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53화 (53/133)

53화

10장. 태초의 설인(6)

인어들은 수천 년을 산다.

생명력이 강한 종의 특성은 영혼의 조각인 ‘라피스’의 힘으로 드러났다.

죽음을 걱정할 필요 없는 인어들은 오래도록 넓은 바다를 누리며 살아왔다.

인간들이 욕심 부려 인어의 라피스를 앗아갈 방법을 찾아내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너.”

인간들은 인어가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생명력의 결정체인 라피스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 라피스를 손에 넣으면 인어와 같은 생명력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도.

“무슨 짓을 한 거야?”

레온이 곧장 티나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어째서 인간이 라피스를 지니고 있는 거지?

인어도 아닌데 이처럼 강렬한 기운은 처음이었다.

“말해 봐.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억센 손길로 망토를 거세게 움켜쥐자 티나의 모습을 가리고 있던 후드가 흘러내렸다.

짙은 붉은 눈동자가 당황한 듯 흔들렸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레온이 헛웃음을 지었다.

“너, 완전 꼬맹이잖아?”

앳되다고도 설명할 수 없는 어린 티나의 모습은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라피스가 깃들어 천천히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흉물스럽기까지 했다.

이들은 인어의 라피스를 훔친 존재다. 어쩌면 검은 사냥개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네 생각 따윈 나에게 중요하지 않아.”

그때 티나가 레온의 손을 냉정하게 쳐냈다.

한시도 떨어뜨려 놓지 않는 단단한 얼음 창으로 단숨에 레온을 제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야말로 정체가 뭐지?”

저보다 두 배는 큰 레온의 어깨를 짓누르며, 날카로운 창끝으로 목을 겨누었다.

마주 보는 두 사람의 눈빛에서 서로를 용서할 수 없는 분노가 오갔다.

“너 따위가 어떻게 타티아나 님의 상태를 느낄 수 있는 거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라피스의 기운은 저쪽에서 느낄 수 없는 모양이다.

레온의 입꼬리가 매정하게 뒤틀렸다.

하긴, 그건 훔쳐냈다고 얻을 수 있는 특성 같은 게 아니다.

인어도 아닌 주제에 라피스를 얻었으니 다룰 줄도 모르겠지.

“소하의 족장을 대대로 타티아나라 부른다더니. 그건 호칭 같은 게 아니었어. 그냥 계속 같은 사람이었던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지금 그게….”

“아니라고 할 수 있어?”

그런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인어로 수천 년을 살았던 나를 속일 수는 없을 테니.

‘대체 뭐야, 이 녀석.’

티나가 미간을 좁게 모으고 레온을 노려봤다.

등 뒤로 긴장감이 맴돌았다. 뻣뻣하게 몸을 굳게 만드는 이 불편함은 수백 년 만에 처음 느껴보는 기운이었다.

‘어째서 우리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거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들켜선 안 되는 일들이 속수무책으로 드러나 버렸다.

타티아나가 벌써 수천 년을 살아왔다는 것도, 이제는 죽음 앞에 여실히 꺼져가고 있다는 것도 모두 알아채 버렸다.

“타티아나를 살릴 방법 따위는 없을 테니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라피스가 저물어간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 생명력을 모두 잃고, 라피스는 점차 소멸되고 있었다.

그런 라피스를 다시 되살리는 건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레온이 넋 빠진 티나를 밀어냈다. 그러자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힘없이 밀려났다.

‘살릴 수 없다고?’

답이 없는 상황에서 내내 기다려왔던 해답은 아니었다.

지금껏 그런 경우는 없었다. 타티아나는 지난 수천 년 동안 늘 제 곁을 지켰고, 언제나 살아 있었다.

근데 더 이상 살 수 없다니.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된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재단해? 네가 타티아나 님을 알아? 네가 우릴 아냐고!”

티나가 레온에게 달려들었다. 그 작은 몸으로 레온의 위에 올라타 양어깨를 짓눌렀다.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티나를 바라보는 레온도 그 혼돈을 느낄 정도였다.

“남의 인생을 얻어다 훔쳐 쓰는 주제에 내가 너흴 알아야 해?”

거세게 달려들던 티나가 그 목소리에 점차 잠잠해졌다.

남의 인생이라니. 훔쳐 쓴다니.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레온을 보니 묻고 싶었다.

언제부터 내 인생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건지 알고 있는 거냐고.

그렇게 잘난 척하는 네가 알고 있는 진실은 대체 뭐냐고.

“티나 님!”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주 빠른 발걸음이었다.

“티나 님, 안에 계십니까? 중요한 일입니다!”

차마 타티아나의 거처에 함부로 들어올 순 없고, 애타는 목소리는 점점 커질 뿐이었다.

레온이 티나를 다시 밀어냈다.

티나는 금세 후드를 뒤집어써 제 어린 얼굴을 가렸다. 그러곤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얼음 창을 집어 들었다.

“소하에 머무르고 싶다면 방금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해두는 게 좋을 거야.”

쉽게 떠들 수 있을 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레온이 신경질적으로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잠자코 입을 다문 레온을 한번 바라본 뒤, 티나가 이내 거처를 나섰다.

‘…안식 따윈 반드시 피해가길 바라지.’

레온이 생기 없이 쓰러져 있는 타티아나를 보며 발걸음을 되돌렸다. 잠시도 함께하기 싫은 듯 아주 매정한 발걸음이었다.

***

소하의 내부 심처를 벗어난 레온은 곧장 일행들이 머무르고 있을 거처로 향했다.

가는 동안 시린 바람을 맞고 나니 제법 이성도 돌아왔다.

티나와 타티아나의 비밀을 알고 있단 사실을 드러내고 말았으니, 저쪽에서도 이상함을 충분히 눈치챘으리라.

‘어쨌든 나도 약점을 쥐고 있는 셈이니까.’

목덜미를 내놨지만 제가 틀어쥐고 있는 목숨도 만만치 않았다.

레온은 계속 따라붙는 불쾌함을 털어내고 조금 더 발걸음을 빨리했다. 어서 일행들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해. 도대체 라피스를 어떻게 손에 넣은 거지?’

모든 기억을 뒤져봐도 검은 사냥개들을 제외하고 인어의 라피스를 노린 이들은 없었다.

물론 바다 밖 세상일이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검은 사냥개들이 라피스를 얻어 어떻게 행사해 왔는지는 그들만 아는 이야기다.

“결국 티나의 입을 직접 열어야 한다는 건데.”

그 독한 꼬맹이가 친절하게 알려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다 죽어가는 타티아나의 입을 열게 할 방법이….

“…있다.”

말도 안 돼. 방법이 있었다.

내내 심각하던 레온의 표정이 전과 달리 밝게 빛났다.

그 쓰러진 영혼의 기억을 얻어낼 방법이 떠올랐다.

“메모리아 라피스!”

인어는 아니지만 인어의 영혼 조각인 라피스를 지니고 있으니 기억도 분명 라피스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할 수 있어.’

해주 인어로서 메모리아 라피스를 만들어 내는 건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타티아나를 다시 만날 수만 있으면 된다.

그녀의 손을 잡고 머릿속에 남아 있는 라피스의 흔적을 살필 수만 있다면 기억을 훔칠 수 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다른 이들이라면 방법을 모르겠지만, 해주였던 레온만은 해낼 수 있다.

비록 잠시간 기력이 약해지기는 하겠지만, 그보다 우선인 건 라피스를 노리는 존재의 뒤꽁무니를 쫓는 일이다.

어쩌면 사냥개 놈들의 계획을 알아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인어 사냥을 저지할 수도 있겠지.

‘우리 밀라쿠의 도움 좀 받아볼까.’

워렌을 앞세워 타티아나를 만나겠다고 청한다면 티나 역시 어쩌지 못할 게 분명했다.

방향을 찾은 레온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처를 향해 다가갔다.

“레온 공자!”

“도련님!”

그 난리를 부리고 사라졌던 것과 달리 평온하게 나타나니 놀라는 건 오히려 일행들이었다.

레온이 한 번에 터져 나오는 일행들의 고함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그렇게 사라지시면 어떡해요.”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미셸과 케인의 험악한 걱정을 시작으로 브라운은 레온을 뒤따라온 자가 없는지 확인했고, 워렌은 다친 곳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라피스의 기운을 느끼고 갑작스레 사라졌으니 모두가 놀랐을 만도 했다.

“미안.”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해줄 말도 많진 않았다.

다행히 레온에게 이것저것 캐묻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궁금함보단 레온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모두 안도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것보다 궁금한 게 우선인 사람도 있지만.

“공자님, 대체 왜 그렇게 바쁘게 달려가신….”

레온이 케인을 무시하고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의 관심을 돌릴 만한 주제가 필요했다.

“확인할 게 있어서. 워렌, 너 그때 타티아나를 만났었지?”

처음 소하에 도착했을 당시 워렌은 티나와 함께 타티아나를 만나러 들어갔었다.

일행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워렌에게 향했다.

금발 머리의 미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직접 대면하진 않았지만 그 공간에 타티아나란 자가 있었습니다.”

얇은 천막으로 가려두었다. 그리고 그 뒤에 거대한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진짜 만났다고? 그럼 네가 정말 밀라쿠가 맞대?”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뭐야, 그럼 아니야?”

“그런 말도 없었습니다.”

다만, 타티아나는 그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대화는 곁에 있던 티나가 건넸다.

“제게 부탁을 했습니다.”

“부탁?”

“밀라쿠만이 열 수 있는 요새의 비밀 기지가 있는 모양입니다.”

이를테면 확인 절차 같은 셈이었다.

“제가 진짜 밀라쿠인지 확인하고 싶은 거겠죠.”

“그래서 하겠다고 했어요?!”

미셸의 물음에 워렌이 즉각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멋대로 오해한 쪽은 소하의 설인들이다. 그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줄 마음은 전혀 없었다.

“선택권이 있는 문제라면 하지 않겠다고 답했습니다.”

다행히 티나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비록 동조하지 않겠다 뜻을 전했지만 존재에 대한 믿음은 거두지 않은 듯했다.

‘일이 신기하게 돌아가네.’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물었던 일이 어쩌면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

레온은 생각에 잠겼다.

이 소하에 비밀 기지가 있다면, 그곳에 반드시 다이아 스틸과 관련된 정보가 남아 있을 것이다.

“너 정말 밀라쿠가 아닌 거야?”

이쯤 되니 워렌이 그곳에 가보지 않는다고 답한 게 아쉬울 정도였다.

타티아나와 티나, 그리고 소하에 머무르는 전부가 워렌을 전설 속 인물로 오해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흠….”

레온이 옆에 앉은 워렌을 곰곰이 뜯어봤다.

서대륙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다는 옅은 금발 머리에 채도 높은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지만 영 없을 만한 외모는 아니었다.

딱히 전설 속 인물로 특정될 만큼 다르게 생긴 것 같진 않은데.

“공자님, 너무 가깝습니다.”

“아, 미안.”

코앞에서 관찰할 기세로 다가가던 레온이 곧장 시선을 거두었다.

‘뭐, 상관없지.’

워렌이 왜 밀라쿠가 됐는지도 타티아나의 기억을 빼앗고 나면 알게 될 일이었다.

‘그 비밀 기지를 언급하면서 접근할 수도 있겠어.’

타티아나를 만날 이유가 더더욱 분명해졌다.

‘분명 이곳 소하의 비밀이 거기에 있을 거야.’

타티아나는 적어도 수백 년 이상을 살았다. 그 라피스의 기운은 그런 걸로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그런 타티아나가 어떤 공간을 열기 위해 평생 밀라쿠를 찾아왔다는 건 그곳에 대단히 중요한 게 존재한다는 걸 뜻했다.

‘대체 뭐가 있을까?’

기회가 된다면 마리사나 페페, 비교적 외부인에게 호의적인 이들에게 그곳에 대해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자님, 밤이 늦었습니다.”

“그래, 이만 마무리하자.”

또 다른 라피스의 기운과 마주한다는 건 제법 피곤한 일이었다.

레온이 묵직한 눈가를 문지르며 주변을 살폈다. 자기 전 늘 인사를 나누는 사람을 찾는 눈길이었다.

“…잠깐.”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레온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일행들이 레온의 시선을 따라 내부를 둘러보았다.

“메리는… 어디 있어?”

레온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메리가 없다.

예상치 못한 공백에 모두가 당황한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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