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10장. 태초의 설인(8)
기사 칼이라면, 센느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을 잃고 쓰러진 기사였다.
다른 병사 둘이 그를 마차에 싣고 먼저 소하를 찾아 떠났지만 모두 도착하지 못했다.
마차는 부서져 잔해만 주변에 뒹굴었고, 그들의 생사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 자의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제대로 설명해 봐. 어떻게 된 거야? 기사 칼이 저기 있다고?”
인기척이 느껴지진 않았다.
레온이 다시 시선을 돌려 메리에게 향했다.
그녀가 울먹거리며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녀석이 갑자기 뛰쳐나갔어요.”
새끼 스노우 울프가 제 이야긴 줄 아는지 작은 귀를 팔락거렸다.
“대관절 무슨 일인지… 놓칠까 봐 얼마나 쫓았는지 몰라요.”
녀석은 일행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갑작스레 털을 곤두세웠다.
내내 웅크려 자고 있던 놈이 불안한 듯 주변을 경계하며 코를 벌름거렸다.
누가 오나 싶어 장막을 걷었던 일이 화근이다.
문을 열자마자 뛰쳐나가는 녀석을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었다.
“정문 근처까지 달려간 걸 겨우 붙잡았는데. 글쎄 거기에 누가 쓰러져 있지 뭐예요.”
방금 전 일처럼 눈앞이 생생했다.
소하의 얼음 요새는 늘 외부인에게 매정했다. 굳게 닫혀 열릴 줄 몰랐다.
하나 도착한 자의 차림새는 워렌의 것과 같았다. 폰네시의 기사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상황을 설명해야 할 것 같았어요.”
정문을 지키고 있던 경계병들에게 기사 칼에 대해 말해야 했다.
적이 아니라 레온의 기사란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간 순간이었다.
“요 녀석이 글쎄….”
작은 스노우 울프가 발치에 엎드려 여유롭게 제 앞발을 핥아대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얼룩덜룩한 흔적이 남아 있다.
레온이 확 주저앉아 녀석을 살폈다. 두툼한 솜 같은 앞발에 묻어 있는 건 분명 혈흔이었다.
“칼을 공격한 거야?”
메리가 자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리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앞섰다.
다만 새끼 스노우 울프의 행동이 무척이나 날쌨다. 어찌나 공격적인지 소하의 전투원들도 손쓸 새가 없었다.
“그래서 제가 녀석의 뒷덜미를 붙잡았는데… 그때 키가 작은, 왜 이곳에 가장 높은 사람처럼 보이는 분이 나타났어요.”
티나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때 급하게 사라진 건 이 일 때문인가?’
메리가 늘어지게 하품하는 녀석의 미간을 살살 쓸었다.
갑작스레 왜 기사 칼을 공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리는 손길에 녀석은 곧장 몸을 돌렸고, 다가오는 티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 후엔… 보시다시피 이곳에 격리되었어요.”
“그것만으로 메리를 가뒀다고? 이유도 없이 이딴 곳에?”
“…네,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게 칼과 접촉했는지를 물었어요.”
쓰러진 칼을 한참 살피던 티나가 메리에게 날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높고 빨라서 마치 작은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들릴 정도였다.
“그걸 물었다고? 대체 왜?”
“얼마나, 언제부터 같이 있었는지 묻고 기사님의 상태를 확인하는가 싶더니… 절 이곳으로 데려왔어요. 이 녀석도 함께요.”
“진짜… 죽여 버릴까?”
곁에서 듣고 있던 미셸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레온은 무척이나 화가 나 보였다. 끔찍이 생각하는 하나뿐인 유모를 말도 없이 이딴 곳에 가두었으니 그럴 만한 분노였다.
미셸이 조심스레 시선을 돌렸다. 칼이 갇혀 있다는 감옥에서 인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게 이상했다.
‘칼의 상태를 확인했다면 증상에 대해 눈치챘을 거야. 아마도 그것 때문에 격리한 거겠지.’
그들은 이곳 북부에 아주 오래도록 머물렀다. 제가 모르는 전염병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상의도 없이 메리를 이런 위험한 곳에 가둔 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레온, 잠시만요.”
그때 미셸이 레온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바깥에 귀를 기울였다.
세상을 끝낼 것처럼 불어대던 거센 바람 소리 이외에 낯선 발소리가 이어졌다.
예민한 새끼 스노우 울프도 조금 전부터 공간 안을 빙빙 돌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누가 오나 봐요! 어쩌죠?”
“야, 너 나올 수 있어?”
레온이 새끼 스노우 울프에게 물었다. 그러자 녀석이 주둥일 차가운 얼음 창살 사이로 내밀었다.
암만 작은 새끼더라도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제, 제가 공격이라도 해볼까요?”
“그러다 다쳐. 그건 안 돼.”
미셸의 힘이 세긴 해도 소하의 전투원들과 비교할 정돈 아니었다.
메리가 창살을 두드렸다. 고민하는 사이 인기척이 더욱 가까이서 들렸다.
“우선 몸을 숨기세요! 저쪽으로요! 문이 열려 있는 걸 봤어요!”
두 사람이 뒤편 출입구 쪽으로 튀었다. 기사 칼이 갇혀 있는 곳이었다.
레온이 앞뒤 가릴 것 없이 미셸과 함께 그곳으로 몸을 숨기고 눈에 보이는 대로 흰 천을 뒤집어썼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끼이이익.
묵직한 발소리가 이어졌다. 누군가가 메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몸은 좀 괜찮나요?”
헙, 미셸이 새어나갈 것 같은 제 비명 소리를 틀어막았다. 언니인 마리사의 목소리였다.
“따뜻한 수프와 모포를 좀 챙겨왔어요. 몸을 좀 덥힐 만한 게 필요할 것 같아서.”
“고, 고마워요. 마침 배가 고팠는데….”
메리가 흘끔, 건너편을 살폈다.
레온과 미셸, 그리고 칼이 있을 공간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저… 혹시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할까요?”
“글쎄요. 저도 들은 게 없어서.”
“하지만 우리 도련님이 걱정하실 거예요.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모두 날 찾을 텐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예? 제가 뭔가 잘못이라도 한 건가요? …하지만 쓰러진 일행에 대해 설명했을 뿐인데.”
“그자와 접촉했잖아요.”
내내 다정하던 마리사의 목소리가 냉정하게 메리의 말허리를 잘랐다.
뒤쪽으로 시선이 가지 않도록 애쓰던 메리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랐다.
새끼 스노우 울프는 금방이라도 마리사를 공격할 것처럼 이를 드러내고 위협 중이었다.
“이런, 미안해요. 하지만… 우리 소하는 이제 더 이상 가족들을 잃을 수 없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전 이만 가 봐야겠네요, 메리.”
의도적으로 답변을 피하는 게 느껴졌다.
마리사가 새끼 스노우 울프의 몫으로 챙겨온 야생 짐승 뼈를 던져대곤 금세 뒤돌았다. 붙잡을 틈도 없었다.
‘가족들을 잃고 싶지 않다니. 역시 칼의 증상 때문인가?’
예상한 대로 전염병이 퍼지고 있는가 싶었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출입구를 통해 나가려던 마리사가 열려 있는 칼의 감옥을 확인했다.
아마 저곳을 제 발로 빠져나올 일은 더 없을 테지만….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던 곳에 마리사가 손을 뻗었다. 만약에라도 저곳을 탈출한다면 이곳 소하는 또다시 무너질 것이다.
‘그런 일은 벌어져선 안 되지.’
그녀가 허리춤에 달려 있던 열쇠로 감옥을 단단히 잠그고 발길을 돌렸다.
이제 내부엔 고요만 머물렀다.
“레온… 지금 우리 갇힌 것 같은데요?”
천 속에서 미셸이 속삭였다. 그녀가 눈동잘 굴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갑자기 뛰어들었는데 왜 아무 반응도 없지?
아니, 무엇보다 이 사람은 왜… 흰 천을 뒤집어쓰고 있는 거지?
“…레온.”
미셸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레온은 예상했다는 듯 한숨과 함께 뒤덮고 있던 흰색 천을 벗어 던졌다.
“죽은 거야, 결국.”
창백한 칼이 반듯이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안색은 먼 지난날 마주했던 진짜 레온의 것과 같았다.
“으윽!”
미셸이 기겁하며 레온의 뒤에 몸을 숨겼다.
방금 전까지 시체와 같은 천을 뒤집어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소름 돋았다.
“말도 안 돼! 그럼 지금 죽은 자를 여기에 방치한 거예요? 그것도 메리만 혼자 가둬두고?”
마리사가 다녀간 걸로 보아 소하의 전투원들도 모두 아는 사실일 것이다.
칼이 죽어버렸다는 것도, 또 불쌍한 메리를 일행들에게 말도 없이 이곳에 감금한 것도 말이다.
“아마 전염병 때문일 거야.”
“아, 맞다… 그때도 분명 이상한 증세가 있었죠?”
미셸이 황급히 레온에게서 손을 떼어냈다. 이미 너무 늦은 것 같긴 하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래, 분명 온몸에 회색 반점이….”
잠깐만.
레온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미셸도 의아함을 느끼곤 천천히 칼을 바라봤다.
“…없는데요?”
“왜 없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보이지 않는다. 온몸을 뒤덮었던 회색 반점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무, 무슨 일이세요, 도련님? 왜 그러시는데요?”
건너편에서 메리가 궁금한 듯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새끼 스노우 울프의 경계심은 죽었음에도 여전히 칼에게 향해 있었다.
“메리! 칼이 이곳에 왔을 때, 몸에 회색 반점이 있었어?”
“네? 그게… 아뇨. 이 녀석이 공격하는 바람에 자세히 살펴서 기억이 나요. 그런 건 없었어요.”
몸 위에 돋아나 있던 이상한 흔적이 있긴 했지만, 회색 반점은 보이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레온이 칼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 몸을 자세히 살폈다.
얼굴부터 목 옆, 그리고 드러난 모든 곳에 보였던 회색 반점이 작은 흔적만을 남기고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럴 수가 있다고?”
레온이 답해줄 리 없는 이에게 물었다.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티나 님, 고열 증세를 보이는 자가 세 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래?”
전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티나가 작은 입술을 씹어댔다.
‘젠장.’
칼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게다가 레온, 그 자식의 일행이라니 이미 소하에 증세가 퍼질 대로 퍼졌을 가능성이 더욱 컸다.
녀석들은 벌써 나흘째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우선 미로에 격리해두고 잘 살펴봐. 정확한 증상이 퍼진다 싶으면 곧장 보고하고.”
“…예, 알겠습니다.”
“나가봐.”
상황이 좋지 않다. 티나가 불안한 듯 넓은 거처 안을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이곳 소하에 다시 시체병이 퍼질 줄이야.
‘그것만 빼곤 분명 확실했어. 내가 지난 세월 동안 봐온 증상과 완벽히 일치했다고.’
오늘 이곳을 찾아온 기사에게선 의아한 점이 많았다.
온몸에 남아 있는 반점의 흔적들은 시체병의 특성과 일치했다. 하지만 그건 꼭 열병을 앓았다 가라앉은 자국처럼 색이 없었다.
피부 위에 작은 흔적만을 남겼을 뿐, 시체병의 가장 큰 특징인 회색 반점이 남아 있진 않았다.
‘그 병으로 죽은 수천 명의 사람들을 모두 봤어도 일치하는 증세는 없었는데.’
다만, 아니라고 확신할 수도 없는 모양새였다.
티나가 떠오르는 고통스러운 기억에 잘게 몸을 떨었다.
“…….”
어쩌면 이번에도 모두가 제 곁을 떠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몰아쳤다.
티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따라갈 수 없는 먼 곳으로 서서히 떠나고 있는 타티아나가 그곳에 누워 겨우 숨만 몰아쉬었다.
“…나만 혼자 두고.”
그녀가 타티아나에게 다가갔다.
영영 감지 않을 것 같던 두 눈이 감겨 있는 것을 보자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들었다.
“당신마저 날 버리지 마요.”
처음 타티아나를 찾아 이곳 소하에 왔을 때처럼 이곳에 시체병이 퍼지고 있었다.
또다시 모두가 죽어버리고, 그들을 떠나보내는 건 오롯이 혼자만의 몫이 될 것이다.
“…제발, 떠나지 마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수백 년마다 반복되는 것만 같았다.
죽지 못하는 자신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려면 나도 데려가 줘요.”
티나가 타티아나의 이마에 머리를 맞대었다.
여린 맘을 의지할 건 오직 그런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