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50화 (50/133)

50화

10장. 태초의 설인(3)

한기는 막지 못했지만 바람 없이 잠드는 따뜻한 밤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푹신한 모포에 몸을 뉘이고 편안히 잠들 수 있는 게 이토록 축복이라니.

레온은 누군가가 제 머리를 쓸어주는 그 부드러운 느낌에 가만히 눈을 감고 몸을 맡겼다.

‘뭐야… 점점 거칠어지는데?’

은백색 머리칼을 가르고 천천히 넘겨주던 손길이 점차 거세게 돌변했다.

뿐만 아니다. 그것도 모자라 부드럽게 퍼져나간 머리칼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레온은 별안간 느껴지는 위협에 번쩍, 두 눈을 떴다.

“이놈! 이게 무슨 짓이야!”

크르르릉.

두고 보던 메리가 앙앙거리는 새끼 스노우 울프를 황급히 떼어냈다.

평소와 달리 현저히 둔해진 그 새끼 짐승이 마지막까지 레온에게 달라붙어 머리칼을 뜯어댔다.

“쟤 살았어?”

“예, 도련님. 보시다시피 아주 힘이 넘치네요.”

잠기운에 잘 떠지지 않는 한쪽 눈을 뜬 레온이 힐끔, 새끼 스노우 울프를 바라봤다.

콧잔등을 찌푸리며 되지도 않는 위협으로 으르렁거리는 게 살아나긴 한 모양이다.

“뭐가 불만이라 덤비는데.”

그르르!

머리칼이 축축했다. 열심히 손질을 해주다가 분에 못 이겨 손을 본 모양이다.

레온이 모포 밑으로 기어들어 가는 그 두툼한 꼬랑지를 보다 겨우 몸을 일으켰다.

“메리, 오랜만이야.”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레온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미소 지으며 메리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결국 레온에게 다가왔다.

응석 부리는 모습은 흔치 않았지만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마음은 이쪽이 더욱 진했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잠자리는 편안하셨어요?”

“응, 메리도 한참을 자던데.”

“늙은이 체력이 그렇지요. 덕분에 아침에 무척 놀랐답니다. 이 새끼 짐승 일은 어찌 된 거예요?”

메리가 잠자리 정돈을 제쳐두고 레온에게 물었다.

“밤새 아주 뜨끈뜨끈하던걸요. 이 녀석, 어디가 아픈 거예요?”

“크고 있는 거래. 다치거나 탈이 난 건 아니고.”

“다행이네요. 챙겨주질 못해서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센느를 떠날 때부터 메리는 새끼 스노우 울프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해 왔다.

거친 날씨에 버틸 수 있을지 걱정만 앞섰지만, 레온이 반대하니 몰래 음식을 던져두고 떠나는 정도밖에 신경 쓸 수 없었다.

레온도 그걸 알았다. 메리가 떠날 때마다 새끼 짐승의 몫으로 방한 가죽 몇 개와 먹을 것을 몰래 숨겨둔다는 걸 말이다.

“쟤가 다시 가족을 잃을까 봐 그랬어.”

레온이 메리에게 사실대로 설명했다.

“이미 전부를 잃었으니까. 게다가 북부를 떠날지도 모르는데, 저 녀석이 계속 우리 곁에 있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어미를 잃은 굴에서 데리고 나온 건 제 선택이었지만, 그 이후의 운명은 새끼 짐승의 몫이었다.

레온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모포를 바라봤다. 삐져나온 꼬리만 일정한 속도로 바닥을 쳐대고 있었다.

“기를 쓰고 쫓아왔으니 함께하고 싶은 거겠지. 그러니까 너, 지금부턴 말 좀 잘 들어. 아무거나 물어대지 말고.”

레온이 톡, 녀석의 엉덩이를 두드리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해가 중천에 떴다. 바람이 잠잠한 것을 보니 밤이 물러간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어디 갔어?”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이어졌다. 메리가 마저 자리 정돈을 시작하며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일상을 즐기기 위해서요. 도련님께서도 어서 나가보세요.”

외부인을 철저히 경계하고 외면하는 소하에서의 첫날이 이토록 편안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메리의 설명에 레온이 눈을 비비고 바깥으로 나섰다. 쏟아지는 강렬한 햇빛과 함께 주변에 모여 있는 전투원들이 보였다.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들은 동그랗게 모여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안쪽에선 기합 넣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응원하는 미셸의 신난 웃음소리도 뒤섞여 있었다.

“이번에도 제가 이겼습니다! 아슬아슬했지만 분명 제 검 등이 먼저 닿았어요.”

“…이만하지, 케인. 이 정도면 훈련은 충분한 것 같은데.”

“땀 하나 배어 나오질 않았는데 여기서 마무리하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워렌과 케인 두 사람이 서로에게 검을 겨눈 채 검술 훈련 중이었다.

한 사람은 몹시도 이 상황이 불편한 얼굴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누구보다 이 상황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공자님!”

미셸과 나란히 서서 상황을 구경 중이던 브라운이 반갑게 손을 흔들어댔다.

레온의 등장에 소하의 전투원들이 그를 흘끔거리기 시작했다.

해가 떠 있는 밝은 대낮에 보는 레온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젯밤 동북부 폰네시의 후계자가 이곳에 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실제로 확인한 이는 드물었다.

“자! 지금부터 제가 르테르의 검무를 보여드릴 테니까요!”

케인이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레온이 온 것을 확인한 워렌마저 개인 단련을 그만두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검무는 르테르의 고대 검서 초본 첫 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아무도 케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모두 관심도 없었다.

전투원들이 계속해서 레온을 힐끔거렸다. 이곳에 모여 있는 그 누구보다도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외모였다.

“어쩜 사람의 머리칼이 저토록 투명하고 깨끗할 수 있지?”

“눈동자는 또 어떻고. 마치 하늘을 담고 있는 것 같군.”

“…세상에 저런 외모는 처음 봐. 무슨 종족이지?”

그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케인의 귀에도 드디어 닿았다. 열심히 검을 휘두르던 그가 씁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금발의 벽안인 미남의 정석 워렌과, 세상에 두 명은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신비로운 외모의 레온이 서 있으니 저곳만 다른 세상 같았다.

지켜보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갑자기 웬 훈련이야?”

“공자님께서 기초를 알려 달라 하셨기에 다시 되새겨보는 중이었습니다. 처음 검을 쥐는 분도 쉽게 익힐 만한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헉! 드디어 검술을 익히시는 건가요, 공자님?”

“왜요, 브라운? 그동안 공자가 검술 훈련을 게을리했나요? 왜 마치 검 한번 쥐어보지 않은 멍청이를 대하는 것처럼 감격하지?”

워렌과 브라운, 그리고 미셸까지 합세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레온이 말없이 케인에게 다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검 좀 줘봐.”

“예? 예, 공자님.”

내심 소외당했던 케인이 신이 나서 레온에게 검을 쥐어주었다.

루시오가 직접 하사했던 궁성 기사의 세련된 검날이 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떠들어대던 미셸이 입을 꾹 다물었다. 멍청이가 어쩌구 언급을 해댔으니 조심할 타이밍이었다.

“음, 무게는 이 정도구나.”

레온이 한 손으로 검을 쥐고 아래위로 흔들어 보았다. 곁에 머무르던 브라운이 미셸을 뒤로 물리며 몇 발자국 떨어졌다.

“잠깐은 괜찮겠는데.”

폰네시의 궁성 무기들은 모두 서대륙 내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대협곡의 강철로 만들어진다.

오랜 시간 대협곡에 짓눌려 힘이 새겨진 만큼 강력함과 파괴력이 두루 갖춰진 수준 높은 검이 되었다.

‘역시 체력부터 만들어야겠다.’

잠시였지만 이 무거운 걸 들고 몸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어깨부터 무리가 와 불필요한 곳에 멋대로 검을 휘두르지나 않을지 걱정이 앞설 정도였다.

결국 레온이 다시 검의 주인에게 무기를 돌려주었다.

“공자께서 편히 다루실 만한 검의 길이를 찾았습니다.”

워렌이 시선을 내려 제가 쥐고 있는 폰네시의 보검을 바라봤다.

궁성 기사의 것보다 두 배 정도는 날이 길고 두꺼웠다.

이걸 녹인다면 딱 레온이 쓸 만한 검과 제 몫의 검 두 개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이건 루시오가 만들어 직접 하사한 검이었다. 의미가 남다른 만큼 그런 결단을 쉽게 내릴 수는 없었다.

강철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좋겠는데.

“아니면 녹지 않는 얼음으로 만든 검을 내어달라고 해봐. 넌 밀라쿠잖아.”

“아닌 걸 아시지 않습니까.”

“나야 모르지. 저들이 맞다는데 내가 무슨 수로 아니래.”

어쩌면 다이아 스틸로 만든 무기를 손에 넣을 기회였다.

왜 오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워렌의 부탁은 뭐든 들어줄 것처럼 보였다.

레온이 얼음 창을 눈독 들이고 있을 때였다.

‘이게 무슨… 느낌이야.’

순간 눈앞이 어지럽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레온이 가슴을 부여잡고 휘청거렸다.

누군가가 발아래부터 온몸을 잡아끄는 느낌이었다.

“공자님!”

바로 곁에 서 있던 브라운이 그런 레온을 부축했다. 인상을 찌푸린 레온이 고통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으세요?”

아니, 괜찮지 않다. 알 수 없는 기운이 심장 주변에 몰려드는 게 느껴졌다.

레온은 손끝부터 감각이 재정비되는 것을 느꼈다.

전율이 일었다. 가닥가닥 세포를 타고 흐르는 익숙한 느낌에 레온은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바라봤다.

“…위험해.”

“예? 공, 공자님! 어디 가세요!”

레온이 그대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아주 빠른 속도였다.

요새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심처를 향해 미친 듯이 달리는 동안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존재는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미약해지고 있어!’

기운이 약해지고 있었다. 점점 사그라지는 기운을 쫓아 레온이 타티아나의 거처 앞에 멈추어 섰다.

티나가 그 앞을 가로막자, 다급하게 달려온 레온은 눈앞에서 거친 숨을 내뱉었다.

티나가 날 선 표정으로 레온에게 창을 겨누었다.

“들어가야 돼.”

“헛소리! 부름 받은 자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안에 있는 저 사람! 죽어가고 있다고.”

“…뭐?”

심장 주변을 뜨겁게 불태우는 이 느낌, 온몸의 활력을 주기도, 앗아가기도 하는 이 느낌은 이 세상에 오직 단 하나만이 낼 수 있는 기운이었다.

“타티아나가 죽어가고 있다고. 당장 비켜, 티나.”

라피스가 꺼져 가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그녀의 생명력이 레온을 부르고 있었다.

“…….”

티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레온을 바라봤다.

불그스름한 노을빛이 담긴 푸른색 눈동자엔 일말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죽어가고 있다. 벌써 보름 전부터 제대로 먹지도, 일어서지도 못한 채 겨우 숨만 몰아쉬며 이곳에 버티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자는 없다.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비켜, 당장.”

어떻게 알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타티아나를 살리는 일이었다.

티나가 메마른 입술을 꽉 깨물고 뒤돌았다.

등 뒤에서 따라붙는 레온의 발소리를 들으며 매캐한 연기가 내려앉은 그곳에 들어섰다.

“얼마나 됐지?”

전대 해주 인어가 죽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기운이었다.

활력을 주던 영혼의 조각이 잘게 부서지고 점차 빛을 잃어버리는 그 느낌.

레온이 쓰러진 타티아나를 살피며 그녀의 심장 위에 손을 뻗었다. 제 손끝에 묻어나는 라피스의 기운이 잠시간 타티아나에게 깃들었다.

“…보름, 보름 전에 쓰러졌어.”

“아니, 그거 말고.”

레온이 죽음과 가까운 타티아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곁에 우두커니 서 있는 티나에게서도 똑같은 라피스의 기운이 느껴졌다.

“너희 둘. 이렇게 살아온 지 얼마나 됐냐고.”

이들은 인간이 아니다.

라피스를 지닌 존재, 아니, 어쩌면 그걸 훔친 자들.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레온이 분노 어린 표정으로 티나를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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