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10장. 태초의 설인(10)
“우리 완전히 갇혔습니다.”
수많은 병력이 주변에 모두 배치됐다.
한참이나 거처 밖을 살피던 케인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고했다.
“이런… 곤란하네요. 두 분만으로는 저 많은 인원을 뚫기가 어려울 텐데.”
“아주 당연한 것처럼 본인은 포함도 안 시키는군.”
“제가 합류했다간 두 분이 절 지키고자 시간을 모두 할애해야 할 걸요?”
“왜 지킬 거라고 생각하지?”
“그럼 그냥 절 죽게 내버려 두시겠다고요?”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은 한 명뿐일 텐데?”
“그분에게 필요한 사람이 저인 것도 잊지 않으셨을 테고요?”
“누구, 나?”
“아잇 정말! 두 분 그런 다툼은 좀 됐고요! …우리 이제 어쩌죠?”
케인이 티격태격하는 워렌과 브라운의 사이를 가르고 앉았다.
넓은 거처 안엔 온기 없는 불빛만이 일렁거렸다.
레온도 없고, 메리도 없으며, 미셸이나 새끼 짐승도 모두 사라졌다.
세 사람의 표정이 단숨에 어두워졌다.
“대체 어떻게 그런 상황에 잠들 수가 있는 거예요?”
케인이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메리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 순간에 모두 약이라도 마신 것처럼 쓰러져 버리다니.
아무렴 진한 피로가 쌓인 몸이라지만 타이밍이 안 좋았다.
“그런 바람에 공자께서 나가는 걸 놓치지 않았습니까? 두 분은 정말이지….”
“케인, 잠든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전 깊은 생각에 빠졌을 뿐입니다.”
“…기사 케인께서 생각을요?”
“어투가 상당히 미묘하시네요, 부집사님? 어디가 의문인 건데요?”
에잇! 이러다간 날이 모두 밝도록 내내 입씨름만 하게 생겼다.
케인이 결국 벌떡 일어나 불안한 모습으로 거처를 뱅뱅 돌기 시작했다. 아주 정신 사나운 모습이었다.
“그토록 의지하는 분이니 직접 찾아 나서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진짜 의외예요.”
“뭐가 말입니까?”
“그 티나란 사람을 찾아가 거래를 하거나,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하실 줄 알았거든요.”
그 부분에 대해선 워렌도 동감했다. 레온은 생각 없이 일을 벌이는 성향이 아니었다.
늘 예상치 못한 답안을 찾아내거나, 제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이용해 사람을 부릴 줄 아는 자였기 때문이다.
“힘이 필요하다면 나를, 머리가 필요하다면 부집사를 이용하셨을 텐데 의외이긴 해.”
“맞습니다. 그래서 전 무슨 조건으로 소하인들을 설득할지 고민 중이었거든요.”
어째 이들의 작전이나 계획 속에 제 활약은 영 없는 듯했다.
케인이 붉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렸다.
그런 서운함은 차치하고 레온이 걱정돼 미칠 지경이었다.
‘소하인들이 공자님의 비밀을 알아채면 어쩌지?’
같은 여자라고 상냥하게 굴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데로니스 녀석들에게 사실을 약점 삼아 거래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일만은 안 돼. 온 서대륙에 공자님의 비밀이 밝혀지는 날엔….’
그 아름다운 사람을 차지하기 위해 더욱 골치 아픈 일이 생겨날 가능성이 컸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내가 갖지 못할 거라면 누구도 가질 수 없어야 했다.
“강인한 분이니 우리 걱정보다 곤욕을 겪고 계시진 않겠지.”
“맞습니다. 이곳 그 누구도 공자님을 함부로 대할 순 없으니까요.”
레온은, 아니 몬데이어는 현재 이 서대륙 내에서 가장 값어치가 큰 존재였다.
소하라고 다를 바 없었다.
늘 독립된 영역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지만, 얼음 요새가 세워진 곳도 결국 서대륙 위다.
데로니스가 이 대륙의 주인이 된 후, 지금과 같은 삶을 유지하려면 그들에게 내어줄 만한 게 반드시 필요했다.
데로니스의 전군과 맞서 싸우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그렇다고 안심할 순 없습니다.”
“그래, 작정하고 공자님을 어딘가에 가둔 거라면 그 목적이 순수하다고 볼 순 없을 테니까.”
여전히 두 사람끼리 대화하고 있는 틈에 케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까 경계병들이 하는 얘기를 좀 훔쳐 들었는데요.”
언제 그런 기회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브라운이 계속 얘기하라는 뜻으로 케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문 쪽 감시 인력이 평소보다 배로 늘었고, 티나란 사람이 그곳을 수시로 순찰하라 명했답니다. 뭔가… 구린내가 나지 않나요?”
모든 일엔 이유가 있다. 이번 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빠져나갈까 걱정이 돼서 감시하라는 건 아닐 테고요.”
“공자께서 그곳 어딘가에 붙잡혀 있는 건가?”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수상한 행적을 뒤쫓다보면 결국엔 탄로 나게 되어 있다니까요!”
케인이 제 가슴을 탁탁 치며 뻗대기 시작했다.
좋은 관찰력이다. 생색내고 고마움을 표하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만 빼면 칭찬해줄 만한 성과였다.
“거처 주변을 에워싼 전투원은 총 서른셋. 내부 경계탑 위에서 대기 중인 병력도 열다섯 정도는 되어 보여.”
“맞붙는다 하더라도 이곳 소하의 전투원이 총 이백 명 정도는 되니 모두 죽이지 않는 이상 우리가 이길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게다가 공자께서 이곳에 온 목적이 따로 있으니 완벽히 적대적으로 구는 건 불필요한 일이야.”
“…워렌께서 웬일이십니까? 그런 수를 다 가정하시고요.”
두 사람이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케인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정석대로 가려는지 모르겠네.
“왜 꼭 싸우거나, 끝장을 보거나 할 생각만 하시는 건데요? 우리에겐 아주 좋은 아군이 한 명 있지 않습니까?”
“아군?”
“그게 누군데요?”
케인이 곧은 손가락으로 워렌을 가리켰다.
“밀라쿠 말입니다. 이 소하의 전설이신.”
신화 속 존재이긴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이곳 소하인들은 워렌을 밀라쿠로 떠받들었다.
그런 좋은 조건을 가지고도 활용하지 않는다는 건 그냥 레온을 되찾지 않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당당히 그 티난지 타닌지한테 가서 요청하세요. 밀라쿠로서 일행을 잃어 매우 유감이라고요.”
듣고 보니 제법 괜찮은 작전 같았다.
물론 그런 요구를 하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확인 작업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그들이 정말 워렌 경을 밀라쿠로 믿고 있는지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밀라쿠가 아닌데 사실도 아닌 일로 어떻게 싸우란 소리지?”
“아 쫌, 아니어도 그런 척 한번 하면 안 됩니까? 공자님을 구하는데 그 정도 사기도 못 쳐요?”
“그러니까 사기가 먹히는지부터 확인하는 게 우선이라니까요.”
세 사람이 각자의 방식대로 열띤 의견을 나눌 때였다.
점차 앉아 있는 땅이 쿵쿵, 무겁게 울리기 시작했다.
“…….”
“…….”
“…….”
서로를 바라본 세 사람이 재빠르게 무기를 찾아들었다.
워렌과 케인은 내내 몸에 지니고 있던 검을, 브라운은 두 사람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무슨 일이 나면 저도 잘 좀 부탁합니다.”
시시콜콜한 장난을 나눌 여유 따위는 없었다.
수많은 이가 몰려오는 발걸음에 온 땅이 뒤집힐 것처럼 느껴졌다.
세 사람이 한곳만을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묵직한 장막이 걷히고 백색 망토를 늘어뜨린 티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워렌 라일리.”
케인과 브라운이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이곳에 들어온 직후부터 워렌은 지금껏 밀라쿠로 불려왔다. 그런 티나가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는 건 꽤나 나쁜 상황을 의미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뭘 말이지?”
워렌이 티나의 뒤를 지키는 다섯의 정예병을 살폈다.
그곳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린 마리사도 있었다.
“네놈이 밀라쿠란 사실을 입증해야겠다.”
애초에 소하는 어떤 외부인에게도 요새를 허락하지 않는 곳이다.
“밀라쿠임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너희도 한낱 외부인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에 남겨둘 이유가 전혀 없지.”
티나가 제 몸보다 두 배는 큼직한 날카로운 얼음 창을 워렌을 향해 겨누었다.
“그러니 입증해라. 그 땅의 문을 열어!”
땅의 문?
소하의 전투원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간 늘 기밀을 유지해오던 티나였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쪽 역시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더는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이제 타티아나는 언제라도 이 세상을 떠날 것처럼 보였다.
“부탁하는 법을 배우기엔 이 소하가 너무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나 보군.”
레온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워렌이 제게 창을 겨눈 티나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창의 예리한 날이 워렌의 가슴 가까이에 맞닿았다.
“내가 입증하면.”
티나가 입술을 씹었다.
다가오는 발걸음에 제대로 맞설 수 없었다.
그는 타티아나가 유일하게 밀라쿠라 칭한 존재였기에.
“내가 입증한다면, 이 소하는 내 것이 되나?”
워렌이 입가를 뒤틀며 물었다.
내내 군림해 온 어리석은 자를 향해 묻는 명백한 도발이었다.
***
워렌이 브라운과 케인을 대동하고 약속된 장소에 나타났다.
바로 타티아나와 티나가 머무르는 얼음 요새의 가장 심처였다.
“이게 맞는 걸까요?”
“글쎄요… 정말 가봐야 아는 일이겠죠, 결국.”
두 사람이 앞서 걷는 워렌의 뒷모습을 살폈다.
자세한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긴장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자신 있어 보이기도 했다.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결국 공자님을 위한 길이겠지.’
워렌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브라운이 한숨을 내쉬고 티나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연기가 자욱한 공간은 숨 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쪽이다.”
그때 티나가 연기를 가르고 모습을 드러냈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뭐, 서로 간에 다정하게 대화를 나눌 만한 사이도 아니었다.
세 사람이 티나의 뒤를 따라 가장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얇은 천 뒤에 누워 있는 타티아나가 있었다.
“이곳이다.”
티나가 타티아나를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누워 있는 곳 아래 다른 곳과 차이를 보이는 경계면이 있었다.
브라운과 케인, 두 사람이 긴장한 듯 손을 뻗었다.
이미 죽은 사람처럼 보이는 거대한 타티아나를 밀어내고 나자 곧 아래로 향하는 얼어붙은 계단이 보였다.
일행들이 그곳으로 한참이나 내려갔다.
“이런 공간이 숨겨져 있다니.”
“…다른 소하인들이 전혀 모를 만도 했네요.”
타티아나의 거처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하물며 그 존재가 자리하는 공간을 감히 살펴볼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이 앞에서 네가 밀라쿠란 사실을 증명해 봐라.”
마침내 일행들이 땅의 문 앞에 도착했다.
눈앞엔 거대한 돌로 만든 문이 있었다.
어떤 돌인지 박식한 브라운도 생전 처음 보는 모양새였다.
“…….”
가로로 긴 타원형의 문은 좁은 세로선을 중심으로 나뉘어 있었다.
워렌이 티나의 말대로 그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응시했다.
“…….”
고요가 찾아왔다. 문은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진동이 일어나 먼지가 우수수 떨어진다거나, 천천히 소음을 내며 새로운 공간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브라운이 두 눈을 가렸다. 케인도 고개를 숙이고 이제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강한 진동이 땅을 울렸다.
워렌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는 문틈 사이를 바라봤다.
도저히 바라보고 있을 수 없는 강렬한 푸른빛이 쏟아져 나왔다.
잠시도 버틸 수 없는 아주 강한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