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10장. 태초의 설인(11)
푸른빛이 쏟아졌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강한 기운에 일행들이 모두 휘청거렸다.
굳세게 잠겨 있던 기간이 긴 만큼 흘러나오는 살기도 강했다.
“…으윽.”
“부집사님, 괜찮아요?”
“숨을… 숨을 못 쉬겠는데요?”
제대로 된 검술이나 전투를 배워본 적 없는 브라운마저 느낄 정도로 아주 강한 살기였다.
비교적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케인이 서둘러 브라운을 부축했다.
티나와 워렌은 정면에서 쏟아지는 푸른빛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 열렸네.”
믿을 수 없었다. 믿기지 않았다.
지금껏 꿈쩍도 않던 곳이 이토록 쉽게 열리다니?
“…들어가야 해.”
티나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넋 나간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저곳에 비밀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진실도 있었다.
대체 뭐가 있기에 수천 년씩이나 목메게 했는지 확인해야 했다.
저 푸른빛 안에 무엇이 있는지!
“윽!”
달려든 티나가 순식간에 튕겨 나왔다.
빛이 더욱 강해지고 온몸을 짓누르는 살기가 형형하게 느껴졌다.
“티나!”
브라운이 겨우 숨을 내쉬고 쓰러진 티나를 살폈다.
넘어질 때의 충격인지 늘 뒤집어쓰고 있는 백색 망토가 벗겨졌다.
고스란히 드러난 앳된 얼굴.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린 모습에 놀라는 것도 잠시였다.
“…안 돼… 이럴 순 없어.”
들어갈 수가 없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확인을 못 하다니. 말도 안 된다.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티나가 흥분한 채 다시 한번 안쪽으로 달려들었다. 붙잡을 틈도 없었다.
“이봐요! 위험합니다!”
“으으윽!”
기다렸다는 듯 푸른빛이 다시 한번 낯선 이를 밀어냈다.
또다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온몸을 관통했다.
움직일 수 없도록 내리누르는 강한 기운에 티나가 쓰러져 몸을 잘게 떨었다.
“이를 어쩌죠?”
난감한 건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살기를 개방시켜 놓고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무력한 브라운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케인이 워렌을 불렀다.
“워렌! 워렌께서 한번 들어가 보시죠. 당신은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으윽… 확실히 문도 열었으니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해도 이 문을 연 자라면 허락될 가능성이 컸다.
워렌이 앞에 펼쳐진 공간을 살폈다. 빛으로 가로막힌 공간은 워렌에게도 두려운 곳이었다.
자신이 문을 열었단 사실조차 믿을 수 없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낭비할 시간 따윈 없다.
“좋아.”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 같은 문 앞에 다가가자 점차 내부가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시야를 가리던 푸른빛이 워렌의 발걸음마다 주변으로 흩어졌다.
워렌은 아주 손쉽게 내부에 들어섰다.
고통이나 어떤 기운도 없었다. 지켜보던 일행들이 경악했다.
“맙소사….”
설마 했는데.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워렌의 뒷모습을 좇았다.
그가 발길을 내디딜 때마다 푸른빛이 가라앉았다.
걸음 몇 번에 꼭 해무처럼 주변을 감싸는 기운이 천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워렌! 대체 안에 뭐가 있는 겁니까?”
케인이 물었다. 그를 따라 빛이 사라졌다. 이제는 사방이 어둡고 컴컴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워렌이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거대한 공간은 요새와 마찬가지로 녹지 않는 얼음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다만, 그 기온이 바깥보다 훨씬 낮았다. 숨을 쉴 때마다 전부를 얼릴 것처럼 차갑고 시린 공기가 목을 죄어왔다.
“제발! 제발 안에 보이는 걸 말해줘!”
티나의 울부짖음이 아득하게 들렸다.
스며드는 고통에 워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벽 가까이로 다가갔다.
아주 단단하게 얼어붙은 벽은 태초부터 만들어진 것처럼 도저히 깨질 것 같지 않았다.
소하의 얼음 요새 아래 이처럼 거대한 빈 공간이 있다는 것도 이상했다.
“…무기?”
워렌이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 자세히 살피니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검과 창이 얼음 속에 있었다.
아주 작은 크기의 단검부터 페르탈린의 재스퍼가 들 수 있을 만한 대검까지.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단단한 무기들이 여태껏 요새 아래 잠들어 있었다.
“…왜 이것만 나와 있지?”
공간엔 얼음에 갇힌 무기들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텅텅 비어 있는 공간 한가운데에 거대한 백색 망토와 그걸 짓누르고 꽂혀 있는 한 검이 있을 뿐이었다.
“…….”
워렌이 그곳으로 다가갔다.
망토 뒤편을 바라보자 가라앉았던 푸른빛이 다시 일렁였다.
워렌이 눈을 좁게 뜨고 손을 뻗었다. 천천히 기운을 느끼자 푸른빛이 이내 문장이 되었다.
타는 듯한 뜨거움을 지닌 피로써 얼음을 녹일지니,
그 피를 이어받은 자만이 이 검을 누린다.
“뭐가 있습니까, 워렌?”
“이거 여기선 아무것도 안 보이니 정말 답답하군요.”
빛이 사라지며 이제 공간을 지배하던 살기는 모두 거두어졌다.
내내 케인을 부둥켜안고 있던 브라운이 사실을 깨닫곤 어색하게 자세를 바로 했다.
티나 역시 저릿한 감각이 사라지고 나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간절한 모습으로 기다렸다.
들어설 수도, 감히 마주할 수도 없는 진실을 끌어다 줄 수 있는 건 오직 워렌뿐이었다.
‘제발…….’
얼마나 이 순간을 고대했는지 모른다. 셀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모를 이 삶을 어쩌면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부디 타티아나가 떠나버리기 전에, 가여운 그 존재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지 않도록 돕고 싶었다.
“밀라쿠!”
들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푸른빛이 나뉘었다.
꼭 워렌의 발걸음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빛과 기운이 그의 주변만을 맴돌았다.
한참이나 나오지 않던 워렌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티나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게… 뭡니까, 워렌?”
“…저 빛은 모두 저기서 뿜어져 나온 것 같은데요?”
워렌이 형형하게 빛나는 푸른 검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내부를 둘러싸고 있던 기운이 그 순간 검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바람이 일고 브라운이 휘청거릴 만큼 아주 강력한 기운이었다.
“…큽!”
검을 쥐고 있는 워렌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그가 잠시간 눈을 감고 기운을 받아들이기 위해 버텼다.
서로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했는지 손에 쥔 검이 잠잠해진 게 느껴졌다.
“워렌… 아니, 밀라쿠 님. 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티나가 조금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 숙였다.
눈앞의 이 사람은 정말 밀라쿠가 맞다. 타티아나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드래곤과 맞서 싸워 이 땅에 요새를 세우고 후예들을 불러 모은 태초의 설인이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다만, 워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제 손에 쥔 검을 내려다봤다.
꼭 들지 않은 것처럼 가벼운 검은 푸른 기운을 잔뜩 머금고 영롱하게 빛났다.
‘어째서 문이 열린 거지? …내가 밀라쿠일 리가 없잖아.’
그간 시궁창 인생을 살아왔다.
루시오를 만나기 전까지 늘 바다와 대륙 곳곳을 떠돌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보잘것없는 인간이 소하의 주인일 리가 없을 텐데.
“저기 보세요. 이제 들어갈 수 있는 것 같은데요?”
케인이 내부를 가리켰다.
푸르게 빛나던 기운이 가라앉고 나자 입구를 가로막던 경계면이 사라진 게 보였다.
워렌이 티나를 바라봤다. 밀라쿠일 리가 없으니 그녀가 제게 무례를 저지른 적도 없다.
“나는 소하도, 밀라쿠란 이름도 필요 없어.”
하지만 원하는 게 있다.
“여길 나가는 즉시 공자님을 만나야겠다.”
“…명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티나는 바닥에 고개 숙인 채 일어날 줄 몰랐다.
워렌은 그녀에게 아무 명도 내리지 않았다.
결국 나서는 건 케인과 브라운의 몫이었다. 두 사람이 입구를 가로막고 있으니 지나가려야 지나갈 수도 없었다.
“자자! 용서도 했고, 빚진 건 없는 셈이니 일단 들어가 보자고요.”
케인이 부추기고서야 티나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브라운은 이미 조심스레 내부로 발길을 돌린 상태였다.
“정말 기겁할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군요.”
내부는 얼음 요새 전부를 떠받치고 있는 듯한 규모였다.
완벽한 원형 공간이라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그 크기는 소하의 요새와 완벽히 일치하는 것 같았다.
브라운이 벽면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얼어붙은 표면 깊은 곳에 수많은 무기가 펼쳐졌다.
정말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밀라쿠 님, 이것 말고 다른 건 없었습니까?”
티나가 한가운데에 나뒹구는 백색 망토를 집어 들었다.
방금 전까지 메시지가 새겨져 있던 그 망토였다.
“그게 뭔데요?”
브라운과 케인도 그곳에 모여들었다.
푸른빛은 더 이상 없었지만 어렴풋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메시지는 읽을 수 있었다.
“타는 듯한 뜨거움을 지닌 피로써 얼음을 녹일지니….”
“그 피를 이어받는 자만이 이 땅을 누린다…?”
도대체 이게 뭔 소리래.
다만, 이 넓은 공간에 살펴볼 것이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망토와 함께 남아 있는 이 푸른 검을 제외하면 말이다.
“확인할 수 있는 건 그 메시지와 검뿐이었다.”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진실을 마주하고도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니.
티나가 주저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 거짓말이었어.”
이곳의 문만 열면 전부 알게 될 거라고 했는데 알 수 있는 게 없다. 티나가 좌절하여 고갤 숙였다.
뜨겁게 고여 있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봤자 이 얼음은 녹일 수 없을 테지만.
“…….”
위로할 말이 없었다.
일행들은 그저 티나가 모두 울기를 기다려 주었다.
그때였다.
한참 눈물 흘리던 티나가 바닥에 비친 것을 살피기 시작했다.
투명한 눈물 위에 비친 천장에 낯설고 이상한 것이 보였다. 꼭 저를 집어삼킬 듯이 입을 벌린….
“미, 밀라쿠 님… 검을, 검을 비춰주세요!”
공간을 채우던 푸른빛은 이제 워렌이 든 검에만 머무르고 있었다. 어둡고 캄캄해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티나의 간절한 외침에 워렌이 그녀에게 다가가 검을 높게 쳐들었다.
“저게 대체 뭐죠?”
“…맙소사!”
브라운이 입을 틀어막았다. 케인은 벌떡 일어나 제 눈을 비비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천장 가장 높은 곳에 커다란 아가리를 벌린 무시무시한 짐승의 머리가 있었다.
“저 높은 곳에 있는 게 머리면… 그럼 이건 뭐지? 설마 몸통인가?”
브라운이 재빨리 입구로 달려갔다. 멀찍이서 물러나 거대한 공간을 한눈에 담으니 전체적인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불을 내뿜을 것처럼 공격 태세를 갖춘 전설 속 존재가 보였다.
“…여길 둘러싸고 있는 건 거대한 날개입니다.”
아래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녀석은 아주 넓게 날개를 펼친 상태였다.
일행들은 그 공간 안에 들어와 있었다.
워렌이 주변을 살폈다. 수많은 검은 녀석을 공격하는 무기였다.
날개 곳곳, 더 이상 날지 못하도록 베어나간 검들이 피막에 박혀 있었다.
“에이, 설마요. …제가 생각하는 게 진실일 리가 없잖아요.”
케인이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너무 비현실적이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다들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놀란 표정의 브라운이나, 눈물조차 닦지 못한 티나의 얼굴을 보니 그런 것 같진 않았지만 말이다.
“진짜… 드래곤이라고요?”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알았다.
“…진짜로?”
지금껏 소하의 요새를 떠받치고 있는 건, 얼어붙은 드래곤이란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