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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64화 (64/133)

64화

11장. 푸른 피(4)

“어디 새살림이라도 차린 건가, 헤리스?”

이 폰네시의 영주 루시오 몬데이어가 오랜만에 포도주를 들었다.

늘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그가 술을 입에 대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른다고?”

그런 척 시치미를 떼어보려고 했으나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헤리스가 인상을 구겼다. 루시오는 흥미롭다는 듯 그를 살피며 포도주 한 잔을 더 마셔 넘겼다.

“이제 새로운 짝을 찾아나서는 건가?”

“놀리지 마십시오. 그럴 일 없다는 거 잘 알지 않으십니까.”

“네 이름으로 새로 방을 얻었다기에 묻는 거다.”

“제 뒤를 밟으셨습니까?”

“내가 밟지 않아도 기사들이 죄 떠들어댄다, 헤리스. 훈련장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면서?”

지금껏 한 번도 기사단장의 역할을 소홀히 한 적 없기에 소문은 빨랐다.

친구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다.

루시오가 웃음을 삼키고 물었다.

“바깥에 새로 돌보는 아이가 생겼다지?”

“…….”

“지켜야 할 아이는 바깥이 아니라 이 궁성에 있는데 말이야.”

레온과 레브를 지키는 건 제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이유는 분명했지만 제 역할이 부족했음은 인정해야 했다.

“…죄송합니다, 주군.”

“그렇게 부르는 걸 보니 정말 뭐가 있긴 있나 본데.”

무언가 불리한 일이 있을 때만 선택적으로 튀어나오는 어린 날의 장난스런 호칭이었다.

루시오가 편하게 다리를 뻗고 턱을 치켜들었다. 어디 한번 털어놔 보라는 오랜 친구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이어졌다.

“어디서 양자라도 들인 거냐?”

이 서대륙 내의 모든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루시오였지만, 오랜 친우에 대한 예의로 그는 헤리스의 뒤를 밟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가 어디서 무얼 하고 돌아다니는지는 걱정도 되지 않았다.

다만, 이번엔 단순한 궁금함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천하에 헤리스 타린이 제 임무도 내팽개치고 한눈을 팔다니?

“그런 것 아니다, 루시오.”

“그럼 대체 무얼 하기에 시도 때도 없이 밖으로만 도는데? 수상하다고, 너.”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닐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가장 잘 알았다. 오래 친구로 지내온 만큼 모르는 것이 없었다.

루시오가 오늘 그를 불러들인 건 요새 하는 행동이 무척 수상했기 때문이다.

자유는 고사하고 한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는 놈이 퍽 하면 밖으로 나돌고 수상한 모습을 보였다. 제가 걱정할 걸 알면서도 말이다.

“팔려온 아이들에게 책임을 묻고 훈련 기지를 폐쇄한 것만 해도 이상했지.”

루시오가 그 폐단을 눈치채고도 그냥 내버려 둔 건 그게 누군가에겐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가문도 없고, 힘도 없는 아이들에게 훈련받을 권리가 주어지는 건 너 역시 좋은 일이라고 동의했을 텐데?”

이렇게 융통성 없이 죄를 묻고 관련자들을 처벌할 만큼 독한 놈이 아니었다.

헤리스는 관련자들에게 수위 높은 처벌을 명했다.

그중 워렌을 팔아넘긴 데칸은 결국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긴 거냐, 헤리스?”

여유롭게 포도주나 홀짝이던 영주는 더 이상 사라지고 없었다.

루시오가 잔을 내려두고 헤리스의 앞으로 향했다.

헤리스는 친한 친구로서도, 오래된 호위 기사로서도 면목 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미리 알리지 못해 오해를 만들었군. 하지만 내게도 이유가 있었어, 루시오.”

“그래, 이제는 설명해야겠지.”

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고 조심스레 말을 내뱉었다.

“용의 혈족을 찾은 것 같다.”

“…뭐?”

여유 만만하게 웃고 있던 루시오의 표정이 한순간 차갑게 굳었다.

용의 혈족이라니. 그토록 찾아 헤매던 존재를 도대체 어디서 찾아냈단 말인가.

“확실한 건가? 어떻게 알았지?”

“월랜드 근처의 대협곡 훈련 기지, 그곳에서 사건이 있었어.”

헤리스는 직접 보고 경험한 일을 루시오에게 털어놓았다.

거대한 불길이 일었으며, 그 속에서 피어난 푸른빛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는 것도. 또 그 중심에 어린아이가 있었다는 것도 말이다.

“푸른 눈을 가지고 있는 놈이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이가 전부 용의 혈족인 건 아니다. 하지만 용의 혈족은 모두 새파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루시오가 마른세수를 이었다. 동족들은 모두 죽은 줄로만 알았다.

용의 심장을 노리는 놈들 때문에 일찍이 피가 끊겼다고 생각했는데.

“어디 있지? 그 아이 말이야.”

“도망쳤어.”

“도망? 그게 무슨 소리야.”

“어떻게 살아왔는지 좀처럼 사람을 믿지 않아. 틈만 나면 숨어들려 하지. 본능처럼.”

그야 무리를 이루지 못하도록 저주받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네가 찾아낸 게 정말 용의 아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

“확신한다. 그 아이에게서 네가 느껴지거든.”

녀석에게선 용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만이 뿜어낼 수 있는 기운이 느껴졌다.

루시오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일 만나야겠어, 헤리스.”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모른다.

루시오의 반응에 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그놈이 어디로 도망갔을지 짐작되는 곳이 있었다.

“내가 반드시 데려오지.”

***

헤리스가 물러가고 난 후, 루시오는 한참 동안이나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폰네시는 그를 많은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다.

“…….”

이 넓은 땅, 그리고 이곳에 사는 수많은 사람은 모두 자신이 지켜야 할 중요한 것들이었다.

“용의 혈족….”

그리고 지켜야 할 것들 중엔 동족의 운명도 있었다.

그가 굳세게 닫힌 문을 살폈다. 헤리스가 도착하기 전까진 누구도 이곳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루시오가 넓은 중창을 등지고 걸음을 옮겼다. 곧장 서재가 보였다.

서적과 중요한 문서들로 빽빽이 쌓인 그곳에서 루시오가 책장 하나를 밀었다.

가장 구석에 위치한 좁은 3단짜리 책장을 밀자, 먼지 가득한 좁은 공간이 나왔다.

루시오가 입구에 위치한 푸른 돌을 바라봤다.

기운을 읽은 돌이 스스로 열렸다. 누구도 들어설 수 없는, 몬데이어에게만 허락된 공간이었다.

“직접 내려가 보는 건 나도 오랜만이군.”

묵은 시간만큼 수많은 세월이 가라앉아 있었다.

루시오가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자 어두운 공간에 불이 타올랐다.

그가 내딛는 대로 주변을 모두 푸르게 밝히는 푸른빛이었다.

“…오랜만이군.”

넓은 지하 홀 한가운데엔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드래곤의 머리뼈가 놓여 있었다.

“알렉시오.”

루시오가 그 앞으로 향하자 양옆에 푸른빛이 일렁였다. 그것이 어둠을 밀어내며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까마득한 높이에서도 정확히 보이는 드래곤의 매서운 눈동자가 루시오에게 향해 있다.

“죽어서도 나를 노려보는구나.”

비록 목숨을 잃어 이곳에 뼈로 남았지만 드래곤은 여전히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하물며 알렉시오는 그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존재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쿵쿵, 하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살기를 이겨낼 수 있을 만한 체력은 이제 겨우 회복한 단계였다.

“…널 죽이며 내 몸도 많이 상했지.”

같은 동족의 숨통을 끊어놓은 저주로 몸속에 흐르는 피는 매일같이 고통을 낳았다.

루시오가 다시 저릿해져 오는 손을 애써 숨기며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드래곤의 모습이 아니라고, 인간과 가까운 모습이라고 쫓기지만 않았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들이 우리를 받아주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드래곤은 용의 피를 이어받았으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용의 혈족을 혐오했다.

이 세상 최후의 힘을 지닌 고귀한 존재로서, 인간과 뒤섞이는 짓 따위는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리라.

태초의 용족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나 그의 후예들은 모두 용의 심장을 지니고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그들은 강력한 드래곤으로부터, 또 이 심장을 노리는 어떤 무리로부터 오래도록 추적당하고 있었다.

“정말 거지 같은 운명이지.”

그저 태어났을 뿐인데 부정당하며 살았다. 아주 오랜 기간 잘못된 존재라 저주받으며 고통 속에 살아왔다.

몬데이어 일족이 가이아 왕족, 트레톨라 일가에게 구해지기 전 얼마나 형편없이 살았는지는 루시오 역시 잘 아는 이야기였다.

저주받은 일족이나, 위험에 휩싸이는 가문이라 평가받으며 몬데이어들은 늘 숨어 살았다.

드래곤은 용의 심장을 가진 몬데이어를 너무도 쉽게 찾아냈으며, 영지 전체를 날려 버릴 만한 위협도 아끼지 않았다.

‘도저히 인간들 틈에 섞여 살 수가 없었지.’

트레톨라 일가가 몬데이어를 거둔 이후의 상황은 달라졌다.

강력한 힘을 가진 드래곤이라도 엔드해 한가운데 위치한 서대륙까지 날아오는 덴 많은 체력이 필요했다.

또한 드래곤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몬데이어의 역할도 대단했다.

가이아 왕국은 몬데이어의 도움을 받아 드래곤을 생포했고, 그 힘으로 이 서대륙을 통치했다.

“…….”

그렇게 오래도록 이곳에서 힘을 빼앗긴 채 버틴 게 바로 이 알렉시오였다.

루시오는 인간들에게 이용당하는 알렉시오의 숨통을 끊어주었다. 비록 그 일로 저주를 얻게 되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아이들은 안 돼.”

옳은 일을 했다 믿지만, 아이들만큼은 저주로부터 지켜내야 했다.

루시오가 알렉시오의 거대한 아가리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보검을 바라봤다.

이 손으로, 그리고 저 검으로 용의 심장을 멈추게 만들었다.

“…….”

루시오가 천천히 보검 가까이로 다가갔다.

주인을 알아본 검이 푸른빛을 내뿜어댔지만 손을 뻗을 수 없다. 강하게 심장을 짓누르는 고통에 루시오가 컥, 신음을 내뱉었다.

“…역시 잡을 수 없군.”

용의 심장은 그 무엇보다 강력했다. 세상에 그 심장을 멈추게 만들 수 있는 건 같은 드래곤이나 애써야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었다. 루시오가 다시 빛을 잃은 몬데이어의 검을 바라봤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겠지.”

몬데이어의 검은 수만 년에 걸쳐 제련한 다이아 스틸이었다.

다만, 이제 루시오는 그 검을 들 수 없었다. 알렉시오를 죽이며 용의 피를 더럽혔기에 더는 다이아 스틸을 만질 수 없었다.

“녀석들이 힘을 숨긴 채 내 아이들을 노리고 있을 텐데.”

언제 다시 드래곤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알렉시오의 형제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다.

루시오가 레온과 레브를 떠올렸다. 두 아이는 저주받은 피를 가지고 태어났다.

제 죄로 두 아이는 용의 혈족이었으나 다가오는 위협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약하게 태어났다.

“그 아이들을 지킬 피가 필요해.”

다이아 스틸은 오직 용의 혈족만이 다룰 수 있다.

드래곤에 맞설 수 있는 것 역시 오직 용의 피를 이어받은 자만이 가능했다.

“녀석 역시 기회도 없이 죽게 내버려 둘 순 없겠지.”

그간 태어남과 동시에 버려지는 아이들을 수도 없이 만났다.

녀석들은 맞서 싸울 힘조차 없어 싸워보지도 못하고 드래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그냥 둔다면 그 아이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게 쉽게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

루시오가 다짐한 듯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검을 들어야 한다.

그가 단숨에 몬데이어의 검을 향해 돌진했다.

“끄으으윽!”

버틸 수 없는 고통이 몰려왔으나 견뎌내야만 했다. 잘못도 없는 아이들을 죽게 만들 순 없었으니까.

루시오가 살기등등한 보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알렉시오의 머리뼈 가장 깊은 곳, 끔찍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그곳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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