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10장. 태초의 설인(13)
“유모님은 좀 어떱니까?”
“열이 심하긴 하지만 의식도 있고 호흡도 정상이야.”
메리를 돌보고 있는 페페를 대신해 마리사가 일행들에게 상황을 공유했다.
어머니로부터 이것저것 보고 배운 게 많은 미셸도 곁에서 메리의 열을 내리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공자님, 공자께서도 상처를 돌보셔야 합니다.”
“맞아요. 손이… 정말 엉망인데요.”
브라운과 케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레온을 살폈다.
레온이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제 손을 내려다봤다.
단단한 다이아 스틸을 쥐고 깨뜨린 여파로 피부는 꼭 불길에 덴 것처럼 보였다.
“…필요 없어.”
이깟 상흔은 조금만 그냥 둬도 라피스가 치유해 줄 수준이다.
‘하지만 메리는….’
레온이 고개를 돌려 잠에 빠진 메리를 바라봤다.
체력도 떨어지고 피로를 회복하기도 전에 곤한 일을 당했으니, 열병에 걸릴 만도 했다.
메리에게선 다행히도 시체병의 특성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시체병에 대한 정보는 너무 적었고, 메리의 상태가 언제 나빠질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리사,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레온이 눈만 내놓고 코와 입을 가린 마리사에게 물었다.
“그 시체병이란 거. 완화됐다거나, 모두 나은 사람은 없었어?”
그녀가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직접 겪어본 적은 없는 일이라 자세히 아는 바가 없지만, 아마 전례가 없을 거야.”
그간 특정할 수 없는 주기마다 시체병은 북부를 뒤덮었다.
발병 원인이나 대비 방법도 몰랐다. 한번 시체병이 퍼지기 시작하면 북부엔 말 그대로 시체만이 남았다.
“알아낼 여유가 전혀 없었을걸.”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은 언제 또 닥쳐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저 몸을 사리고 죽은 듯이 틀어박혀 혹한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럼 병에 걸린 시신들은 모두 어떻게 했지?”
“모두 불태워 버리지. 모든 전염병에 걸린 시체들을 처리하는 것처럼 말이야.”
“불탄 시체들에 대한 기록이 있을까?”
“그건… 근데 대체 뭘 알아보려는 거야, 레온?”
“확인할 게 있어. 불탄 시체들에서 반점이 남아 있는지.”
“뭐?”
마리사가 물었지만 궁금한 건 일행 전부였다.
메리의 곁을 떠나지 않던 새끼 짐승마저 귀를 세우고 레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온이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고 피곤한 모습으로 답했다.
“기사 칼은 알다시피 이미 시체병에 걸린 상태였어.”
속일 생각은 없었다. 그 사실을 놓친 브라운이 미안한 듯 마리사를 바라봤다.
“메리는 죽기 직전의 칼을 직접 만지기까지 했지. 이미 약해진 몸이니 병이 옮았을 수도 있잖아?”
“…뭐, 시체병의 전파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긴 하니까.”
“그러니까 이대로 아무 대비 없이 두고 볼 수만은 없어. 메리가 죽는 꼴은 절대 못 봐.”
아주 적은 가능성이었지만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도 아니다.
레온이 칼에게서 발견한 사라진 흔적과 가정하고 있는 사실을 일행들에게 설명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가장 먼저 마리사가 소리 질렀다.
메리를 돌보던 페페도 벌떡 일어나 경악한 참이었다.
병에 걸린 사람을 불태워 보라니?
“병이 낫는 건 고사하고 사람이 죽는 일 아닌가요… 그건?”
케인이 오래간만에 맞는 소리를 했다.
옆에 서 있는 브라운의 옆구리를 툭툭 찌르고 어서 의견을 보태란 의미로 바라보니,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뭐야. 똑똑한 사람이 고민하니까 이거 더 무서운데.
“글쎄요. 영 말이 안 되는 소리도 아닙니다.”
일행 중 유일하게 브라운이 레온의 의견에 동조했다.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예요. 병이 퍼지기 전에 사람을 죽이잔 소리를 하는 거예요?”
도저히 못 들어주겠는지, 화가 난 페페가 허리에 손을 얹고 브라운을 노려봤다.
“그 시체병이란 거. 남겨진 몇몇 기록에 따르면 온몸에 회색 반점이 퍼지는 게 유일한 특징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요. 근데 그게 왜요?!”
“멍든 자국이나 외부 충격에 의한 상흔일까요?”
“그건 아닐 거예요. 그래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여기 모인 전부 시체병을 겪은 세대는 아니었다. 그저 눈에 띄는 특징을 적어둔 기록지만 병을 가늠하는 유일한 기준일 뿐.
칼의 병세를 놓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무리 유능한 브라운일지라도 겪어본 적도 없는 일을 알아내는 천리안은 갖지 못했다.
“그럼 원인은 몸속에 있는 거잖아요. 이를테면 몸이 얼어붙는.”
다만 브라운에겐 주어진 조각들로 완벽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단순히 피부가 괴사하고 손상되는 정도가 아니라 몸을 구성하는 전부가 손쓸 새도 없이 얼어버리는 거라면요?”
“모두 얼어붙기 전에 녹여 버리는 거지, 불태워서.”
레온이 브라운의 생각에 제 확신을 덧붙였다.
뼛속 깊이 얼어붙는 한기를 녹여낼 만한 방법은 그런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내 병사들이 칼을 직접 불태우기도 했고. 어쨌든 그는 살아서 이곳까지 직접 걸어왔잖아?”
“저 칼이라는 자가 시체병에 걸렸던 게 아닌 거라면?”
“그건 아냐. 내가 확실히 봤거든. 게다가 칼뿐만 아니라 우리 마차를 끌던 말도 그 병에 걸렸었고.”
레온의 답에 마리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동물에게도 옮겨붙었다면 확실한 건데.”
“아! 그래서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 녀석이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래, 페페.”
모든 정황이 확실했다.
이 북부에 다시 시체병이 퍼져나가고 있음을 더 이상은 부정할 수 없었다.
가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케인도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살리기 위해 불태우다니… 뭐, 요새를 떠받치고 있는 드래곤까지 본 마당에 더 놀랍지도 않네요.”
드래곤이라고?
레온을 비롯한 페페, 미셸, 마리사가 전부 케인을 바라봤다.
제게 쏠리는 시선에 케인이 화들짝 놀랐다.
“지금 드래곤이라고 그랬어, 케인?”
“예? 아… 이거 비밀이던가요?”
“…딱히 비밀은 아니죠. 우리도 알게 된 마당에.”
다만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선 아직 확실하지 않은 워렌의 정체를 밝혀야만 했다.
자연히 두 사람의 시선이 워렌에게 향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고개를 들 때였다.
“마리사! 마리사, 안에 있어?!”
일행들이 모여 있는 거처 밖에서 울부짖는 다급한 소리가 이어졌다.
“무슨 일이야?”
“노아가 쓰러졌어!”
“뭐? 증상은?”
“반점이 나타났어. 이걸로… 벌써 세 명째야. 이제 어쩌지?”
고열을 앓던 세 사람 중 드디어 마지막 한 사람마저 쓰러졌다.
이미 두 사람은 회색 반점과 함께 유명을 달리한 상태였다.
전투원이 울부짖으며 마리사의 손을 붙잡았다. 이대로 노아마저 잃을 순 없었다.
“대체 티나 님께선 어디 계신 거야, 마리사!”
“…그건.”
타티아나와 티나가 쓰러진 건 이곳에 모인 사람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마리사가 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모든 일을 결정할 사람이 없다니.
“마리사, 네가 선택해.”
“무슨 선택.”
“살릴 시늉이라도 해볼지, 아니면 아무것도 안 한 채 포기해 버릴지.”
“뭐? …그걸 내가 어떻게 선택해! 나 같은 게 대체 뭐라고.”
“지금 네 주제를 운운하며 상황 회피나 할 때야?”
“…무슨.”
“넌 살아 있어. 적어도 죽어가진 않고 있잖아.”
죽기 위해 이곳을 찾았지만 비로소 소하에서 죽음보다 중요한 걸 찾았다.
살아 있다는 게 이처럼 기쁜 일인 줄 몰랐다.
마리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곁에 있는 페페를 바라보니 꼭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살아 있는 자를 살리기 위해 해볼 수 있는 건 뭐든 해봐야지.”
레온이 마리사의 두 손을 잡았다.
해보지 않으면 영원히 모르고 지나칠 뿐이다.
두려움에 상황을 피하기만 한다면, 결국 주변 모두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해보자.”
고민은 짧았다. 이대로라면 어차피 노아는 죽게 된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무거운 결정이었지만 옳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마리사가 레온의 푸른 눈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소중한 사람이 죽는 건 그 무엇보다 큰 고통일 테니.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해봐야 했다.
***
불이 시체병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인지 확인하는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시체병에 걸린 노아를 옮기는 일엔 모두가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일에 동의하지도 않지만 방법이 없잖아. 누가 위험을 감수하고 노아를 옮길 수 있지?”
방금 전까지 울부짖고 있던 전투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노아가 있는 곳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시체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두가 예민해져 있는 만큼 최대한 이 일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누가 시체병이 옮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냐고.”
전투원이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일행들을 노려봤다.
말만 번지르르 해대지만 누구도 두려움 앞에 자유롭진 않을 터.
“봐, 아무도 없지?”
레온이 일행들을 살폈다. 제가 옮기겠다고 나선다면 말릴 게 분명한 사람이 벌써 셋이나 보인다.
심지어 명령이 통하지도 않는 독한 놈들이다. 게다가 다이아 스틸을 깨뜨린 여파도 있었다.
노아가 아니라 새끼 짐승을 안고 옮기래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래도 녀석들을 위험에 빠뜨릴 순 없어.’
메리를 살리자고 그런 짓은 할 수 없다.
레온이 간신히 숨을 내쉬고 입을 열 때였다. 곁에 머무르던 워렌이 레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무슨 생각인지 워렌이 역할을 자처했다. 다만 그에겐 허락이 필요했다.
“공자께서 확인할 것이 있듯, 저 역시 확인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하지만 너무 위험하잖아. 시체병이 옮을 수도 있다고.”
“이 방법이 통한다면 병에 걸리더라도 공자께서 절 살릴 수 있습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 이번이 아니라면 레온에게 허락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확인해야 될 게 뭔데?”
“왜 이렇게 살아야만 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뭐?”
“제가 누군지 확인해야겠습니다.”
왜 그토록 끔찍한 인생을 살아야만 했는지 알고 싶었다.
“보내주세요.”
레온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워렌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부탁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막아선 안 되겠지. 레온이 주춤거리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멀어져 가는 워렌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일행들의 호들갑이 이어졌다.
“워렌이라면… 시체병 따위 통하지 않을지도요?”
“그건 인간이나 짐승이나 가리지 않고 걸리는 병입니다.”
“아… 그렇다면 역시 위험한 걸까요?”
“대체 무슨 생각인지.”
케인과 브라운이 실컷 떠들어댈 때였다.
워렌이 먼 곳에서부터 노아를 안고 나타났다.
“불은?”
“준비됐습니다.”
정예병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교환했다.
순식간에 나무에 불이 붙었다. 활활 타도록 높게 쌓아올린 장작더미에 불이 매서운 바람을 타고 거세게 불어닥칠 때였다.
“워렌……?”
노아를 품에 안은 워렌이 지체없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워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퍼져나가는 새카만 불꽃, 그건 기억 속에 묻어뒀던 지난 과거 속으로 통하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