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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61화 (61/133)

61화

11장. 푸른 피(1)

엔드해와 가장 밀접한 자유 도시 마다비아엔 출신을 알 수 없는 자들이 모여 산다.

늘 먼지에 뒤덮인 모습으로 사람들 발길에 차이던 어린 워렌도 그곳에 살았다.

“이 녀석! 너 또 여기서 잔 거냐? 그러다 정말 죽는다니까!”

험악한 표정에 날 선 말투였지만 물장수 데칸은 곧장 워렌에게 깨끗한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

거지꼴을 하고 있는 어린 소년이 눈을 비비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 추위에 바닷가 부두 근처에서 맨몸으로 자다니. 볼 때마다 시체처럼 누워 있어 심장이 다 떨어질 지경이었다.

“자!”

워렌이 더러운 손으로 급히 물을 받아 마셨다.

씹을 게 전혀 없었지만 지난 삼 일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에 그 무엇보다 맛있는 식수였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감사는 무슨. 내가 한 번에 값을 받아내겠다고 했을 텐데?”

무슨 빚쟁이가 갚을 날도 안 받고 퍼주기만 한단 말인가.

워렌이 제 몸 위에 덮인 낡은 천도 도로 건넸다. 한기에 얼어 죽을까 걱정되어 덮어주었을 것이다.

“뭔 녀석이… 매번 주는 나도 이상하다면 그런 때마다 번번이 돌려주는 너도 참 별나다.”

“이미 너무 많은 빚을 졌어요.”

“글쎄, 그거 다 받아낼 거라니까!”

데칸이 괜히 홱, 잔을 빼앗아 들었다.

어린 소년은 입맛을 다셨다. 물 한 잔을 더 마시고 싶지만 먼저 요구하는 법은 절대 없었다.

“야, 이놈아. 빚을 감해줄 테니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한번 해봐라.”

갈 길은 멀었지만 정해진 목적지는 없다. 데칸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어린 워렌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푸른 눈동자가 그를 멀뚱히 응시했다. 때깔이 더러워 그렇지, 잘 씻겨놓으면 봐줄 만한 얼굴이었다.

“너 왜, 기억나는 게 없다고 했지? 가족이나 네 출신지 같은 것 말이다.”

“예, 아저씨.”

“어렴풋하게라도 떠오르는 게 정말 없는 거냐?”

워렌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염을 길게 기른 데칸이 턱을 문질렀다. 어린놈이지만 속을 간파하기 어려웠다.

‘거짓말 같진 않은데.’

피하지 않는 눈길과 미동도 없는 눈동자가 그랬다.

데칸이 흠, 깊은 고민을 이었다.

“인마, 너 언제까지 이렇게 살래?”

몇 년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밥을 먹은 날보다 못 먹은 날이 훨씬 많아 보였다.

피죽도 못 삶아 먹은 비쩍 곯은 워렌을 보다가 데칸이 다시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심지어 할 일조차 없어 이렇게 길가에 쓰레기처럼 굴러다니는 일 말이야.”

타인에게 듣는 현실은 더 시궁창인 법이다.

“너 툭하면 광장 패거리 놈들에게 매 맞지? 네가 훔쳐낸 건 다 뺏기고.”

“아닌데요.”

“웃기지 마. 내가 다 봤어.”

워렌이 데칸을 쏘아봤다. 알면서 묻는 건 치졸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다.

“그건 제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거거든요?”

“보기보다 순수하네.”

“또 뭐가요.”

“그게 정말 나이 때문에 그런 것 같아? 네가 자라면 자라는 대로 다른 놈들도 커버릴 텐데.”

“그때는…!”

“앞으로도 똑같지. 지금 너를 이기는 놈들은 앞으로도 계속 이겨.”

듣자 하니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잘 자고 있던 사람을 깨워서 시비를 걸려는 건 아닐 테고.

“그래서 어쩌라고요.”

데칸이 부둣가에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은 워렌과 냉큼 간격을 좁혔다.

그러고는 팔꿈치로 말라빠진 녀석의 옆구릴 툭 찔렀다.

“너, 나랑 이곳을 떠날래?”

***

언제 마다비아로 흘러 들어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떠보니 광장 쓰레기 굴에 있었을 뿐.

어쩌면 이곳에서 태어났고, 기억할 게 없어 기억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도 상관없다. 나아질 것도 없는 삶에서 그런 조건들은 최악이나 차악이냐의 차이일 뿐이었으니까.

“…….”

워렌은 짐이랄 것도 없는 제 낡은 소지품을 챙겼다.

태어나면서부터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 하나와, 부둣가에서 주운 날카로운 화살촉이 그 전부였다.

“가지고 가야 하나.”

사실 잘 모르겠다. 별로 쓸모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화살촉은 호신용이었다. 매일같이 바닥에 갈아댄 탓에 날카롭긴 해도 사람을 다치게 할 만한 날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돌멩이는 더욱 쓸모없었다. 그렇다고 버리기엔 의지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다른 게 생기면, 그때 버리지 뭐.”

들고 간다고 짐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

워렌이 제 주머니에 그것들을 넣고 데칸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마다비아의 광장 구석, 쓰레기 굴과 인접한 싸구려 여관 앞이었다.

‘듣자 하니 수도 덴버그에서 새로 수로 개척 사업을 한다는구나.’

‘물이야 필요한 이는 여기가 더 많겠지만, 살 수 있는 사람은 거기 더 많을 테지.’

‘가는 김에 너도 데려가 주마. 덴버그에서 새로 시작하는 거다. 너도, 나도.’

마다비아에서 수도 덴버그까지 가는 길은 근처에 위치한 길라를 통해 가는 방법이 가장 빨랐다.

물론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길라의 영주는 유독 심성이 고왔다.

‘내 아들인 척해다오.’

어린 자식과 함께 오가는 여행자들에겐 친히 숙소까지 잡아준다는 소문이 대단했다.

데칸은 제안했고, 워렌은 이를 받아들였다.

동행이 아니라 아들인 척해달라는 부분에서 마음이 동했다는 건 혼자만 알고 싶은 비밀이었다.

“아저씨.”

워렌이 저 멀리서 보이는 데칸을 조심스레 불렀다.

잠깐이었지만 마음이 변했을까 두려운 탓이었다.

“녀석, 안 오는 줄 알았다.”

그건 데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워렌을 향해 손을 뻗었다.

워렌이 어두운 골목을 조심스레 살피며 그에게 다가갔다.

“새벽 동이 트기 직전에 떠나는 게 가장 저렴해서 그렇게 시간을 정했다. 그때까진 저곳에서 잠시 눈을 붙일 거야.”

데칸이 뒤쪽 여관을 가리키자, 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밖에서 기다릴게요.”

“그럴 필요 없어. 네 몫까지 이미 값을 치렀거든.”

“왜요?”

길에서 자도 되는데. 끝맺지 못한 뒷말에 데칸이 괜히 뒷머릴 긁적였다.

“그래도 함께 여행하는 첫날인데 바닥에서 보낼 수는 없지 않겠어? 저녁도 먹어야 하고.”

“…저녁이요?”

“그래. 자, 어서 들어가자.”

데칸이 워렌의 등을 떠밀었다.

빚지는 건 세상에서 가장 싫고,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절대 없다고 믿었지만 지금 선을 긋기엔 굶주림이 너무 길었다.

워렌은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허름한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말이 여관이지, 할 일 없는 자유인들이 모여 노름을 해대고 시간을 보내는 난장판이란 말이 더 잘 어울렸다.

“여기 아무거나 좀 내오라고. 어제 팔다 남은 것도 괜찮으니!”

사람이 있기는 한 건가?

워렌이 눈알을 굴렸다. 다만 데칸은 이런 분위기가 익숙한 모습이다.

그가 주문을 끝내고 주변을 살폈다. 어린놈을 끌고 와도 쳐다보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도통 말이 없구나, 넌.”

조용하다고 칭찬해야 할지, 말을 잃어 불쌍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워렌은 반듯이 앉아 멀뚱히 데칸만 바라봤다.

“…….”

“…….”

왁자지껄한 큰 고성과 입씨름이 오가는 공간에 이상한 조합의 두 사람만 말이 없으니, 점차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누가 보면 납치라도 한 줄 알겠어. 허허, 웃으며 데칸이 결국 워렌에게 으름장을 놨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아는 게 없는데요.”

“뭐?”

“대화하기엔 제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요.”

궁금함이나 걱정 같은 것도 아는 게 있어야 할 수 있는 법이다.

워렌은 세상의 모든 감정에도 지식이 필요하단 사실을 배워가고 있었다.

“…이런.”

여정에 영 도움이 될 만한 녀석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말상대 노릇은 못 해낼 테니 말이다.

데칸은 하는 수 없이 시선을 돌리며 초조하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얼마 가지 않아 코가 벌그스름한 주인장이 형편없는 요리를 내왔다. 시키지도 않은 싸구려 에일 두 잔도 함께였다.

“얜 어린애라고!”

“먹고 뒈지기야 하겠어? 나야 값만 받으면 되는걸.”

“하여간 사기꾼!”

으하하하하!

시끄럽게 웃어대며 주인장이 사라지자 다시 테이블엔 고요가 찾아왔다.

데칸이 하는 수 없이 에일을 들었다. 그러곤 멀뚱히 저를 바라보는 워렌에게 턱짓했다.

“그래, 뭐 먹고 죽기야 하겠냐. 너도 마셔봐라.”

“…에일을요?”

“궁금하지 않던? 나 돈 없을 적엔 누가 사준다 하면 생선뼈라도 맛이 궁금했는데.”

그건 그랬다. 워렌이 작은 손으로 에일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지난 아침 물을 마시던 것처럼 꼴깍꼴깍 에일을 마셔 넘겼다.

“이것도 먹어봐라.”

대체 어떻게 구웠는지 껍질은 모두 타고 내장이 터져 나와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는 생선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워렌의 눈엔 진수성찬이었다. 어린 소년이 손을 뻗어 쓰레기만도 못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윽….”

배야 고팠지만 입은 제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정말이지 맛도 없고 식감도 형편없었다.

차라리 부둣가에 밀려온 해초를 먹는 게 더 맛있을 것 같았다.

“에일도 더 마시고.”

단번에 반을 비워낸 잔을 보며 데칸이 제 몫을 도로 양보했다.

우걱우걱, 쉬지 않고 먹어대던 워렌은 어째서 데칸이 모든 음식을 제게 양보만 하는지 궁금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오래지 않아 음식을 먹던 워렌의 손길이 느려졌다.

떠나기 위해 고여 있는 빗물에 세수까지 마쳤던 워렌이 또렷해진 눈동자로 그를 노려봤다.

“당신….”

목이 타들어갈 것만 같다. 단순히 에일을 마셨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깟 싸구려 에일로 취하는 법도 없을 테니까.

워렌이 때가 덕지덕지 묻은 까만 손으로 제 목을 움켜쥐었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점점 심장이 빨리 뛰었다. 목 옆에서 누군가가 방망이질을 하는 것 같았다.

“…으윽!”

어린 소년이 짧은 비명을 삼킨 채 곧장 테이블 아래로 쓰러졌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싸구려 에일 잔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봐, 데칸! 이런 놈을 데려온다고 그 큰소리를 쳐댄 거냐?”

“진짜 잭 가문에 팔아넘길 수 있는 거 맞아?”

“그래, 도착하기도 전에 죽을 놈 같구만!”

워렌이 쓰러지자 기다렸단 듯 여관 안에 모여 있던 이들이 모두 데칸에게 시선을 돌렸다.

데칸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이 꼬맹이 녀석을 마주하고 있으면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무척 피곤한 느낌이었다.

뭐, 그것도 이제는 다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어르신께서 전쟁에 내보낼 남자아이 하나면 충분하다 했으니 말랐거나 살쪘거나 뭐 그런 게 중요하겠어?”

“하긴, 어차피 죽을 놈이라면 그런 건 상관없지.”

“맞아. 그 전에 죽는 건 골치 아프겠지만 말이야!”

일행들이 시끄럽게 웃어대곤 다시 술을 마셔 넘겼다.

데칸이 달려드는 그들에게 모두 반응해주며 곧장 말라비틀어진 워렌을 어깨에 들쳐 멨다.

“내일이면 우리에게 일확천금을 얻어다 줄 놈이니 잘 재워놓자고.”

어차피 죽을 목숨.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삶이 더 값지리라.

“잘 자라, 이놈아.”

데칸이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얼굴로 워렌을 끌고 갔다.

어차피 이 자유 도시 마다비아에선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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