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56화 (56/133)

56화

10장. 태초의 설인(9)

내 삶은 갑작스레 시작됐다.

그게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내가 마주한 세상은 공백부터였다.

“티나 님!”

타티아나의 거처 바로 옆 경계탑에 티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밤 두 사람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머무르던 전투원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오늘은 내가 경계를 설 테니 이만 돌아가서 쉬도록 해.”

“예? …그래도 될까요?”

“그래, 가도 좋아.”

아직 혹한이 머무르는 북부에서 내내 바람을 마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티나가 머뭇거리는 전투원을 내려 보냈다.

“…….”

탁 트인 높은 곳에 올라오니 얼음 요새 내부가 전부 보였다.

아주 오랫동안 굳건히 이 자리를 지킨 제 안식처가 말이다.

“…변한 게 하나도 없네.”

티나는 처음 이곳 소하에 왔던 날을 기억했다.

그날도 이처럼 알 수 없는 불안이 손끝을 시리게 만들었었다.

‘그땐 모든 게 두려웠지.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이 얼음 요새도, 마주한 현실도 전부.’

얼마나 헤매다 찾았는지 모른다.

어느 날 갑작스레 깨어난 티나는 혼란을 느낄 새도 없이 ‘타티아나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디인지, 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타티아나, 꼭 저주라도 걸린 사람처럼 타티아나만을 찾아 헤매며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적어도 십여 년은 찾아다녔어.’

그렇게 겨우 타티아나의 기운을 찾아내고 소하에 도착했을 때 느낀 건 안도감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하늘과 맞닿을 것처럼 높이 솟아 있는 얼음 요새는 금방이라도 나약한 제 몸을 짓누르고 깔아뭉갤 것처럼 보였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티나가 여태껏 의지해 왔던 낡은 막대기를 떨어뜨리고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건, 타티아나의 붉은 눈동자였다.

‘그 시기의 소하에도 이미 시체병이 퍼져 있었지.’

다시 시작된 세상은 지옥과도 같았다. 사람들이 숨을 쉴 때마다 죽어나갔다.

방금 전까지 살려 달라 빌어대던 이들이 뒤돌아서면 붙잡을 새도 없이 쓰러져 죽었다.

“정신이 드니?”

타티아나가 어린 티나의 이마를 쓸어보았다.

오랜 추위와 싸웠던 터라 티나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타티아나?!”

꿈에만 그리던 존재였다. 눈을 뜬 순간부터 찾아 헤매던 사람.

티나는 그 붉은 눈동자를 보자마자 타티아나를 알아보았다.

“티나? …내가 어째서 네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타티아나는 혼란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꼬마를 본 순간 아이의 이름이, 존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상했다. 지금껏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혼자 버티며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타티아나, 전 당신을 찾아다녔어요.”

“나를 찾아? 어째서?”

“…그건 몰라요. 하지만 찾아야만 했어요.”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낯선 흙 속에서 눈을 떴고, 머릿속엔 타티아나를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티나의 설명에 타티아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궁금한 것이 아주 많지만 시간이 없었다.

“우선 상황이 좋지 않으니 여기 있어. 곧 돌아올게.”

“저,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밖은 너무 위험해.”

타티아나가 티나의 여린 어깨를 토닥였다.

거대한 몸을 일으켜 거처를 벗어나자 근처에서 울부짖는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티나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타티아나가 그랬던 것처럼 묵직한 장막을 걷어내고 바깥을 살폈다.

‘…말도 안 돼.’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최악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병들고 쓰러졌으며, 울부짖을 힘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건 축복이었다.

곳곳에 이미 죽어 숨이 끊어진 이들도 보였다.

살아 있는 자를 살려야 하기 때문에 그들을 돌봐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시체병은 북부를 완전히 휩쓸고 지나갔다.

타티아나는 제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사람들을 살리려 노력했지만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결국 티나와 타티아나, 두 사람만을 빼놓고 소하의 모든 사람들이 시체병에 죽고 말았다.

‘백 년 후에도, 그리고 또 백 년 후에도. 일곱 번이 넘는 순간에 우리는 전부를 잃었어.’

수많은 이들이 그렇게 곁을 떠나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죽지 못했다.

그리고 죽음에 익숙해지는 동안 깨달았다.

잃기만 하는 이 엉망진창인 삶은, 완벽히 남들과 다른 삶이라는걸.

“타티아나,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예요?”

“밀라쿠 님이 나타나면 모든 걸 알게 되겠지.”

타티아나 역시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어째서 이런 삶을 살게 된 건지 전혀 몰랐다.

그저 소하에서 깨어났고, 밀라쿠를 찾아내야만 모든 게 끝난다고 믿을 뿐이었다.

“내가 깨어났을 때도 아무 기억이 없었어. 어느 날 낯선 몸에서 갑자기 눈을 뜬 것 같았지.”

그리고 갑작스레 모든 기억이 밀려들었다.

“밀라쿠 님은 반드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문을 여는 순간 우리의 비밀도 밝혀질 거란다.”

언젠가는 알 수 있을 거란 희망만이 이 상황을 버티는 유일한 이유였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쓰러졌다. 끝끝내 제 비밀을, 존재의 이유조차 알지 못하고 기력을 잃었다.

티나가 난간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그 망할 놈의 밀라쿠를 더는 두고 볼 수만은 없다.

“더 이상 부탁 따윈 안 해.”

몇 번의 세기가 지나는 동안 그에 대한 기대감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죽이지 않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할 것이다.

티나가 날 선 눈빛으로 한참이나 고요가 내려앉은 요새를 바라봤다.

“억지로라도 끌고 가겠어.”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시체병이 다시 이 도시를 무너뜨리기 전에, 불쌍한 타티아나가 긴 생명을 멈추기 전에 반드시 비밀을 밝혀내야만 했다.

그녀가 일행들의 거처로 발걸음을 돌렸다.

***

“레온… 그럼 전 너무 피곤해서 이만 잘게요.”

“그래.”

“바닥이 너무 차갑긴 한데….”

“저 흰 천이라도 줘?”

“아뇨! 그건 아니고요.”

“그럼 어쩔 수 없잖아. 가지고 있는 모포 따위도 없으니까.”

확실히 호락호락하지 않은 공자님이었다.

호시탐탐 레온의 곁을 노리던 미셸이 말도 없이 홱, 토라져 벽을 보고 웅크렸다.

“잘 자.”

곁도 안 내어주는 주제에 다정하게 인사하긴.

“공자도 그만 보고 어서 자요. 체력을 좀 아끼자구요.”

“그래.”

미셸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잠에 빠져드는 동안, 레온은 대답과 달리 뜬눈으로 칼을 살피는 데 바빴다.

‘증세가 호전된 건가.’

칼의 겉모습은 너무도 멀쩡한 사람 같았다.

회색 반점이 온몸에 퍼져 생명마저 위태로웠던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물론 결국 이렇게 차게 식어 죽어버렸지만.

‘뭔가 이상한데. 어떻게 혼자 이곳까지 찾아온 거지? 다른 병사들은 어디 있고?’

뒤늦게라도 찾아온다면 칼이 아니라 그들이 도착했어야 한다.

의식조차 찾지 못해 실려 갔던 칼이 멀쩡히 걸어서 이곳에 도착한 건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레온은 병사 둘과 칼을 먼저 소하로 떠나보내기 전, 그들에게 당부한 것이 있었다.

‘가망이 없어 보이면 칼을 버려도 좋다고 허락했는데.’

병든 자를 살리자고 살아 있는 자를 죽일 순 없었다.

만에 하나 버텨낼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칼을 버려도 좋다고 허락했었다.

‘칼의 상태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는 대단한 고열을 앓은 직후 죽은 자와 마찬가지로 저체온 증상을 보였다. 마치 심장이 언 것처럼 온몸이 차가웠다.

그런 칼이 혹한 속에서 더 버티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런 명을 내렸던 건데.

‘잠깐.’

온몸이 차가워?

레온이 처음 칼의 몸을 살폈을 때를 떠올렸다.

그날 같은 증세를 보인 말의 콧잔등을 매만졌던 기억도 더듬었다.

드러나는 구석구석이 회색 반점으로 가득했다. 꼭 몸속의 혈액이 다 굳어 멍든 것처럼 보이는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만졌을 때, 아주 차가운 얼음에 손을 댄 것처럼 따가웠다.

너무 시려 결국엔 뜨거운 것처럼 느껴지던 그 반점들이.

‘설마! 그래서 반점이 사라진 건가?’

레온이 벌떡 일어났다. 선잠에서 깬 미셸이 비몽사몽간에 두 눈을 뜰 정도로 날쌘 움직임이었다.

“레, 레온? 갑자기 그 천은 왜 들추는 거예요?”

“확인할 게 있어!”

레온이 잠든 것처럼 보이는 칼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곧 그의 목덜미 가까이로 고개를 내렸다.

대체 저게 무슨 짓이야!

미셸이 화들짝 놀라 레온에게 다가갔다.

“뭐 하는 거예요! 위험하지 않아요?”

“…….”

“뭐야. 지, 지금… 킁킁거려요?”

레온이 칼의 목덜미부터 몸 곳곳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건너편에 갇혀 있는 새끼 스노우 울프도 레온을 따라 까만 코를 씰룩거렸다.

“탄내가 나.”

“…네?”

이곳 요새로 오는 길에 마차가 불에 탄 흔적을 발견했었다.

“그들이 칼을 불태운 거야.”

“누가요? 폰네시의 병사들이요?”

“그래. 아마 그냥 버려두고 갈 수가 없었던 거겠지.”

이 혹한에 병든 자를 그냥 버려두고 가는 건 죽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몇 년이 됐을지는 몰라도 그들은 전쟁에 대비해 계속해서 훈련을 같이 받은 단원들이었다.

그냥 모른 척 이 얼음의 땅에 동료를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불태웠다면… 죽었어야 하잖아요?”

“얼어붙고 있었으니 살아난 걸지도 몰라.”

칼은 죽어 갔다. 온몸을 차갑게 얼리는 병에 걸려 점차 죽음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칼을 살렸다. 뜨거운 불 속에 칼을 던져 넣어 온몸에 퍼진 얼음 반점을 녹여냈다.

“물론 모두 내 추측이야.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닐걸?”

레온이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푸른 새끼 스노우 울프의 눈동자가 레온을 똑바로 응시했다.

“야, 너도 설호가 되기 위해선 온몸이 얼어붙는댔지?”

녀석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헉! 그래서 저 녀석을 안을 때마다 그렇게 추웠던 건가!”

설호의 특성이 생성되기 위해선 온몸에 피가 얼어붙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페페, 아니, 그녀가 읽은 고대 기록서에 따르면 설호들은 그렇게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어 이 혹한 속에서 살아남는다고 했다.

“진짜 설인이란 게 있는 걸지도 모르지.”

어쩌면 이 버텨낼 수 없는 혹한을 이기기 위한 자연의 방식이 아닐까?

“소하 녀석들에게 알려야겠어. 그들이라면 이 병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저는 너무 어리고 책도 잘 안 읽어서 모르겠지만, 언니는 이 병에 대해서 알고 있을 거예요.”

북부 사람들은 예로부터 전해지는 전설이나 풍습 따위에 무척이나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마리사 언니가 여기에 오면 제가 말해볼게요.”

“그래, 역시 미셸 넌 정말 우리에겐 없어선 안 될 존재야.”

“…지금 그거 무슨 의미예요?”

“아무 의미도 아닌….”

그르르르!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떠들어대는 동안 건너편에서 새끼 스노우 울프가 목을 울려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다른 울림이었다.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소름 끼치는 위협이 느껴졌다.

레온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메리!”

그녀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몹시도 창백한 안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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