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51화 (51/133)

51화

10장. 태초의 설인(4)

새로운 주인이 자리한 동북부 폰네시에도 차가운 기온이 물들기 시작했다.

살얼음이 올라붙은 유리창이 절기의 변화를 체감하게 만들었다.

“사령관님을 뵈러 왔다.”

“예, 크리크 경.”

대대로 몬데이어 공작의 집무실이었던 공간은 이제 하일 데로니스의 신임을 얻고 있는 젊은 사령관, 다니엘 이든의 차지가 됐다.

그의 문밖을 지키는 경비병이 긴장된 표정으로 크리크의 방문을 알렸다.

‘까딱 잘못하다간 나도 내쳐질 수 있어.’

대기사 크리크는 무려 스무 해 동안이나 이곳 폰네시에 머물렀다.

이 땅을 돌려받기 위해 숨죽인 채 치밀하고 냉정하게 모든 작전을 수행해 온 만큼, 궁성 내 모든 이가 그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대부분 이 궁성의 실질적인 주인을 크리크로 인정하고 있었다.

전쟁에 나가 검 한번 쥐어보지 않은 출신 모를 사령관 따위 두렵지도 않았다.

“사령관님.”

하나, 크리크만큼은 아니었다.

폰네시의 재정 상황을 살피고 있던 젊은 사령관, 다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삼백안이 크리크를 응시했다. 머리칼만큼이나 어두운 눈동자엔 짙은 피로감이 머물러 있었다.

“사령관님, 레온 몬데이어의 행적 보고를 위해 찾아왔습니다.”

“기다리던 소식이군.”

그가 모든 일을 뒤로하고 집중했다.

“레온 몬데이어는 현재 북부에 있습니다.”

데로니스 세력은 지난 한 달간 레온의 행적을 뒤쫓아 동부 곳곳을 정찰해 왔다.

당초 목적지라 알려진 길라를 중심으로 해안선을 따라 폰네시의 인접 마을 하나까지 모두 확인한 상태였다.

“페르탈린 내부에 심어둔 정보책으로부터 전달받은 소식이니 신뢰할 만합니다.”

다니엘이 감흥 없는 표정으로 창밖을 살폈다.

날이 흐린가 싶더니 어느새 폰네시에도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북부도 이제 곧 소강기에 접어들겠군.”

지난 두 달간 혹한의 여파로 북부 땅에 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눈 폭풍이 북부 지역을 에워싸고 있어 이 시기에 수많은 병력을 이끌고 북부 행군을 강행하기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본대에서 지원 병력이 도착하는 대로 우리는 전군을 이끌고 북부로 진격한다.”

놀랍지도 않은 명이다.

레온이 그곳에 있으니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거취를 뒤쫓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 그 전에 먼저 알려야 할 사실이 있었다.

크리크가 날카로운 다니엘의 두 눈을 바라보며 다시 보고를 이어나갔다.

“사령관님, 북부에 시체병이 번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뭐?”

내내 평온하던 다니엘이 조금 놀란 듯 인상을 찌푸렸다.

“사라지지 않은 건가?”

“예, 고대 기록지에 적힌 증상과 특징이 모두 일치합니다.”

분명 아주 오래전 이 땅에서 정체를 감추었다 전해지는데.

다니엘이 미간을 좁혔다. 골치 아픈 유행이 번지고 있다.

통칭 혹한의 저주, 시체병이 유행하는 건 누구에게도 달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상황은 어떻지? 폰네시 쪽으로도 병이 퍼지고 있나?”

“아닙니다. 북부의 모든 영지에서 피해가 보고되고 있습니다만, 혹한으로 발길이 끊겨 그런지 아직까진 우리 쪽 피해는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전파력이 심한 병이니 대비는 해야 할 텐데.”

“예, 가축의 폐사도 늘고 있다 하니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체병의 까다로움은 개체를 가리지 않고 옮겨 붙는 것에 있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서대륙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병인만큼 반드시 주의가 필요했다.

“현재로선 엔드해를 따라 우회해서 북부로 진입하거나, 다시 시체병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글쎄, 함대를 준비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니 우회 방법은 불가능하다 보는 게 맞겠지.”

“…타세트 쪽과 다시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지난 합작에서 상황이 틀어진 관계로 데로니스 세력과 타세트의 항해단 역시 손을 놓은 상태였다.

다니엘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이미 이 땅에 관심이 없었다.

“타세트는 동대륙 너머 새로운 항로를 찾아 떠났다고 하니, 더는 우리와 엮일 일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희망적이지 않다.

들끓는 시체병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거나, 레온이 스스로 북부를 벗어나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크리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어느 쪽도 저 속 모를 사령관의 마음에 들지는 않을 것이다.

“레온이 어디 있는지 확인했으니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신경 쓸 필요 없겠군.”

다니엘의 단호한 목소리에 크리크가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장 중요한 문제를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시체병이 퍼져 오도 가도 못 하는 건 우리나 그쪽이나 마찬가지야. 당분간 내가 직접 거취를 쫓을 테니 크리크, 자네는 다른 중요한 일을 알아봐 줘야겠어.”

아직 앳된 기운이 남아 있는 창백한 얼굴이 크리크를 응시했다.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매서운 삼백안이 느리게 깜빡거렸다.

“헤리스 타린.”

이 폰네시의 기사단장이자 루시오 몬데이어의 가장 오래된 친우.

“그자가 공작가의 비밀 서고에서 중요한 걸 훔쳐 달아났다.”

누구도 알아선 안 되는 정보가 그자의 손에 들어갔다.

“반드시 잡아야 해.”

이대로 살려둘 수는 없다.

반드시 이 폰네시를 손에 넣어야만 했던 이유가 눈앞에서 도난당했다.

“그러니 크리크, 당신이 직접 그자를 내게 데려와 주게.”

“……!”

“절대 놓쳐선 안 돼.”

그자를 찾지 못한다면 지난 모든 시간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다니엘이 크리크를 응시했다. 거절 따윈 용납할 수 없었다.

***

“…제길.”

그레이트 대협곡이란 서대륙의 북부부터 동부 중반까지 세로 방향으로 깊게 나 있는 거대한 규모의 협곡을 일컬었다.

“이래 가지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겠는데….”

기사 헤리스가 푸른색 망토로 둘둘 감싼 오른 무릎을 살폈다.

지난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이후 치료하지 못해서인지 상처는 더욱 심각하게 곪아가고 있었다.

“이 다리로 절벽을 타 내려왔으니….”

상처가 헤집어질 만도 했다.

헤리스가 주변을 둘러봤다. 백색의 희뿌연 암석이 날카롭게 하늘을 찌를 것처럼 솟아나 있는 것을 보니 시린 무릎이 더욱 고통스러운 느낌이다.

“협곡 중간 부근인가.”

적군을 피해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정확히 이곳이 어디인지 헤리스는 알지 못했다.

주변 특성과 낯익은 풍경으로 그레이트 대협곡의 어딘가란 것만 짐작 가능할 뿐이었다.

“…….”

그가 기사단의 자랑이었던 푸른 망토로 꽉 묶은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피가 배어 나와 이제는 색깔마저 분명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짙은 갈색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푸른색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망토 아래 꽉 묶인 다리에선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걸을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기온마저 내려가는군.’

이가 득득 떨릴 정도로 날씨가 좋지 않았다.

북부에서부터 밀려드는 한기가 드디어 동부 부근을 장악했는지 하늘 위에선 먼지 같은 눈발이 날리는 것도 같았다.

모든 상황이 좋지 않다.

헤리스가 자세를 낮추고 조심스레 절벽 틈 사이에 겨우 자리를 잡고 몸을 뉘었다.

‘…루시오.’

이 모든 척박한 상황 속에서도 가장 최악인 건 자신의 주군을 잃고, 오랜 친우를 떠나보냈다는 사실이었다.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흘러내리는 뜨거운 무언가를 금세 닦아낸 헤리스는 슬픔을 잊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내 반드시 네 자식만큼은 지켜내겠다 약속하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가 가슴 안쪽에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 부드러운 가죽에 하나하나 결을 새겨 놓은, 정성이 깃든 물건이었다.

헤리스가 손끝으로 지도 속 폰네시를 매만졌다.

루시오의 아내이자, 자신이 평생 그리워했던 그녀 일리아가 선물해 준 지도를 보니 가야 할 길이 명확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슐츠로 가야 해.’

그곳은 서대륙 내 남부 지역의 가장 큰 영역으로, 타린 가문이 오래도록 통치하고 있는 영지이기도 했다.

‘누구도 반겨줄 리는 없지만.’

자신은 비록 가문을 떠나 지난 한평생 루시오와 폰네시를 지키는 데 할애했지만, 타린 가문은 새로운 왕조를 가장 먼저 지지하고 그들로부터 더 큰 영지를 하사받아 세력을 늘리고 있는 중이었다.

‘자뎅의 정보만 있다면 레온을 찾을 수 있어.’

다만 루시오만큼이나 오래된 죽마고우가 그곳에 있었다.

자뎅은 슐츠에서 비밀리에 정보상을 운영하며 루시오와 헤리스에게 늘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어떻게 가지? 슐츠로 가는 길은 이미 막혔을 텐데.’

그레이트 대협곡은 사람의 힘으로 건너가기 어려운 규모였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끝도 없이 이어진 절벽 아래 머무르다 보면 반드시 방향을 잃게 된다.

이 협곡을 건너지 않고 중앙, 서부, 남부로 넘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두 곳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월랜드라면 진작 데로니스와 손을 잡았고, 길라 역시 이미 충성을 맹세했지.’

그레이트 대협곡이 끝나는 지리적 이점을 지닌 두 곳이 모두 데로니스의 손에 넘어갔다.

정말 솟아날 구멍 따위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헤리스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가씨께서도 이런 시련을 겪고 계시겠지.’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

제 무릎이 갈리고 온몸의 피를 쏟아내는 고통을 겪었어도, 그 사실 하나만 떠올리면 모든 걸 버틸 수 있었다.

‘반드시 아가씨를 찾아야 해.’

죽은 루시오와 일리아의 유일한 부탁은 레브를 찾아내 그 곁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

주군도, 평생을 붙잡아온 그리움도 모두 잃고 없는 헤리스.

그에게 있어 살아갈 이유는 오직 레브,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밀항하는 수밖에 없나.’

월랜드와 길라가 이미 데로니스 손에 넘어간 마당에 처지가 자유로울 것 같진 않았다. 어쩌면 수배령이 내려왔을지도 모른다.

하나 대륙을 통하지 않고 슐츠로 향할 길은 바닷길뿐이었다.

‘역시 길라뿐이겠지.’

그곳엔 엔드해와 만나는 해안 변경 지역이 있다.

신분과 처지를 막론하고 밀항을 위해 길라를 찾는 이들이 하루에도 수십은 될 테니, 잘만 한다면 몰래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헤리스는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봤다.

흐릿한 먹구름을 보자 점차 정신이 아득해지는 게 느껴졌다. 참지 못할 피로감이 밀려왔다.

‘…레브.’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 따윈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레브가 무슨 고행을 겪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턱이 단단해졌다.

헤리스가 결국 차디찬 몸을 이끌고 겨우 어둠 속에 발을 내디뎠다.

길라로 가기 위해선 이대로 가파른 협곡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체력 분배가 중요하겠어.’

그가 묵직한 대검을 두 손에 쥐고 겨우 어둠을 인지할 때였다.

“헤리스 타린.”

낯선 음성이 그의 걸음을 가로막았다.

“어딜 가는 거지?”

서늘한 검날이 뒷목을 노리며 허공을 갈랐다.

헤리스가 곧장 묵직한 검을 쳐내고 제 목숨을 노린 이를 향해 몸을 뒤틀었다.

“…누구냐!”

그리고.

뒤돌아 확인한 곳에 서 있는 의외의 인물을 보며 헤리스는 두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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