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65화 (65/133)

65화

11장. 푸른 피(5)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다.

인생에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멋대로 운명을 결정해대는 건 끔찍한 일이다.

‘더 이상은 안 돼.’

힘이 없다고 도망치기만 하고, 이길 수 없다고 맞서보지도 않는 짓은 이제 관두기로 했다.

워렌이 눈앞에 높게 펼쳐진 석벽의 성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걸 훔쳐 듣고 나니 이곳에 폰네시의 영주가 사는 걸 알게 됐다.

‘그 사람이 날 찾는댔지?’

헤리스 타린이 분명 그렇게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여기고 곧장 도망쳤지만, 이대로라면 어차피 붙잡히고 만다.

그게 싫었다. 언제 태어났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후부터 지금껏 제 뜻대로 해본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다비아에서 눈을 뜬 것도, 쓰레기 굴에서 살았던 것도.

또 잭 가문의 막내아들 신분을 뒤집어쓰고 훈련병 생활을 했던 것과 이곳에서의 생활 모두 제가 원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그 불 속에서… 난 살고 싶었어.’

이대로 죽음에 이끌려갈 순 없다.

한 번도 살고 싶다 생각한 적 없었으나 진정 죽음의 문턱까지 다가가니 원하는 건 바로 삶이었다.

아직 죽을 수 없다. 살아야 할 이유 따위 없어도 살아 있으니 살고 싶었다.

“직접 가서 물어보자.”

그러니 더 이상 타인의 뜻대로 내 인생을 내버려둘 순 없다.

어린 워렌이 단단하게 두 주먹을 움켜쥐고 석벽의 성으로 다가갔다. 폰네시의 영주를 만날 순간이었다.

“뭐? 누구를 만난다고?”

비웃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진지하게 들어주지도 않았다.

성문을 지키고 있는 폰네시의 병사는 친절하게 뒤편을 가리켰다.

“다시 돌아가렴, 꼬마야. 여긴 저 앞 광장처럼 함부로 구경하는 곳이 아니란다.”

설득한다고 들어줄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폰네시의 영주가 신분도 확실하지 않은 자신을 찾고 있다니.

더 이상 입씨름하지 않고 어린 워렌은 뒤돌았다. 안 되는 일에 정성을 쏟기엔 가지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어쩌지.’

담을 타 넘어보려 해도 석벽의 성은 누군가가 멋대로 침입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였다.

눈앞이 캄캄했다. 삶을 뒤바꿔보고 싶었는데 시작부터 상황이 좋지 않다.

“…헤리스, 그 사람을 찾아야 하는 건가?”

만나자마자 뒷목부터 잡아챌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그자를 찾는다면 뜻하는 대로 영주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워렌이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담벼락에 기대앉아 있을 때였다.

폰네시를 관통하는 이름 모를 얕은 냇가 건너편 나무 뒤에 누군가가 숨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지?’

은백색 머리칼이 어깨 아래까지 구불거렸다.

푸른 눈을 가진 네 살쯤 된 꼬마 아이가 워렌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손을 까닥였다.

가까이 오라고?

작은 손을 열심히 휘젓던 아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들은 척도 안 하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뭐야.”

하는 수 없이 워렌이 꼬마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냇가를 건너기 위해선 정문과 가까이 위치한 다리까지 가야 했지만 꼬마는 여전히 울 것처럼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워렌이 얕은 냇가를 그대로 밟아 지났다. 이런 물살이야 마다비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뭐.”

할 말이 없어 워렌이 그렇게 물었다. 막상 다가오니 무서운가. 아이가 나무 뒤편에 몸을 숨겼다.

워렌이 냉랭한 표정으로 나무 뒤에 숨은 그 은백색 머리칼을 한참 바라봤다.

“왜 불렀냐고.”

그 목소리에 다시 용기가 났는지 꼬마가 손을 쭉 뻗어 석벽의 성을 가리켰다.

“있잖아. 너, 저기 들어갈 거야?”

푸른 눈이 조심스레 워렌을 응시했다. 빼꼼 바라보는 그 얼굴에 워렌이 주변을 살폈다.

“안 된다고 하는 거 들었어. 내가 도와줄까?”

도움이 필요한 얼굴로 그렇게 말해봤자 별로 신뢰감은 없었다. 게다가 저보다도 훨씬 어려 보이는 꼬마였다.

걸어 다닐 수는 있는 건가?

워렌이 한참 속으로 생각을 이어갈 때였다.

“혼자 나왔다고 하면 혼나거든. 그러니까 나랑 같이 들어가지 않을래?”

“너, 저 안에 살아?”

“응! 그래서 늦기 전에 들어가야 하는데… 나는 혼자 다니면 안 되거든. 분명 메리가 하루 종일 통곡을 할 거야.”

제가 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아이가 그렇게 설명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고 싶어.”

유모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나왔는데, 놀고 보니 혼날 게 무서웠다.

늘 제 곁을 지켜주는 오라버니도 없었다. 오라버니와 비슷한 또래의 누군가는 있지만.

“도와주면 안 돼?”

“그러고 싶지만 난 못 들어가는 것 같던데?”

“그건 괜찮아. 이걸 뒤집어써.”

꼬마가 제가 걸치고 있던 푸른 망토를 건넸다. 성벽에 걸려 있는 것과 같은 문양이 크게 수놓아진 망토였다.

“이걸 쓴다고 내가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괜찮아. 내가 말하면 돼.”

“네가 뭔데?”

“레브! 레브 몬데이어!”

“누가 이름 알려 달래?”

“난 이름만 대면 들어갈 수 있단 말이야.”

워렌이 망토를 받아 들고 잠시 고민했다.

몬데이어가 대체 누군데 이름만 대면 저곳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늦으면 혼나. 얼른 가면 안 돼?”

아이가 푸른 망토를 잡고 흔들었다. 유모가 대성통곡을 하고, 온 영지를 들쑤시기 일보 직전이었다.

괜한 일로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도 싫었다. 게다가 다리도 아팠다.

업어줄 것 같진 않으니 더 힘들어지기 전에 들어가야 했다.

“그래, 좋아.”

더 고민해봤자 헤리스에게 뒷덜미를 잡히는 것보단 낫겠지. 밑져야 본전인 데다 저는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것도 없었다.

워렌이 망토를 뒤집어쓰고 꼬마를, 아니 레브를 바라봤다.

“가자, 레브.”

***

“봐, 내가 된다고 했지?”

두 사람은 너무도 쉽게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은백색 머리칼에 푸른 눈. 레브를 몰라보는 이는 이 폰네시에 아무도 없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고마워.”

워렌도 순순히 레브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아이가 아니었대도 들어올 방법은 있었겠지만 어쨌든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난 이제 유모한테 가야 하는데. 넌 어디로 갈 거야?”

아이다운 순수한 질문이었다.

목적이나 의도를 묻는 것보다 이후에 가야 할 행선지를 묻는 그 모습에 워렌이 주변을 살폈다.

내성까지 가려면 여기서도 한참 걸어야 하는 것 같다. 제대로 된 영지 생활을 해본 적 없는 워렌은 사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해?”

폰네시의 영주를 만나기 전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워렌의 물음에 레브가 입술을 내밀고 고심했다.

이 궁성엔 어딜 가든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지금 생각나는 곳이 딱 한 군데 있었다.

“우리 오라버니도 거기 있을 거야. 덕분에 무사히 들어왔으니 내가 데려다줄게!”

레브가 활짝 미소 지었다. 그러곤 단숨에 워렌의 옷깃을 잡고 내성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시 망토를 뒤집어써.”

어른들에게 설명하려면 골치가 꽤나 아프다.

워렌이 결국 푸른 망토를 다시 뒤집어쓰고 레브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근데 사람 많은 곳은 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뭘 확인하고 싶은데?”

“…얼굴들.”

“응? 얼굴은 왜?”

이곳에 머무르는 자들의 표정이 보고 싶었다.

그들도 마다비아의 바닷물에 비친 제 얼굴처럼 웃음을 잃었는지, 그게 아니라면 마주 본 이 아이처럼 활짝 웃고 있는지.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이곳을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제가 판단할 수 있는 척도는 그게 전부였다.

‘마다비아에선 모두가… 우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자유인이라 이름 붙인 그들에게선 정작 자유가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 스스로 무언가에 얽매여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워렌은 그걸 확인하고 싶었다. 이 폰네시의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인지. 이곳 사람들과 엮여도 될지 말이다.

“레브 아가씨?”

“어, 안녕! 오라버니가 검술 훈련에 늦었다고 해서.”

“도련님께서요? 하지만….”

“우리 바쁘니까 빨리 좀 지나갈게! 수고해!”

훈련장 입구를 지키던 가신 둘이 서로를 바라봤다. 방금 뭐가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도련님께선 이미 훈련 중이시지 않아?”

“…나도 그런 걸로 알고 있는데.”

다만, 확인하기엔 두 사람은 이미 멀어져 있었다.

입구를 지나 훈련장 가까이에 다가오자 레브가 겨우 숨을 돌렸다.

그러곤 달리느라 붙잡아버린, 저보다 두 배는 큰 워렌의 손을 화들짝 놀라 놓았다.

“나, 나는 데려다줬으니까 이만 가볼게! 그럼 안녕!”

“저기, 레브!”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쌩하니 사라졌다. 참, 이건 어쩌지?

워렌이 뒤집어쓰고 있던 망토를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쩔 수 없지.”

다시 만난다면 돌려줘야겠지만 그런 행운은 오지 않을 것 같다.

워렌이 다시 푸른 망토 속에 숨어 눈앞에 펼쳐진 공간을 살폈다.

“…….”

그곳엔 검을 쥐고 훈련하는 병사들이 있었다. 대협곡 기지에서 마주했던 훈련병들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이었다.

도열한 기사들이 구호에 맞춰 검으로 허공을 내갈랐다. 약속이라도 한 듯 정확하게 목표물을 향해 다가가는 그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아무도 웃지 않아.’

모두가 땀 흘리고 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누구 하나 웃는 사람 없이 눈앞의 목표물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서 마다비아가 보이진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정말 빠르다.’

그들이 휘두르는 검이 너무 빨라서 표정이나 얼굴을 살피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워렌의 가슴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저들처럼 검을 쥔다면 누구도 제게서 마다비아를 찾지 못할 것 같았다.

‘어쩌면 나도….’

저들처럼 모든 걸 숨길 수 있지 않을까?

검을 쥐고, 세상을 가르다보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워렌이 검을 휘두르는 침묵의 기사단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워렌.”

그때 익숙한 음성이 워렌을 붙잡았다. 그 손길에 푸른 망토가 벗겨졌다.

얼굴을 감싸던 망토를 잃자 이내 기대감에 뒤섞였던 워렌의 표정도 사라지고 말았다.

“한참 찾았다. 여기 있을 거라더니 정말이군.”

헤리스 타린이 뜻 모를 말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워렌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기사단장이 와서 그런지 안에서 훈련하던 모두가 빳빳하게 굳어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워렌의 표정도 함께 일그러졌다. 방금 전 가슴속에 부풀던 무언가도 사라지고 없는 것 같았다.

“한참 찾았어. 기껏 도망친 곳이 여기라니 의외이긴 하다만.”

“…도망친 거 아닙니다.”

“그래, 그게 아니래도 어쨌든 잘됐다. 네게 물어볼 게 있어.”

헤리스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워렌과 시선을 맞추었다.

표정 없이 서 있던 워렌도 놀랄 만한 갑작스러운 행동이었다.

“내 주군께서 너를 기다리신다.”

“주군이라면… 이 폰네시의 영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에게 명령 따윈 통하지 않는다.

제 주군이 알려준 방법대로 헤리스가 워렌의 양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그러니 가서 말해봐라. 널 만나는 조건으로 네가 원하는 걸 뭐든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으니.”

원하는 건, 뭐든.

“내 주군과 거래를 해라.”

헤리스가 툭툭, 어린 워렌의 어깨를 두드렸다.

워렌의 마음은 이미 검술 훈련장 안에 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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