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52화 (52/133)

52화

10장. 태초의 설인(5)

“내가 먼저 묻지 않았나? 어딜 가냐고.”

헤리스가 놀란 눈으로 검 끝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인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뭇 긴장된 표정이 눈에 익었다. 일전에도 본 적이 있는, 루시오가 믿고 의지했던 자의 혈육.

“피타 크루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건 길라의 후계자였다. 이쪽에서도 검을 겨눌 이유가 충분했다.

헤리스가 곧장 검을 뽑아 들어 마주한 피타를 위협했다.

“…….”

“…….”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눈빛에 서린 분노의 크기는 서로가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먼저 검을 겨누긴 했으나 피타의 실력은 헤리스의 발밑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헤리스의 목을 노린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피타가 눈썹을 찡그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

“폰네시를 적들의 턱밑에 물어다 주고 대체 어디로 도망가는 거지?”

“…뭐라?”

“당신이 저지른 짓은 이미 서대륙 전체에 퍼졌어.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주군의 등에 검을 내리꽂은 배신자라는 사실이 말이야!”

폰네시, 그 석벽의 성을 무너뜨린 장본인이 헤리스라는 건 동부 전역에 이미 퍼져나갔다.

침묵의 기사단장으로서 명예를 바친 주군을 배신하고 곧장 본색을 드러낸 사실은 두고두고 상인들 입에서 회자될 것이다.

“내 반드시 레온의 복수를 해주지, 헤리스 타린.”

눈앞의 노련한 기사가 당황한 기색이었다.

피타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검을 올려 쳤다.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지, 피타 크루네?!”

다만, 이쪽에서 받아줄 수준은 한참이나 뒤쳐졌다.

헤리스가 저를 노린 날카로운 날붙이를 되레 쳐내고 매정한 손길로 피타의 가슴팍을 노렸다.

위협이 한 걸음 더 가까워지자 피타가 아랫입술을 씹었다.

어두운 밤중이라 시야가 더욱 불확실했다. 전력으로 덤벼도 모자랄 판에 너무도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는 크루네 가문이야말로 우리 폰네시를 가장 먼저 척지지 않았나?”

“척지다니!”

“데로니스에 충성을 맹세했다는 소식이 도망자인 내 귀에까지 단번에 들릴 정도던데. 내 말이 틀렸나?”

“…그건.”

“어디 입이 있으면 변명 좀 해보라지. 루시오를 배반한 이유를 어서 떠들어보란 말이야!”

길라는 비록 인원이 적은 소영지에 속했으나 중요도가 서대륙 내에서 그 무엇보다 높은 축에 속했다.

데로니스 세력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고 버틸 만한 시간이 충분했던 것이다.

“맞붙어 보지도 않고 꼬리를 내린 건 그럴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지.”

폰네시를 되찾는 것에 보탤 의지 따위는 전혀 없었던 거다.

그간 루시오가 믿어온 것과는 너무도 다르게.

“…배반자에게 그런 말 따위 듣고 싶지 않은데?”

“나야말로 위선자에게 이런 취급은 사치처럼 느껴지는군.”

두 사람이 한참이나 서로를 노려보았다.

눈빛 속에서 거짓으로 볼 수 없는 분노가 형형하게 일렁거렸다.

피타의 손끝이 떨렸다.

굳세게 검을 말아 쥐고 있는 손이 여러 차례 갈등을 거듭했다.

“제길!”

헤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이유로 검을 겨눌 필요가 없겠군.”

그가 고민 없이 먼저 검을 내렸다. 실력도 미비한 주제에 목을 노리고 달려든 건 그만한 분노가 이성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길라의 선택은 그랬을지언정 피타 크루네의 마음은 그 길과 달랐다. 그것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다.

적의를 거두고 온전히 목 끝을 내맡기자 피타 역시 머뭇거리며 천천히 검을 회수했다.

“쳇, 배신자 주제에 왜 분노하는 겁니까?”

멋쩍은 상황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피타는 헤리스가 배신하지 않았을 거란 사실을 직접 느끼고 말았다.

피타가 툴툴거리며 제 검을 검집에 찔러 넣었다.

“어차피 설명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하니 떠들지 않겠어.”

헤리스 역시 검을 마저 정돈하고 주변을 살폈다.

이 살벌한 대협곡 바닥에 어째서 크루네 가문의 장자가 홀로 서 있는지 모를 일이다.

“대체 여긴 무슨 볼일이지?”

“설명할 이유, 있습니까?”

서로 간에 친절하게 떠들어댈 일은 아니란 소리였다.

헤리스가 거친 숨을 내쉬며 결국 돌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버티려 해도 무릎 쪽의 상처가 심했다. 어쩌면 다리를 절단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상처가 심하군요.”

“그 전쟁에서 살아남았으니 어쩌면 가장 나은 부상일지도 모르지.”

헤리스가 자조했다.

피타는 주변을 살피다 결국 그의 곁에 자리 잡았다.

“늙고 병든 자를 그냥 지나치지 말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피타가 제 짐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 뒤적이기 시작했다.

공격할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헤리스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뭘 하려고?”

“보면 모릅니까? 상처를 돌봐야죠.”

가방 안에서 깨끗한 천과 지혈제가 튀어나왔다.

헤리스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그것들을 얼결에 받아 들었다.

피타가 곧장 그의 다리를 살폈다.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꽉 묶어놓은 손길에 상처가 짓이겨져 아주 못 봐줄 형편이었다.

“소독도 하지 않고 오염된 천으로 이렇게 지혈했으니 덧날 수밖에요. 천을 이리 주시죠. 환부를 깨끗이 하고 덮는 것만으로도 증상이 많이 가라앉을 겁니다.”

헤리스는 말없이 피타를 바라봤다.

피타는 대꾸하지 않는 그의 손에서 도로 제가 던진 것들을 되찾아 상처를 돌보기 시작했다.

“…정말 아까부터 웃기지도 않는군.”

갑작스레 일어난 일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이유를 막론하고 이처럼 다정하게 상처를 돌봐줄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헤리스가 피타의 어깨를 붙잡자, 금세 행동이 저지된 앳된 공자가 고개를 들었다.

“내게 무슨 용건으로 접근한 거지? 대체 계획이 뭐냔 말이야.”

“용건도 없고 접근하려 계획한 적도 없습니다.”

“말장난 그만하고 대답해. 어째서 이 늦은 밤에 이곳에 혼자 있지? 길라에 있어야 할 네가 말이야!”

붙잡은 손길은 금세 피타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단번에 피타를 제압하고는 놈의 숨통을 졸랐다.

눈에 익은 어둠 속에서 바라본 그의 얼굴엔 전장을 백 번 겪은 무시무시한 대기사의 분노가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받은 은혜는 아무리 되갚아도 모자라다는… 아버지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뭐?”

피타가 제 목을 조르는 헤리스의 손을 천천히 붙잡았다.

“길라는 폰네시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아 가장 먼저 데로니스에게 접근했을 뿐.

피타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헤리스에게 물었다.

“지금 레온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헤리스 경?”

레온을 찾아야 한다.

그 아이를 찾아 폰네시의 후계자에게 제 것을 되돌려줄 것이다.

“저는, 아니, 우리 길라는 레온을 이 서대륙의 주인으로 받들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건 레온을 찾는 일이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긴장한 피타가 헤리스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목적한 바가 같다면…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

그 시각, 센느.

“두티스는 좀 어때?”

코와 입을 가리고 눈만 내놓은 어린 영주 덴이 코를 훌쩍이는 식솔 하나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온몸에 반점이 퍼져 버렸어요.”

“…이런.”

영지민 마을 내 허접한 거처에 두티스가 생기를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그는 며칠 전 이 북부에 퍼져 버린 시체병에 감염돼 곧장 이곳에 격리되었다.

“영주님… 정말 우리 아버지를 살릴 길이 없을까요?”

“…정말 미안하게 됐네. 이미 온몸에 증상이 퍼졌으니 이틀을 넘기진 못할 거야.”

어떻게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까 한참 고민하던 덴이 결국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그저 시체병이 옮기 전에 어서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성으로 돌아오라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땐 이미 너무 늦겠지만.

“영주님, 증상이 없는 영지민들 전부가 성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 다들 어려운 결정을 내렸네.”

“예, 하지만 병이 들끓는 밖보다는 확실히 성안이 나을 테니까요.”

센느에도 혹한의 저주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덴은 아무 증상이 없는 영지민들만을 보호하기로 결정하고 그들에게 성 한편을 내주었다.

지금부턴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스스로 격리되길 자처했으나 그게 최선이란 건 영주성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르고는 괜찮지?”

“예, 공급하는 먹이도 제대로 관리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이제 아르고가 우리의 소식을 전할 유일한 수단이니 단단히 신경 써야 해. 이 저주가 얼마나 될지도 모르는데 영영 고립될 순 없잖아.”

늙은 식솔이 긴장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무시무시한 전염병은 사람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증상을 옮겨댔기에 아르고를 보호하는 게 가장 중요한 임무처럼 느껴졌다.

“어머니를 뵈러 가자.”

“예, 영주님.”

덴이 우중충한 분위기를 거두고 곧장 영주의 침실로 향했다.

비록 이 센느의 영주가 되기로 마음먹었지만, 한평생을 그곳에서 지낸 어머니의 침실까지 빼앗고 싶진 않았다.

식솔이 거처 앞에 도착해 문을 열어주었다.

덴이 그를 앞에 세워두고 방 한가운데에 놓인 침대로 다가갔다.

“…덴?”

토바 부인이 핼쑥한 모습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저 멀리서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제 아들이 다가오는 게 흐릿하게 보였다.

덴이 그녀에게 다가가 야윈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벌써 며칠째 이유 없이 기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머니, 저예요. 제가 왔어요.”

병에 걸린 모두를 성 밖에 버려두고 이곳에 모여들었다.

아픈 어머니를 외면하지 못한 덴의 마음이 무거웠다.

“어디… 아픈 곳은 없고요?”

“…며칠째 똑같구나. 이제 앞이 좀 더 잘 보이지 않는 것만 달라졌어.”

다만, 토바 부인에겐 시체병의 특성이 없었다.

온몸에 피어나는 회색 반점. 그 두드러진 특성이 전혀 없으니 아들로서 아픈 어머니를 외면하는 건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미셸과 마리사에게선 연락이 없니?”

“예, 오늘 저녁 아르고를 날려 보낼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분명 소하에 잘 도착했을 거예요.”

덴이 앙상하게 마른 어머니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곳에도 이 병이 퍼졌을까?’

티를 내진 못했지만 걱정이 앞섰다.

혹한의 저주가 센느만을 덮치진 않았을 터.

며칠 전 페르탈린으로 돌아간 재스퍼 쪽의 상황도 안 좋았고, 레온의 뜻을 전하기 위해 찾았던 다른 영지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북부 전역에 퍼진 시체병이 소하만을 비켜 가기라 낙관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모두에게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럼에도 어머니에겐 이 암담한 상황을 전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 덴. 내가 어서 기운을 차려야 할 텐데.”

“뭐라도 좀 드세요… 그래야 제가 살아요.”

“…미안하구나, 아들아.”

매 분, 매 초마다 꺼져가는 어머니의 생명 앞에 다른 걱정이 우선일 순 없었다.

덴이 마른 나무껍질 같은 토바 부인의 이마에 머리를 맞대었다.

“…기운 차리세요, 제발.”

그녀에게선 숨길 수 없는 죽음의 냄새가 짙게 풍겨났다.

덴이 절망적인 상황에 두 눈을 꼭 감고 바랐다.

어서 빨리 이 꿈 같은 현실이 깨어지기를. 하루빨리 시체들이 평안히 잠들기를.

바랄 수 있는 게 그런 것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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