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62화 (62/133)

62화

11장. 푸른 피(2)

위기를 벗어나 극복하거나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는 행운 따위는 찾아오지 않았다.

워렌은 데칸 무리로부터 곧장 팔아넘겨졌다.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잭 가문의 막내아들을 위한 원치 않는 삶이었다.

“자, 다음은….”

검문 담당관이 제게 주어진 서류와 눈앞에 서 있는 어린애를 번갈아 살폈다.

아티쿠스 잭. 올해로 열일곱이 됐다는 청년은 이제 막 열 살도 채 된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건 너무 심한데.”

여섯의 딸만 얻은 잭 가문에서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워온 막내아들이라 이럴 줄은 알았다.

이 휴전기에 자식을 전쟁 훈련병으로 보내고 싶은 부모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적어도 나이 정도는 맞춰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에휴… 됐다. 네가 무슨 죄겠냐. 보급품을 챙겨서 어서 대열에 합류해라.”

“…예.”

검문관이 귀찮다는 듯 서둘러 워렌을 들여보냈다.

마다비아에서 이곳 월랜드까지 오는 동안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바닷바람은 잠잠해지고 슬슬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워렌이 잭 가문의 막내아들 앞으로 보급된 물병과 밥그릇, 그리고 제 키만큼 기다란 검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여기선 밥은 준다고 했으니까.’

끌려오는 동안 데칸에게 얼마나 맞았는지 모른다. 남아 있는 기력은 그 구타로 모두 잃었다.

다만, 데칸은 이게 제 쓰레기 같은 인생 중에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좋은 기회라고 했다.

밥도 주고 잠도 재워주니 평생의 은혜로 알며 감사하며 살라는 조언을 덧붙였다.

“대신 죽어줄 좋은 쭉정이가 왔군.”

“이번엔 과연 얼마나 버틸까?”

“태양의 절기까지도 못 버티고 죽어버린다는 것에 우리 도련님 목숨을 걸지!”

흙먼지가 휘날리는 대기열로 다가가자 모여 있는 무리들의 비아냥거림이 날아들었다.

그들은 한 절기 전 먼저 이곳에 보내진, 워렌과 같은 자들이었다.

현재 서대륙은 새 왕조 데로니스와 동북부 폰네시가 왕권을 두고 서로를 위협하는 중이었다.

오랜 전쟁이 이어졌고, 현재는 휴전 상태였지만 늘 대치 중이었기 때문에 동북부 변경을 중심으로 젊은 청년들이 차출되었다.

전쟁에 대비해 실전 감각을 잃지 않고 언제든 넘어올 수 있는 데로니스 세력을 경계하라는 의미였다.

‘…그레이트 대협곡으로 간다고 했지.’

해마다 새로운 인원들이 차출되었는데, 올해는 월랜드와 주변 작은 마을에서 총 오십 명의 젊은이들이 모였다.

워렌이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적게 봐도 모두 열다섯 이상은 되어 보였다. 고작 열 살쯤 된 제 또래는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귀찮은 일을 떠맡을 자식이 생겼으니 우리에겐 잘된 일이야.”

“그래, 죽지 않게 잘 보살펴 주자고. 꼭 필요한 놈이니.”

지속된 전쟁과 이어지는 휴전으로 경각심은 땅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워렌과 마찬가지로 팔려온 녀석들이 대부분인 와중에도 서열은 존재했다.

모여 있던 놈들이 날 선 눈빛으로 워렌을 노려봤다. 목적 없이 고여 버린 분노를 풀어낼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이었다.

고작 한 절기가 지나는 동안 그곳에서 온갖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워렌은 제가 따라잡을 수 없는 것들, 이를테면 나이라든가, 경험이라든가. 그런 것들을 곱씹으며 악착같이 버텨냈다.

물론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는 녀석들도 두려워하는 건 있었다.

바로 절기에 한 번씩 찾아오는 폰네시의 대기사 헤리스 타린의 방문이었다.

“이놈들! 대체 검 관리를 어떻게 해댄 거야!”

그자가 올 때면 관리자급 상관 기사들의 호들갑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데칸이나 다른 무리들이 팔아넘긴 아이들을 모른 척해주는 조건으로 놈들은 뒷돈을 챙겨 받았다.

그런 놈들이니 훈련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보급도 잘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배고파.’

무리의 괴롭힘과 상관 기사들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워렌은 벌써 일주일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굶는 건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조건이 다르니 버텨낼 기운도 더는 없었다.

제 한 몸 웅크리고 굶기만 하던 때와 달리, 워렌은 녀석들의 온갖 심부름과 수모를 겪어내야 했다.

“자, 이건 이렇게 휘두르는 거다.”

“혹시라도 해보라고 할 수 있으니 오늘 저녁까지 쉬지 않고 연습하도록 해!”

아무리 못돼 처먹은 놈들이라 하더라도 이제 고작 열 몇 살의 어린애들이었다.

다 큰 성인 남성이 강압적으로 몰아붙이는 압력을 버텨내기엔 녀석들도 삶의 경험치가 없었다.

“이 덜떨어진 새끼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

녀석들이 불만 섞인 표정으로 툴툴거리면서도 아무렇게나 검을 휘둘러댔다.

하지 않으면 얻어터지고 며칠간 괴롭힘을 당할 게 분명했으므로 시늉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나저나 저놈은 어떡하지?”

그때 상급 기사 한 명이 워렌을 바라봤다.

도저히 무리에 섞여들지 않는 모습이다. 검을 들 힘조차 없어 근방에 버려진 거지새끼가 따로 없는 생김새였다.

“흠… 일단 숨겨두는 게 좋겠지? 대기사께서 한 명, 한 명 모두를 살피진 않을 것 아니야.”

“그래, 오십 명 중 한 놈인데 눈치 못 채겠지.”

폰네시의 대영주 루시오 몬데이어도 이미 이 폐단을 알고 있었다.

그의 오래된 친우이자 침묵의 기사단장인 헤리스 타린이 직접 훈련병들을 찾아오는 것 역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이놈은 누가 봐도 팔려 온 자식이야. 너무 어리잖아.”

“절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야겠어. 야, 너 이리 와!”

워렌은 누가 봐도 대신 팔려 온 게 분명한 모습이었다.

고작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애를 전장에 보내는 법은 이 폰네시에 없었기 때문이다.

“뜯지 않은 보급품 상자 밑에 숨겨두면 건들지도 않을 거야.”

“좋아, 저쪽으로 옮기자.”

워렌은 곧장 작은 짐 상자에 갇혀 실외로 옮겨졌다.

절기가 지나 태양이 하늘과 가장 가까운 때였다.

워렌은 밑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지열과 위에서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을 작은 상자 속에서 모두 버텨내야 했다.

‘죽을지도 몰라.’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어도 상관없는 몸이라 끝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죽는다면 어떤 방식으로 죽는지 정도는 선택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못 먹은 채, 내 이름도 아닌 모습으로 갇혀 죽을 줄은 몰랐다.

“…살려…줘.”

계속해서 시간이 흘렀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게 사실인지, 끊어질 듯 끊이지 않는 정신과 목숨은 지독하게도 워렌의 목을 졸라댔다.

목이 말랐다. 그 순간 늘 깨끗한 물을 건네주던 데칸이 떠올랐다.

아무와도 섞여들지 못했던 그 차가운 부둣가에서 늘 제게 말을 걸어주던 그 사람이 그리웠다.

“…….”

정말 거지 같은 인생이다.

어쩌면 마지막인 순간에 떠오르는 사람이 고작 자신을 팔아넘긴 그 사기꾼이라니.

워렌이 점차 흐려지는 시야에 더는 버티지 않고 눈을 감았다.

상자 안은 무척 더웠다. 뜨겁고 갑갑한 공간 속에서 워렌은 온몸이 불타는 것 같은 환상을 느꼈다.

그래, 차라리 모든 게 불탔으면 좋겠다.

더 이상 고통을 견뎌낼 자신이 없어 워렌이 스스로 정신을 끊어내는 순간이었다.

‘…바다의 신이 있다면 불쌍한 너를 살려두실 테지.’

누군가의 낯선 음성이 불길을 가르고 워렌을 건져냈다. 그건 기억이 시작되는 최초의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제 볼을 쓰다듬었다. 태어나 그런 다정한 손길은 처음이다. 귀를 찢어댈 것 같은 우렁찬 아이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나는 너를 버리는 게 아니다.’

‘언젠가 꼭 찾아내마.’

‘우리 꼭 다시 보자… 라일리.’

작은 상자 속에 갇혔다. 그 뒤로 깊은 콧속에서 느껴지는 바다 내음에 번쩍 눈을 떴던 것 같다.

워렌이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너무 빠르게 호흡한 탓에 온몸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켁! 케엑!”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렀다. 이내 정신이 완전히 돌아왔다.

워렌이 앙상한 팔로 제 코를 가렸다. 눈을 찌푸리자 상자의 벌어진 틈 사이로 주변에 일렁이는 불길이 보였다.

워렌이 정신없이 상자를 두드리며 쿨럭거렸다.

먼 곳에서 웃고 있는 녀석들의 모습이 보였다. 제길!

“…뜨, 뜨거워! 제발 살려줘!”

주변을 에워싸던 불길이 결국 워렌이 갇혀 있는 상자에도 옮겨붙었다. 태양이 내리쬐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뜨거움이었다.

더 이상 상자를 두드릴 수도 없었다. 좁은 틈 속에 몸을 웅크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살고 싶어.’

이대로 죽기는 싫다. 살아야 할 대단한 이유 따윈 없어도 그저 지금 죽고 싶진 않았다.

방금 전 그건 뭐였을까?

내게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건가? 이렇게 죽으면 슬퍼해 줄 사람이 있는 걸까?

나를 라일리라고 불렀는데. 다시 꼭 나를 찾아주겠다고 했는데. 이대로 죽을 순 없는데.

“저기 무슨 일이지?”

때마침 훈련 기지에 찾아온 헤리스가 먼 곳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확인했다.

이 더운 날 몸을 녹이기 위해 불을 피웠을 리는 없고.

“불이 난 건가?”

“그, 그게….”

상급 기사 두 명이 눈알을 굴렸다. 저쪽이라면 그 꼬맹이 놈을 숨겨놓은 곳인데.

기사들이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헤리스의 시선을 잡아끌 필요는 없었다.

“문제없습니다. 저희가 수습할 테니 헤리스 경께선 기지를 살펴보시지요.”

“저런 하찮은 일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희가 알아서….”

“하찮다니? 보급품 관리가 병력 통솔의 가장 기본임을 모르는 건가?”

오는 동안 이곳 기지에 대한 문제점은 모두 파악한 직후였다. 관리급들의 기본 자질이 문제라더니.

헤리스가 성난 표정으로 지체없이 발길을 돌렸다.

뒤따라온 자들과 함께 보급품이 불타는 곳으로 다가가자 이미 화마가 기지를 모두 태울 것처럼 거세게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이런! 모두 불을 끄도록!”

“물을 길어 와라!”

“서둘러 움직여!”

전부가 달려들어 불길을 잡아보려 노력했지만 새빨간 불은 분노를 담은 것처럼 계속 번져나갔다.

대협곡을 따라 흐르는 굵은 물줄기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점점 기지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불길을 막기 위해 상급 기사들이 허겁지겁 뛰어다닐 때였다.

“…푸, 푸른 불이다!”

조금 전까지 시뻘겋게 온몸을 불태우던 불길이 점차 푸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보는 그 놀라운 모습에 전부 입을 벌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꼭 무언가에 홀리는 기분이었다.

아니, 압도당했다.

“부, 불이 꺼진다!”

“말도 안 돼!”

가운데서 강력하게 뿜어져 나온 푸른빛이 금세 붉은 기운을 모두 집어삼켰다.

집채만 한 크기를 자랑했던 불길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대체 이게 무슨….”

헤리스가 하늘을 바라봤다. 타고 남은 불씨들이 주변에 널리 퍼지고 있었다.

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 지켜보던 전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순간 사라진 불길에 입을 벌릴 때였다.

“믿을 수가 없군.”

이상한 일이다. 헤리스가 잿더미가 된 현장으로 다가갔다.

코끝을 찌르는 탄내가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강하게 퍼져 나왔다.

“…대체 안에 뭐가 있던 거지?”

내부에 색을 내는 무언가가 섞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나 확인하기에 현장은 너무나 처참했다.

보급품은 상자 하나만을 남기고 모두 불타 사라졌다. 흔적조차 없었다.

본래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얼마나 있었는지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고작 하나만 남았군그래.”

헤리스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상자 가까이로 다가갔다. 남은 것이라도 확인해야 했다.

그가 잿더미가 내려앉은 상자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상자를 열어본 순간.

“……!”

그 안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작은 소년을 마주했다.

전혀 불타지 않은, 푸른 눈의 워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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