 요구할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결국 티나가 물러났다.
“좋습니다.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티나가 주변에 서 있는 전투원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협하던 전부가 곧장 레온과 워렌을 보호하듯 주변을 감쌌다.
“이만 가시죠.”
요구를 들어주었으니 더 이상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다. 두 사람이 티나를 뒤따라 얼음 요새 안으로 들어섰다.
“너, 그런 거래씩이나 다 하고.”
“이래 봬도 엔드해를 따라 5년을 항해했습니다.”
“뱃사람처럼 계산적이다, 이거야?”
“그럴 필요까진 없었습니다. 말보다 검이 빠릅니다.”
“어련하시겠어.”
항상 돌려 말하는 법은 전혀 모를 것처럼 굴더니 상황에 따라 기민하게 굴 줄도 알았다.
레온은 워렌과 함께 소하의 심처로 이동하며 이곳 얼음 요새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했다.
높게 쌓인 요새 안에 작은 반구를 뒤집어 놓은 모양의 거처가 있고, 그것들은 밖에서부터 안쪽으로 갈수록 크기가 커졌다.
그리고 요새의 정문부터 후문까지 넓게 이어진 이곳의 유일한 길은 단 한군데, 가장 가운데에 위치한 심처를 관통하고 있었다.
“이곳입니다.”
티나와 전투원들이 그곳에 멈추어 섰다. 두 사람이 발걸음을 옮겼다.
티나가 곧장 얼음 창을 들어 레온의 앞을 막아섰다.
“당신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곳엔 소하의 주인인 타티아나가 있다. 그녀가 부르지 않은 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게 원칙이다.
워렌이 티나의 얼음 창을 움켜쥐었다. 레온을 가로막던 단단한 창이 단번에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워렌이 티나를 노려보았다. 그 누구도 멋대로 공자를 건들 순 없다.
“건들지 마라.”
“요구 조건이 통하는 건 당신이 협조하는 순간에 한해섭니다.”
“협박하는 건가?”
“요구하는 거죠, 저 역시.”
티나가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가슴 안쪽이 갑갑했다.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기운이었다.
“그만들 해.”
레온이 서둘러 워렌의 등을 떠밀었다. 지금은 다른 그 무엇보다 이 불편한 느낌이 가장 힘들었다.
“다녀와, 워렌.”
한참을 고민하던 워렌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거대한 반구 형태의 얼음 굴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레온이 내내 막혀 있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후우….”
도대체 이게 무슨 느낌이야.
티나가 분노한 순간부터 무언가가 심장을 강력하게 옥죄는 기분이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갑갑함에 목 안쪽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밀려들었다.
레온이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정리할 때였다.
“레온 몬데이어?”
뒤편에서 백색 망토를 늘어뜨린 장골의 여성이 다가왔다. 후드에 달린 뼈 장식을 보아하니 일반 전투원들과는 위치가 다른 인물 같았다.
레온이 저를 불러 세운 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갤 돌렸다.
그녀가 천천히 다가와 후드를 벗어낸 순간.
“…덴?”
익숙한 얼굴에 레온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투명한 피부 위에 알알이 박힌 주근깨와 얇은 눈썹, 두드러진 앞니가 머리만 긴 덴과 똑 닮았다.
“…초면에 실례군.”
“아, 너무 닮아서 나도 모르게 그만. …미안, 사과하지.”
머리를 쓸어 올린 그녀가 잠시 본분을 잊고 레온을 노려봤다. 다만 이쪽에선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생김새였다. 너무 똑같잖아.
여전히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던 레온이 정신을 되찾았다. 그러곤 손을 내밀었다.
“마리사 토바, 정식으로 결례를 사과하지.”
“…뭐. 가족끼리 닮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사과는 받아주겠어.”
상처라고 칭할 수도 없었다. 마리사가 가볍게 그 손을 맞잡고 성의 없이 팔을 흔들었다.
“미안한 김에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그래, 좋아. 실례했으니 실수를 되갚지.”
“혹시 품에 안고 있는 게 스노우 울프가 맞나? 분명 제대로 본 것 같은데.”
레온은 대답하지 못했지만 마리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센느에서 본 적이 있지. 그 짐승은 절대 길들일 수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소하에 오며 센느의 것을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작디작은 스노우 울프를 본 순간 묻어둔 기억들이 모두 밀려들었다.
마리사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레온의 망토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 안에 숨겨놓은 새끼 스노우 울프를 확인하고 싶단 표정이었다.
“근데 정말 스노우 울프 맞아? 얼룩이 있던데.”
“페, 페페?”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마리사가 당황한 듯 거대한 덩치로 레온을 가려주었다.
페페라 불린 여성이 마리사의 주변을 기웃거렸다.
장담하건대 그건 일반 스노우 울프가 아니었다. 털 군데군데에 또 다른 특성이 분명 보였기 때문이다.
“설호 아니야? 스노우 울프가 그렇게 무늬가 있을 리가 없잖아.”
“뭐? 방금 뭐라 그랬어? 네가 설호를 알아?”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레온이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설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다니.
놀라웠다. 낯선 땅에서 인어의 기억과 같은 기억을 지닌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야, 들은 적이 있지. 설호족은 우리 설인과 가장 가까운 종족이니까. 모를 수가 없지 않나?”
반면 마리사는 처음 듣는 듯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페페라 불린 전투원이 활짝 웃으며 레온에게 다가갔다.
설호족은 멸종했다고 들었는데. 말도 안 되는 보물을 찾은 것 같았다.
“잠깐 볼 수 있을까? 정말 만나보고 싶었단 말이야!”
레온이 뜨뜻하게 열이 오른 것 같은 새끼 스노우 울프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느껴지는 흰 털은 거칠고 빳빳했다. 확실히 부드럽기만 한 스노우 울프의 털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 먹보 말썽쟁이는 본인 스스로도 설호와 스노우 울프의 피가 섞인 존재라고 소개했었다.
어쩌면 이 녀석을 낫게 할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설호족에 대해 알고 있는 자는 흔치 않았다.
“좋아.”
잠시간 고민했던 레온이 천천히 망토를 내렸다.
레온의 품에 푹 안긴 새끼 스노우 울프는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잿빛 반점은 처음보다 더욱 진해져 있었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진 마. 이 녀석 알 수 없는 병을….”
“맞네! 이 잿빛 무늬 보이지? 이건 확실히 설호의 특성이야. 음… 생김새로 보아하니 스노우 울프와도 피가 섞인 것 같은데?”
“뭐, 정말? 그럴 수가 있긴 해?”
“뭘 물어보는 거야, 마리사? 두 종족이 혼혈인 게 궁금한 거야, 그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설호와 스노우 울프가….”
“야!”
마리사가 페페의 뒤통수를 심하게 내려쳤다. 그러자 페페가 두 눈을 부라리며 마리사에게 턱을 치켜들었다.
“잠깐만!”
레온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지금 레온에게 다른 건 안중에도 없었다.
“이 무늬가 설호의 특성이라고?”
“그래, 잿빛 원형 무늬. 그리고 이 이마에 또렷한 세로 줄무늬. 이건 완벽한 설호의 특성이잖아.”
“…병이 아니야?”
“뭐?”
“병이 아니냐고. 이 잿빛 반점.”
정말 별걸 다 물어보네. 페페가 허리에 팔을 얹었다.
몇 번을 설명해줘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특성은 설호의 성장기에 나타나는 특성이었다.
“에이씨, 그럼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 건데?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당연히 아프지. 설호족이 성장할 땐 온몸에 얼음의 기운이 돌아다닌다고. 몸을 이루는 피가 세포 하나부터 다 얼어붙는데 안 아프겠어?”
설호족에 대한 정보는 바닷속에도 자세히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따위는 인어족이었던 레온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뭐… 일단은 안심인가.’
레온이 품에 안긴 새끼 스노우 울프를 바라봤다.
듣고 보니 처음 안아 들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묵직해진 느낌이다.
너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이거지?
“됐어, 그럼.”
병 걸린 말을 잘못 뜯어먹고 아픈 게 아니라니. 하마터면 정신 못 차리는 먹보로 오해할 뻔했다.
레온이 짧게 미소 지을 때였다. 사라졌던 워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엔 티나도 함께였다.
마리사를 비롯한 전투원들 모두가 다시 정면만을 바라보며 표정을 굳혔다.
정말이지 숨 막히는 분위기군.
“밀라쿠 님, 조만간 다시 찾아가겠습니다. 먼 여정에 힘드셨을 테니 오늘은 이만 쉬세요.”
워렌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늘 그렇듯 레온을 바라보고 섰다.
평소와 다름없이 다른 건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마리사, 밀라쿠 님을 일행께 안내해 드려라.”
“예.”
명을 마친 티나가 지체 없이 뒤돌았다. 그녀의 시선은 마지막까지 레온에게 닿아 있었다.
‘윽!’
레온은 그녀가 뒤도는 순간 다시 한번 누군가가 가슴을 옥죄는 느낌에 두 주먹을 움켜쥐어야만 했다.
‘이게 대체… 무슨 느낌이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레온이 사라진 티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