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11장. 푸른 피(3)
눈앞에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아이라니.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 헤리스는 금세 표정을 관리했다.
감정을 곧이곧대로 드러내는 건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우선… 사실을 감춰야 해.’
녀석은 살아 있었다. 어떻게 살았는지 묻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멀끔한 모습이었다.
조금도 불타지 않았다.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산증인이 바로 눈앞에 있다.
“단장님,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뒤편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물었다. 헤리스가 다가오는 그들에게 급하게 손을 뻗었다.
발길을 멈춘 기사들이 휘둥그레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다.”
“예?”
기사들이 고개를 쭉 빼내며 의아해했다. 불타지 않은 상자는 온전한 모습 그대로 흠집 하나 없었다.
분명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데. 다만 헤리스가 거대한 몸으로 상자를 가리고 손을 털었다.
“그래도 이상한 반응이 있었으니 확인은 해봐야겠지.”
“주변을 조사하겠습니다!”
“그래, 이건 내가 옮길 테니 너희들은 잔해를 확인하고 불이 난 원인을 파악해라.”
“예, 헤리스 경.”
평소에도 앞장서서 많은 일을 처리하던 단장이기에 기사들은 모두 의심을 거두었다.
그가 상자를 집어 들었다. 얼마나 가벼운지 안에 어린아이가 누워 있다고는 생각도 못 할 정도였다.
‘녀석만 불타지 않았어.’
붉은 불꽃 속에 타오르는 푸른빛을 보았다. 상자를 든 헤리스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가 서둘러 임시 거처에 들어서며 장막을 내렸다.
어느새 아이는 잠이 들었는지 푸른 눈을 감추고 쓰러져 있었다.
“그 불, 네 것이냐?”
잠든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헤리스가 상자 안에 웅크리고 쓰러진 워렌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만약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게 사실이라면, 또 그 푸른빛을 만들어낸 게 정말 이 아이 때문이라면 이대로 방치해 둘 순 없었다.
“밖에 누구 있나?”
작은 인기척과 함께 기사 한 명이 들어섰다.
헤리스가 곧장 상자 위에 제 망토를 뒤덮고 명했다.
“확인할 일이 있어 나는 오늘 밤 궁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기사단과 함께 돌아가십니까?”
“아니, 모든 일을 바로잡아야겠지.”
“일이라면….”
푸른빛이 불꽃을 잡아먹는 것을 여기 있는 모두가 봤다.
“보급품에 불을 질러 내 시선을 돌리려 한 건 이곳에 숨겨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역시, 훈련병들을 바꿔치기한 것일까요?”
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거쳐온 많은 기지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더는 두고 볼 수 없겠어.”
이 일은 새어나가선 안 된다.
상급 기사들을 단속하기란 쉬운 일이지만, 이곳에 팔려 온 아이들은 또 다른 문제다.
헤리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부하에게 명했다.
“기사들을 조사해 아이들을 팔아넘긴 자를 잡아들이고 단단히 본때를 보여줘라.”
“아이들은 어떻게 할까요?”
“녀석들에게는 선택권을 주어야겠지.”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묻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지, 그게 아니라면 어른들과 함께 죗값을 치를지.
“조사가 완료되는 대로 이곳 훈련 기지는 폐쇄할 것이다. 임무를 완수하고 복귀하도록.”
“예!”
그가 다시 상자 속에 쓰러진 아이를 살폈다.
조금도 불길이 스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거대한 화마 속에서 완벽하게 본연 그대로 머무를 수 있는 건 오직 그 혈족뿐이다.
‘곁에 두고 직접 확인해야겠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존재가 나타난 건지 확인이 필요했다.
헤리스가 다시 푸른 망토로 상자를 가렸다.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었다.
***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마주한 건 어두운 밤하늘이었다. 꼭 마다비아의 바다를 쏟아부은 것 같은 반짝이는 하늘.
다만, 그 하늘이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와락 쏟아질 것처럼 일렁이는 탓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헉!”
워렌이 벌떡 일어났다. 흔들리는 건 하늘이 아니라 제 몸이었다.
토할 것 같다!
“윽, …우욱!”
어린아이가 뒤덮고 있던 푹신한 모포를 손에 쥐고 신음을 삼켰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푸루룩, 숨을 내뱉는 소리가 이어졌다.
고개를 돌리자 새카만 말의 꼬리가 보였다.
“쉬이.”
헤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일어났는지 정신을 차린 어린아이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도통 무슨 일인지 모를 테지.
“깨어났느냐?”
헤리스가 말을 멈춰 세우고 녀석의 등을 토닥였다. 기다려달란 주인의 요구에 멋진 흑마가 콧김을 내뿜었다.
워렌이 겁먹은 표정으로 헤리스와 말을 바라봤다. 뒤편에 달린 짐수레에 누워 있는 모양새가 또다시 어딘가에 팔려 가는 것 같았다.
“원, 녀석도. 궁금한 게 많을 텐데 도통 묻질 않는구나.”
“…….”
“안심해라. 죽음의 사신이나 뭐 그런 초월적인 존재는 아니니 말이다. 으하하하!”
하나도 웃기지 않다. 그딴 식으로 오해하지도 않았다.
시시한 반응에 헤리스도 곧장 웃음을 집어치웠다. 두 사람은 멀뚱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미 멀리 온 건가?’
주변이 낯설었다. 혼란스럽지만 도망갈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는 어른이다.
제가 따라잡을 수 없는 시간과 경험과 그리고 체력까지 지니고 있는, 이길 수 없는 어른.
“나는 폰네시의 기사, 헤리스 타린이다.”
반항적인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던 워렌이 잠시 놀란 듯 방심했다.
헤리스 타린이라면 기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다. 침묵의 기사단 단장이라든가?
“널 폰네시에 데려가는 중이지.”
“…날 왜 데려가는데요?”
“기억이 나지 않나 본데, 너는 불 속에서 구해졌다.”
워렌의 매서운 눈빛이 한결 꺾였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기억은 뜨거운 불 속이었다.
분명 주변이 모두 불타고 그 안에서 죽어가고 있던 것 같은데.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가는 것이니 협조해라. 다른 죄를 묻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테지.”
이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었다.
남의 삶을 멋대로 결정하는 주제에 감사까지 바라다니.
“좀 더 자두거라. 아직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단다.”
“…….”
“자, 그럼.”
한평생 자식 따위 가져본 적 없는 헤리스가 어린아이를 어찌 대해야 할지 알 리 없었다.
그가 나뒹구는 모포를 흘끔, 바라보는 것으로 대화를 끝냈다.
잡담하며 허비할 시간 따윈 없었다. 그가 다시 말 위에 올라 길을 잡았다.
워렌은 또 그렇게 원치 않는 변화를 맞이했다.
바라는 게 마다비아의 쓰레기 굴에서 평생 사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급작스러운 변화 역시 거북한 건 마찬가지였다.
헤리스는 워렌을 평소 잘 알고 지내는 광장의 어느 늙은 대장장이 집에 맡겼다.
두터운 사이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값을 치르고 방을 내어줄 정도의 친분은 있었다.
“네놈 가문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는 거냐?”
헤리스가 오늘로 벌써 다섯 번째 탈출을 감행한 워렌을 잡아 오며 물었다.
그는 무력이 없는 아이에게 함부로 힘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폰네시에 모르는 길이 없는 그에게 어린 워렌이 도망갈 곳은 안 봐도 빤할 뿐이었다.
“제가 어떤 가문 소속이었다면 이런 수모를 겪지 않았겠습니까?”
데칸도 그렇고, 이 망할 기사단장도 그렇고.
워렌은 도통 어른들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를 보호해 줄 가문이나 소속이 없다는 건 이렇게 짜증 나는 일이었다.
어른들은 나쁜 짓을 하기 전에 반드시 제 뒤에 누가 있는지 확인을 해댔다.
“너를 해하려는 게 아니다.”
“그걸 제가 어떻게 믿어요?”
“널 해하려 해봤자 나한테 이득이 없다.”
“사람들은 이득 없는 짓도 잘만 하던데요.”
“그런 짓을 하기에 내겐 시간이 없지. 모르나 본데, 나 이래 봬도 이 폰네시에서 중요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왜 자꾸 저만 졸졸 따라다니십니까?”
늙은 대장장이는 잠이 많았다. 노련하게 검을 갈아대는 것 말고는 잘하는 것도 없었다.
그 좁아터진 집에서 도망치는 것 정도는 워렌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헤리스가 워렌을 도로 잡아내는 것도 아주 쉬운 일이었다.
“워렌.”
녀석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잭 가문을 들쑤셔 이미 알아냈다.
데칸이란 자가 팔아넘겼다는 것도, 처음 발견한 곳이 마다비아였다는 것도 말이다.
“지금부터 네 운명을 뒤바꿀 수도 있는 질문을 할 거다.”
그딴 건 원한 적 없다.
“살면서 누군가가 너를 쫓은 적이 있느냐?”
워렌이 표정 없는 얼굴로 헤리스를 응시했다.
“도망치려는 너를 붙잡고 위협을 가하거나 너의 목숨을 노리는, 그런 자가 없는지 묻는 거다.”
녀석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났다.
태어나며 버려지는 그 아이들처럼 워렌 역시 가족이 없었다.
그간 알고 지내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절대 무리를 이룰 수 없도록 저주받은 그 운명대로 워렌은 철저히 혼자였다.
“대답해라.”
그렇게 푸른 불꽃은 처음 봤다.
그 규모의 불 속에서도 살아났다는 건 그 뜨거운 피를 이어받았다는 걸 의미했다.
‘다시 불 속에서 살아남는지 확인하는 게 가장 빠를 테지만.’
그렇다고 살아 있는 아이를 불태울 순 없는 일이었다.
“…….”
무엇보다 이 푸른 눈동자.
그 혈족만이 누릴 수 있는 푸른 눈동자가 확실한 증거였다.
“왜 대답이 없지?”
헤리스가 긴장하며 워렌의 대답을 기다렸다.
녀석은 여전히 아무 말 하지 않고, 헤리스와 눈을 마주하기만 했다. 흡사, 나쁜 사람을 보는 표정이었다.
“뭐냐. 설마 지금 그게 나라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답을 정해두고 물어볼 거라면 대체 질문은 왜 하는 겁니까?”
“뭐라고?”
“쫓는 사람 따위 없었습니다. 일도 많다면서 매번 나를 찾아내는 당신을 빼고는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으나 행할 수 없다.
물론 이런 식으로 대꾸할 때마다 불 속에 내던져 볼까 화가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헤리스는 저를 빤히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를 보며 마음을 다스렸다.
힘들게 찾아낸 혈족을 제 손으로 응징할 수야 없었다.
“도망가지 마라. 정말 널 도우려는 거니까.”
믿지도 않는다. 그딴 거짓말.
“널 애타게 찾아온 분이 있다.”
동족을 지킬 수 있는 자를 찾기 위해 바친 세월만 벌써 이렇게 됐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노력을 지켜본 게 바로 자신이었다.
다만, 판단은 제 몫이 아니었다.
이 일에 일개 인간이 끼어들 틈은 조금도 없었다.
“바로 저곳.”
헤리스가 손을 뻗었다. 좁은 골목에서도 훤히 보이는 넓은 석벽의 성이었다. 그곳에 이놈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이 폰네시의 주인, 바로 루시오 몬데이어께서 너를 기다린다.”
아무렴, 녀석도 놀랐겠지.
이로써 제가 이 폰네시에서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도, 또 그간 엿 먹이기 위해 뒤를 쫓은 게 아니란 사실도 입증할 수 있을 터였다.
어떠냐, 이놈아. 헤리스가 손을 거두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이런!”
어디 갔지?
물론 당연하게도 그곳에 워렌은 이미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