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59화 (59/133)

59화

10장. 태초의 설인(12)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드래곤과 관련된 이야기는 박식한 브라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영역이었다.

“이곳 소하를 세운 밀라쿠가 드래곤과 맞서 싸우다 죽었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북부에 전해져 오는 소하의 탄생 배경은 그러했다.

동북부 사람인 케인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설화였다.

“설마 저게 그 드래곤일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실재하는 드래곤을 보니 영 가능성 없는 일도 아닌 것 같다.

녀석의 생명을 빼앗고 그 위에 얼음 요새를 세우다니.

“만약 그 전설이 정말 사실이고, 여기 얼어붙은 드래곤이 그 드래곤이 맞다면….”

브라운이 워렌을 바라봤다.

소하의 여족장이 그를 밀라쿠라고 칭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건 아닐까?

상식적으로 수천 년은 족히 된 이야기 속 인물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었다.

게다가 전설 속 밀라쿠는 드래곤을 처리하다 죽었다고 분명히 전해졌다. 그렇다는 건.

“워렌, 당신은 밀라쿠의 후예가 아닐까요. …그러니까 뭐, 설인이라든가 그런 존재 말이에요.”

“아니.”

내내 듣고 있던 티나가 눈물을 훔쳐내며 단호하게 답했다.

일행들이 대화에 끼어든 그녀를 바라봤다.

“설인 같은 건 없어.”

“예?”

“우리 소하인들은 설인이나 그들의 후예 같은 게 아니야.”

“대체 그게 무슨 소립니까?”

티나의 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세상엔 소하에 설인의 후예가 모여든다고 알려져 있었다.

얼음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이 혹한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건 모두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럼 밀라쿠의 꿈, 계시를 받고 이곳에 왔다는 저 전투원들은요?”

“맞습니다. 설인의 후예도 아닌데 저 수많은 사람이 모두 같은 꿈을 꾸고 여기 모였다고요?”

“그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미셸에 의하면 마리사만 하더라도 어떤 꿈을 꾸고 소하행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티나를 바라봤다.

“…모두 설명할 순 없지만 그들이 꾼 꿈은 타티아나 님이 보낸 메시지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밀라쿠를 찾기 위해 타티아나는 주술로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다만, 그것도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생명을 걸고 일으킨 주술은 완벽하지도, 영원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현재 이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하나의 목적만을 갖고 마지막 선택을 마쳤다.

“죽기 위해 이곳에 온 자들이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죽어도 상관없는 자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모두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소하를 선택했지. 그저 태어났단 이유만으로 선택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포기한 채 말이야.”

“죽기 위해 여기에 왔다고요?”

“그래, …아니 어쩌면 살고 싶어서 온 거겠지. 적어도 우린 서로를 죽이지 않으니까.”

그들은 이름 뒤에 따라붙는 가문이나 벗어날 수 없는 편견, 그 모든 핍박을 벗어두고 적어도 죽음 앞에 평등한 소하로 찾아온 이들이었다.

티나가 후련한 듯 모든 설명을 마치고 워렌을 바라봤다.

“그러니 당신은 아마도… 용의 혈족일 겁니다. 그들이 존재한다는 소식은 어렴풋이 들었어요.”

이거 정말 알면 알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환장하는 이야기뿐이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워렌과 티나를 번갈아 보던 케인이 결국 제 붉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뭐가 됐든 인간은 아니란 소리잖아요?”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인간이 저렇게 검을 잘 다룰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어딘가 묘하게 감정적으로 서툴러 보이는 행동거지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사람이면 그러면 안 되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케인이 눈을 부릅뜨고 워렌을 노려볼 때였다.

“아직 확실한 일도 아닌데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니에요?”

브라운이 툭, 그런 케인의 옆구리를 찔렀다.

확실히 워렌은 그간 만나온 사람 중에 눈이 가는 외모였다.

뿐만 아니라 서대륙에서 쉬이 본 적 없는 푸른 벽안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저 검에 스며든 푸른빛과 꽤 닮기는 한 것 같지만… 뭐, 세상에 벽안이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요.”

“맞습니다. 푸른 눈동자 하면 또 우리 공자님께서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아, 그럼요. 그 아버지이신 루시오 공작 저하께서도 아주 푸른… 눈동자셨죠.”

“…세 분 다 외모가 아주 특별하다는 공통점이 있긴 한데….”

말을 하다 보니 이상했다.

태어나 푸른 눈동자를 가진 이는 지금껏 저 셋밖에 보지 못했다.

게다가 루시오, 레온, 워렌이라면 어딘가 연결점도 있어 보였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이만 여길 나가는 게 좋겠는데.”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무슨 용의 혈족이 길가에 나뒹구는 돌만도 못하게 버려져 있단 말인가.

워렌이 티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더 이상 여기서 시간을 허비할 순 없다. 레온을 만나러 가야 한다.

“공자님을 뵈러 가야겠으니 이만 나가도록 하지.”

“예, 밀라쿠 님.”

그녀가 조심스레 워렌의 손을 맞잡은 순간이었다.

“…으윽!”

맞잡은 손부터 얼음이 관통한 것처럼 온몸이 떨렸다. 티나가 워렌의 손을 놓지도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몸에 퍼져 있는 세포 하나까지 모두 짓이겨지는 느낌이었다. 고통이라고도 표현할 수 없다.

지금껏 잠들어 있던 어떤 기억들이 한순간 워렌과 연결되어 제게서 날카롭게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티나?”

“살, 살려… 줘!”

티나가 숨을 헐떡거리며 빌었다.

어떤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쓰러져 죽어버린 과거의 모습이, 그런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제발…!”

원치 않던 삶이 끝과 동시에 다시 시작되는 그 순간이 떠올랐다.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한 순간.

“티나!”

그녀가 두 눈을 감았다. 꼭 죽은 사람처럼.

***

“레온! 그러다 다치겠어요!”

미셸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그러나 그녀가 하는 말은 정확히 와닿지 않았다.

“제발, 제발 열리라고!”

메리가 쓰러졌다. 저 차가운 곳에 불쌍한 늙은이가 기댈 곳도 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레온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미셸의 걱정이 방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 망할!”

레온이 주변을 살폈다. 칼이 지니고 있던 장검이 보였다. 드는 것조차 쉽지 않은 무게였지만 지체할 시간도 없었다.

미셸이 어찌할 줄 모르고 레온을 도왔다.

덜덜 떨리는 레온의 손에 장검을 쥐어 주고 조심스레 뒤로 물러났다.

“흐으읍!”

레온이 묵직한 검으로 얼어붙은 창살을 내려쳤다. 양손으로 온 힘을 다해 있는 힘껏 내려쳤지만 돌아오는 건 고통뿐이었다.

깨질 리가 없다. 애초에 검으로 저 창살을 부수겠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목 놓아 메리를 부르기만 할 순 없었기에.

“레온….”

감당할 수 없는 충격으로 레온의 손은 이미 온통 멍들어 부어 있었다.

지금껏 검을 휘둘러본 적도, 그 검에 간절함을 담아본 적도 없었다.

열 수 있을 리 없다. 힘 앞에 무능하단 사실이 이처럼 끔찍한 적도 없었다.

“…메리… 제발.”

레온이 주저앉아 건너편에 쓰러진 메리를 바라봤다.

새끼 짐승이 두툼한 앞발로 툭툭, 그녀의 어깰 쳐댔다.

솜털이 자잘자잘하게 올라온 머리통은 조금 전부터 메리의 미동 없는 몸을 밀어댈 뿐이었다.

‘내 말 들리지? …메리는 어때? 몸이 뜨거워? 회색 반점은? 네가 공격하던 놈이랑 같은 모습이야?’

레온이 새끼 스노우 울프를 향해 물었다.

계속해서 메리를 건드려대던 녀석이 그 목소리에 바짝 고개를 들었다.

-뜨겁다! 메리, 죽는다!

얼어붙은 작은 몸으로 느끼기에 메리의 체온은 꽤나 높고 불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레온이 칼을 돌아봤다. 그는 분명 열이 펄펄 끓은 직후 회색 반점이 퍼졌다.

그렇다는 건 아직 시간이 있단 소리다.

“문 열어! 제발 좀 열어줘요!”

미셸이 듣지 않는 바깥을 향해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누구라도 도와주길 바랐다. 경계탑에 분명 사람이 있을 텐데.

레온이 다시 한번 제 앞에 나뒹구는 검을 집어 들었다.

절대 녹지도, 깨지지도 않는 다이아 스틸로 만들어진 공간임을 알고 있지만 이대로 있을 순 없었다.

“으으으윽!”

레온이 마구잡이로 검을 내려쳤다. 어깨에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검을 쥐고 있는 얼어붙은 손엔 힘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돼.’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한평생 인간을 혐오했던 자신에게 그 사실은 슬픈 일 따위가 아니었다.

하지만 메리는 다르다. 메리는 한낱 인간이 아니다.

그녀에겐 불러줄 이름이 있고, 그 이름에 담아온 감정은 수천 년을 살았어도 명확히 칭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메리.”

아직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 그 이름 뒤에 아무런 감정도 표현해 본 적 없다. 고맙다거나, 하다못해 미안하다거나.

레온의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렀다. 가는 걸음을 가로막은 다이아 스틸을 바라보자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이대로 메리를 떠나게 둘 것 같아?”

레온이 검을 내던졌다. 이제 이딴 건 필요 없다.

“…공자? 뭐… 뭘 하려고요?”

레온이 창살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거세게 손을 뻗었다. 얼어붙은 피가 덕지덕지 묻은 손으로 창살을 붙잡았다.

앞길을 막는 건 이제 단 하나도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결정했다.

깨뜨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손끝에 기운이 몰려드는 게 느껴졌다.

레온은 제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다.

미셸이 경악하며 그런 레온을 바라봤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형형히 빛나기 시작했다.

파악!

“헉! …말도 안 돼!”

그녀가 입을 틀어막았다.

단단한 창살이 산산조각 났다. 레온이 손에 쥔 것만으로 흔적도 남지 않고 부서졌다.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제 눈으로 직접 보고 겪은 일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미셸이 창살 가까이로 다가가 살폈다.

“…지, 진짜로 깨졌네.”

거짓이 아니었다. 가루가 되어 부서진 파편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창살을 깨뜨린 레온이 미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달렸다. 새끼 짐승이 잇몸을 드러내며 창살에 온몸을 들이받을 때였다.

“공자님!”

콰앙!

잠시간 밝은 달빛이 주변을 밝히는가 싶더니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이어졌다.

미셸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기다리던 모두가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브라운! 메리가 쓰러졌어요! 어서 문을 열어야 해요!”

“이런, 지금 티나 씨는 쓰러졌을 텐데. 이를 어쩌죠?”

“아! 마리사 언니에게 열쇠가 있어요. 언니를 불러와야 해요!”

“그럼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

일행들이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 워렌이 성큼성큼 레온에게 다가갔다.

그곳엔 주저앉아 양손으로 창살을 쥐고 흔드는 공자가 있었다.

레온은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고운 얼굴엔 눈물이 가득했다.

“공자님, 물러나십시오.”

“…워렌?”

레온이 고개를 돌렸다.

워렌이 일어날 줄 모르는 레온의 손목을 붙잡고 울고 있는 그 몸을 밀어냈다.

손에 쥔 검에서 기운이 느껴졌다. 이 검이라면 반드시 베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워렌이 일격에 푸른 검으로 공간을 베어냈다. 단단히 얼어붙은 다이아 스틸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메리!”

둘 사이에 가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켜보던 레온이 온 힘을 다해 달려들었다.

이제 남은 건 메리를 만나는 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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