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10장. 태초의 설인(7)
메리가 보이지 않았다.
레온이 미친 사람처럼 곧장 거처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메리!”
근래 들어 부쩍 체력이 약해진 메리였다.
워낙 추운 북부 지역으로 와 그녀는 주로 거처 안에서 몸을 녹이거나 새끼 짐승을 돌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계속 여기 계셨는데.”
브라운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없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아 그런지 메리의 부재를 느끼지 못했다.
보다 못한 레온이 장막을 걷고 거처 밖으로 나섰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페페가 놀란 눈으로 돌아봤다.
“페페, 혹시 내 유모 못 봤어?”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교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레온이 거처에 들어서는 모습만 간신히 확인했을 뿐이다.
“어디… 잠시 나간 게 아닐까요?”
“사방 천지 우리를 감시하는 사람들뿐인 이곳에서 메리가 무슨 이유로!”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고 온 워렌이 레온의 곁으로 다가왔다.
슬슬 이상함을 감지한 소하의 전투원들도 일행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눈이 내려 발자국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주변을 좀 더 살펴볼 테니 안에서 기다리시죠.”
레온이 고개를 저었다. 메리를 찾는 일에 편안함이 우선일 순 없다.
“차라리 흩어져서 살펴보자.”
소하의 얼음 요새는 그 규모가 대단했다.
날씨가 독한 탓에 메리가 잠시 밖으로 나섰다 길을 잃었을 가능성도 있다.
여럿이 나뉘어 찾는다면 분명 시간을 아낄 수 있을 것이다.
“페페 씨, 우릴 뒤따라도 좋으니 감시원들에게도 상황을 공유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야 그게 우리 일이니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부탁 좀 할게요. 나이가 많은 분이에요. 이 추위에 오래도록 방치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잖아요.”
브라운의 간청에 페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거처 주변에 배치된 전투원들은 일행의 행동을 지켜보는 게 일이었다.
페페가 전투원들에게 상황을 알리려 다가갈 때였다.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곳 뒤에서 티나가 나타났다.
“그건 안 되겠는데.”
백색 망토를 뒤집어쓴 그녀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앞을 가로선 티나를 보자마자 레온이 미간을 좁혔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이 일을 핑계로 무슨 목적이 있을 줄 알고?”
“뭐라고?”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움켜쥔 레온의 주먹이 금방이라도 그녀를 내려칠 것만 같았다.
“이깟 곳을 뒤지자고 메리를 이용하진 않아.”
정보가 아무리 중요해도 지금 이 순간 레온에게 가장 우선인 건 메리였다.
티나가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소하를 찾은 이유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았으면서.
“외부인은 우리가 찾아볼 테니 너희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라.”
“너희가 제대로 찾기나 하겠어?”
“그래도 이곳 지리에 밝은 우리가 낫지 않겠나, 레온 몬데이어? 또 다른 미아를 늘리는 건 멍청한 짓처럼 느껴지는데.”
더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외부인들이 자유롭게 이곳을 오갈 수 있는 것도 모두 타티아나의 은혜 덕분이었다.
“그러니 쏘다닐 생각 말고 거처 안에나 붙어 있어.”
티나가 전투원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섰다.
아주 빠른 속도로 날붙이가 일행들을 향해 겨누어졌다.
***
라피스의 기운이 불규칙적으로 날뛰는 것을 느꼈다.
‘분명 뭔가에 동요하고 있어.’
단순히 분노만으로 라피스가 그렇게 반응하진 않았을 것이다.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급하게 사라진 티나가 기다렸단 듯 모습을 드러냈을 리가 없었다.
레온이 힐끔, 바깥을 살폈다.
더 이상 새벽 고요도 통하지 않는 혹한의 절정이었다.
몰아치는 눈보라와 눈 폭풍으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다 같이 나서면 괜히 시선만 잡아끌 뿐이야.’
모두 잠에 빠져들었다. 이곳 소하까지 오는 여정이 얼마나 고되었는지는 그 누구보다 레온이 가장 잘 알았다.
‘페페도 사라졌고.’
그들이 교대하는 틈을 타 레온이 조용히 거처를 나섰다.
전투원들의 눈이 아무리 좋아도 지금 이 폭풍 속에서 인물을 가려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디 있지?’
레온이 정신을 집중했다.
작은 새의 심장 소리 같은 두근거림과 불규칙적인 라피스의 기운이 소하의 심처에서 느껴졌다.
티나는 그곳에 있었다. 그녀의 기운을 쫓아 메리를 찾아내는 건 의미가 없다는 소리였다.
‘미로 같은 감옥이 하나 있다고 했지?’
처음 일행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갇혀 있던 곳이다.
레온이 브라운의 설명을 떠올리며 재빨리 이동했다. 체구가 가볍고 왜소한 만큼 레온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날쌨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하는데.’
메리가 사라진 이유를 찾을 수 없어 애가 탔다.
걱정 끼치는 걸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말도 없이 멋대로 거처를 벗어났을 것 같진 않은데.
그렇다면 자의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컸다. 뜻하지 않은 강제에는 항상 부정적인 결과가 뒤따르는 법이었다.
레온이 애써 나쁜 생각들을 몰아냈다.
‘…잠깐.’
매서운 바람 소리만 가득한 귓가에 낯선 인기척이 닿았다.
레온이 천천히 제 발소릴 줄였다. 그러자 두툼한 눈을 밟는 소리가 이어졌다. 누군가가 뒤따르고 있었다.
혹시 몰라 챙겨온 단검을 손에 쥐고 냉큼 몸을 뒤돌 때였다.
“우악! 저예요, 저! 미셸이라구요, 레온 공자!”
“…미셸? 뭐야. 안 자고 있었어?”
미셸이 코앞에 들이밀어진 검날을 휙, 치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빨간 코끝이 어찌나 부었는지 한참을 운 것 같아 보인다.
“메리가 걱정돼서요. 혼자보단 둘이서 찾는 게 빠를 것도 같고.”
“들키면 우리 둘 다 위험해질 수도 있어. 나야 가치가 있으니 죽이진 않겠지만.”
“제가 비록 가치는 없지만 여기 가족이 있거든요? 저는 마리사가 어떻게든 구해줄 거예요. 걱정 마세요, 공자!”
이번 여정에서 미셸이 메리를 얼마나 의지했는지 알기 때문에 되돌아가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레온이 그녀에게 단검을 쥐어 주었다. 무기는 이쪽보단 저쪽이 더 잘 다루는 듯했다.
“그나저나 미로 쪽을 뚫을 수 있을까요? 거긴 감시하는 눈이 적어도 열은 되어 보였어요.”
“그래, 날씨에만 의존해 무작정 뛰어 들어갈 곳은 아닌 것 같아.”
두 사람은 어느새 미로 근처까지 다가가 몸을 숨겼다.
분주하게 주변을 경계하는 인원이 이곳에서도 아주 잘 보였다.
“분명 뭐가 있어. 이전까지랑 너무 다르지?”
“응, 꼭 뭔가를 숨기는 사람들 같아요.”
게다가 선뜻 메리를 찾아주겠다고 말한 티나의 반응도 의심스러웠다.
“이유도 안 묻고 선의를 베풀 만큼 친절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정확하게 알아봤네.”
레온이 후드를 뒤집어쓴 미셸의 머리통을 툭툭, 두드렸다.
그때였다.
수줍게 레온을 올려다보던 미셸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냉큼 레온의 뒷덜미를 끌어안았다.
사람들이 온다. 숨어야 했다.
“쉿. 가만히 있어, 미셸.”
레온이 미셸을 외벽 안쪽에 바짝 밀어 넣고 품 안에 가두었다.
등 뒤로 소름 돋는 한기가 뼈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물론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자신을 숨겨준 레온의 숨결이었다.
‘어머나… 가까이서 보니 더 잘생겼네.’
이런 상황에서도 미셸이 할 수 있는 건 레온의 날카로운 턱 선을 구경하는 일뿐이었다.
레온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예의 주시했다. 폭풍이 조금 걷히고 나니 사방에 감시하는 눈길이 무척이나 많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레온의 품에 안겨 있던 미셸은 머리 꼭대기에서 들리는 그 목소리에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브라운이냐, 레온이냐.
미셸이 흘끔 시선을 들어 그 흠 잡을 데 없는 얼굴을 구경할 때였다. 레온이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어머, 공자. 눈은 왜….”
“쉿.”
레온이 정신을 집중했다.
‘새끼 스노우 울프… 녀석은 분명히 메리와 함께 있을 거야.’
이곳에 도착한 후로 늘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 이 순간에도 함께 있을 가능성이 컸다.
‘녀석이라면 내 목소리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레온은 새끼 스노우 울프의 목소리를 볼 수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눈앞에서 보이는 그 생각처럼 어쩌면 놈도 그런 식으로 생각을 느낄 수 있을지 몰랐다.
‘야.’
녀석을 지칭할 이름이 없다는 건 이런 때 불편했다.
레온이 대답 없는 새끼 스노우 울프를 떠올렸다.
‘너, 어디 있어?’
부디 닿아야 할 텐데.
레온이 한참이나 눈을 감고 집중했다.
품 안에 안긴 미셸의 양 볼이 슬슬 뜨거워질 때쯤이었다.
“미셸.”
“응?”
“따라와!”
녀석이 어디 있는지 보였다. 신기한 일이다. 생각뿐만 아니라 녀석이 전하는 장면도 볼 수가 있다니.
레온은 머릿속에 떠오른 위치를 되새기며 냅다 미셸의 손목을 붙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점차 주변이 환해지고 있었다. 날이 밝을수록 들킬 가능성도 커질 터.
“헉! 허억! 대, 대체 어딜 가는데 그래요, 레온!”
“경계탑!”
“예? 갑자기 거길 왜요! 미로에는 안 가보는 거예요?”
“그곳에 메리가 있어!”
“정말요?”
레온이 가쁜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아냈는지까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미셸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급박한 상황에 의심의 눈길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기 있어?’
레온이 다시 한번 새끼 스노우 울프에게 신호를 보냈다.
녀석이 보여준 경계탑 근처까지 왔지만 둘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발밑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보였다. 아주 또랑또랑하고 날이 선 모양이었다.
-여기!
절대 녹지 않을 것만 같은 얼음 아래, 저곳에 메리와 새끼 스노우 울프가 있다.
어떻게 들어가야 하지? 어디로 갈 수 있지?
푸른 눈동자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근데 레온, 메리가 경계탑에 있다고요? 그걸 어떻게….”
“찾았다!”
“예?!”
레온이 다시 한번 미셸의 손목을 붙잡고 경계탑 외벽에 숨겨진 빙벽을 힘껏 밀었다.
그러자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통로가 나왔다. 아래는 까마득한 계단이었다.
미셸이 놀란 표정으로 입을 가렸다. 마치 와본 사람처럼 곧장 계단을 밟아 내려가자 위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시린 한기가 공간에 머무는 게 느껴졌다.
“…메리!”
어둠에 익숙해질 때쯤, 레온이 통로 끝에 위치한 조악한 감옥 안에서 메리를 발견했다.
그녀가 꾸벅꾸벅, 새끼 스노우 울프를 품에 안고 졸다가 화들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련님!”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게.”
깡깡 얼어 절대 열릴 것 같지 않은 얼음 창살이 메리를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었다.
레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새끼 스노우 울프의 꼬리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메리? 어디 다친 덴?”
“전… 괜찮지만.”
메리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곤 천천히 손을 뻗어 두 사람의 뒤편을 가리켰다.
레온의 시선이 겁먹은 메리의 눈동자를 따라갔다.
뒤편에 마련된 어두운 감옥 안에 누군가가 보였다.
미셸이 눈을 좁게 떠 확인하자 검은 인영이 시야 끝에 잡혔다.
“…기사 칼이 찾아왔어요.”
“뭐?”
메리가 바짝 다가와 레온에게 속삭였다.
“그것도 혼자,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