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66화 (66/133)

66화

11장. 푸른 피(6)

거래는 일방적이었다. 물론 그간 당해왔던 것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공작 저하는 언제 만나는데요?”

“영주님이라니까! 아무튼 지금은 아니다.”

“…왜요?”

“그야 영주께선 지금… 됐다. 내일부터 너도 훈련을 받게 될 테니 체력부터 기르는 게 좋겠다.”

기사단장 헤리스의 소문은 점차 사실로 굳어가는 듯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고향 슐츠에 두고 온 아내가 있는데, 이번에 아들만 보냈다더라.

아니다. 데로니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가의 영애라 공작의 허락을 구하지 못해 억지로 헤어졌다더라.

차마 아이만큼은 외면할 수 없어 오랜 친우에 대한 예의로 영주께서 은혜를 베푸셨다.

“아주 기가 막히는군!”

온갖 소문의 주인공인 워렌을 바라보며 헤리스는 기가 차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은 영문도 모른 채 훈련병들의 숙소 한편에 짐을 풀게 됐다. 사실 가지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몸만 뉘였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럼 쉬거라!”

뭐라 답변할 틈도 없이 헤리스가 단숨에 자리를 벗어났다.

워렌은 비좁지만 제 몸 하나는 충분히 쉴 수 있는 공간에서 어둠이 내려앉은 바깥을 살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폰네시의 영주를 만날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그는 검술 훈련을 허락해주는 대신 두 번의 절기를 이곳에서 보내길 요구했다.

마음껏 원하는 대로 살다가 선택의 순간에 만나 주겠다는 말만 헤리스를 통해 전했다.

“이상한 사람이네.”

원치 않는다면 이곳을 떠나도 된다는 말을 믿을 수 없지만, 그가 내뱉은 모든 게 마음에 드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폰네시의 영주는 그간 멋대로 운명을 결정한 사람들과는 달랐다. 뜻대로 명령을 내리지도, 어리다고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

워렌은 쿵쿵거리는 심장을 애써 다독였다. 뒤통수 맞는 건 이미 질리도록 당했다.

시키지도 않은 기대를 맘대로 했다가 실망에 허우적거리는 덴 이골이 났다.

‘그래도… 딱 오늘까지만.’

지금까지 누리지 못한 행운을 한 번에 쥐게 된 건 아닐까.

워렌이 부푼 마음을 끌어안고 비좁은 공간에 웅크렸다.

처음으로 내일이 기대되는 밤이었다.

***

마다비아의 쓰레기들이 내뱉는 말은 단 한 번도 워렌을 밑바닥으로 내몰지 못했다.

배운 것도 없는 자들이 해대는 말이야 날카롭지도, 전혀 아프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 폰네시, 석벽의 성에 머무르는 기사들이 내뱉는 말은 단 한마디도 워렌을 스치고 지나지 못했다.

“우리가 대체 왜 이 짓거리를 해야 하는 거냐?”

“버텨낼 체력도 없고, 실력도 안 되는 주제에 왜 포기도 못 하냔 말이야.”

“네놈 때문에 헤리스 경의 평판이 얼마나 땅에 떨어졌는지는 알고나 있어?”

궁성 내 침묵의 기사단에 속하기 위해선 길고 긴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이들은 모두 이름 날린 노기사의 종자 노릇을 수년이나 겪고 왔다.

그들에게 배운 건 검술이 다가 아니었다. 기사로서 어떤 순간을 견뎌야 할지, 또 무엇을 포기해선 안 되는지. 닳도록 직접 보고 겪으며 긍지로 쌓아올렸다.

“어디 가문도 없는 자식이.”

한데 그런 순간을 제대로 경험조차 못한 젖비린내 나는 꼬마가 훈련 무리에 섞여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을 존경하는 기사단장의 뒤에 줄줄이 매달고서 말이다.

“됐다. 염치를 아는 녀석이었다면 애초에 발길조차 들이지 않았을 테지.”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하급 기사가 동료들에게 고개를 저었다.

마치 화를 쏟아부을 시간조차 아깝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만 돌아가자. 이럴 시간에 저 녀석이 따라올 수도 없는 격차를 만드는 게 낫겠어.”

“하긴, 현실을 마주해야 결국 나가떨어지겠지.”

그들은 더 이상 대화할 이유조차 없다는 듯 발길을 돌렸다.

매일같이 괴롭히고, 쓸모없는 비아냥거림을 듣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이었다.

그들의 무관심은 건너갈 수 없는 선을 만들었다.

아마도 날 때부터 방향이 달랐던 듯싶다. 아무리 나아가도 그들이 향하는 곳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

워렌이 무더운 태양을 바라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벌써 기사단에 빌붙은 지도 꼬박 두 번의 절기가 지났다. 이제 태양은 다시 정점을 향해가고 있었다.

‘그깟 무시, 백 번을 받아도 상관없어.’

하지만 검은 홀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체력을 단련하고 휘두르는 법은 배울 수 있어도, 검과 검이 얽혀 기운을 읽는 법은 혼자서 절대 익힐 수 없었다.

누구도 상대하지 않으니 워렌의 실력은 늘 일정 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바라던 것과 달리, 워렌은 검 앞에서 늘 감정적이었다.

‘슬슬… 끝이 다가오는데.’

약속한 기한이 끝나간다. 이제 단 며칠만 있으면 처음 약속한 대로 선택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워렌이 가만히 태양을 바라봤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검은 제 손을 떠난 지 오래였다.

쥐고 있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가질 수 없는 걸 바란 기분이었다.

‘역시 포기해야 하나.’

기사단원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면 더 이상 실력도 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 정도 실력은 그레이트 대협곡에서 만났던 열다섯 먹은 거짓 훈련병들이나 겨우 이길 수 있는 정도였다.

아니, 사실 그것도 잘 모르겠다. 지금껏 아무와도 겨뤄보지 못한 내가 누굴 이길 수 있기는 한 건가?

“…정말 미쳐 버리겠네.”

더 이상 눈이 부셔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워렌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나뒹구는 검이 한참 빛을 반사했다.

“…….”

검은 사람을 가리지 않을 줄 알았다. 출신도, 가문도, 나이도. 저 날붙이 앞에선 모두가 평등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제 바람이고 어리석은 욕심이었다.

검을 들고 마주해야 하는 건 결국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장 아프게 베어내는 검이 모두에게 평등할 리 없었다.

“이놈, 훈련 안 하고 또 누워 있는 거냐?”

“…헤리스 경.”

“검을 들어보니 나에 대한 경외심은 생기는 모양이지? 웬일로 눈을 착하게 뜨고 말이다.”

“그런 것 아닙니다.”

“솔직한 걸 보니 아직 내가 아는 워렌이 맞구나.”

워렌이 자세를 바로하고 벌떡 일어났다. 검은 여전히 발치에 나뒹굴고 있었다.

헤리스가 보고도 못 본 척 워렌을 향해 다가갔다.

“영주께서 널 보자신다, 워렌.”

“지금요?”

“그래.”

“…약속한 기한이라면 아직 며칠 더 남았을 텐데요.”

“그 며칠 뒤에 영주께선 폰네시에 안 계신다.”

“예? 어디 가시는데요?”

“그야 네가 직접 여쭤보면 되겠지 않겠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 동북부 폰네시의 대영주가 한낱 훈련 기사도 되지 못하는 제게 그런 걸 알려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워렌이 대충 땀을 닦아내고 주변을 살폈다.

벌써 저만치 멀어진 헤리스를 따라잡아야 했지만, 도저히 검을 쥐고 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저 검은 제 것도 아니었다. 침묵의 기사들을 위해 준비된 검이니 들고 가지 않는 게 맞겠지.

워렌이 결국 땅에 떨어진 검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헤리스를 뒤따랐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곳에 묶여 있는 것 같았다.

***

“…….”

제게 기회를 주고 현실을 앗아간 사람을 만나는 건 생각보다 두려운 일이었다.

어린 워렌은 처음 마주한 이 폰네시의 영주, 루시오 몬데이어를 보며 처음으로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앉아라.”

눈 하나 깜짝할 수 없었다. 푸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온몸이 얼어붙고 세상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되바라진 꼬마라고만 생각했는데, 귀여운 구석이 있다.

헤리스는 바짝 굳어버린 워렌의 등을 떠밀어 루시오의 앞에 친절히 앉혀주었다.

“그래, 지금쯤 결정은 했겠지?”

여유롭게 바라보는 루시오의 등 뒤에선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태양인 것 같다.

워렌은 루시오에게서 느껴지는 강한 기운에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저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주제도 안 되는 제게 기회를 준 이 앞에서 포기하고 싶다는 말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워렌은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힘 빼지 않는 법을 익혔다.

이길 수 없는 일에 함부로 덤비지 않고, 불가능한 일엔 매달리지도 않았다.

운명은 변하지 않는다.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삶의 방향을 뒤틀기란 그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다.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헤리스가 조금은 놀란 눈치로 워렌을 바라봤다.

매일같이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던 녀석이다. 게다가 하루 종일 검을 붙들고 노력하는 모습은 제 심금을 울리기까지 했다.

근데, 그렇게 간절히 바라는데 이렇게 포기한다고? 도대체 어째서?

“그곳은 제 자리가 아닙니다.”

“침묵의 기사단에 전혀 섞여들질 못했군.”

그들의 탓이 아니었다. 워렌이 패배한 표정으로 입술을 씹었다. 어린 워렌의 좌절은 예견된 일이었다.

루시오가 헤리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집무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모든 인원이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안엔 기사 헤리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사라지자 워렌이 주변을 살폈다. 푸른 눈동자 속에 두려움이 머물렀다.

“네가 그런 선택을 했으니 이제 내가 바라는 걸 말하마.”

용은 짓누를 수 없다. 다른 누군가의 의지로 억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존재였다.

루시오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자신 역시 지금껏 누군가가 바라는 대로 살지 못했다. 제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토록 힘에 부쳤다.

“넌 앞으로 다른 누구와 섞여들 필요 없다.”

푸른 피는 혼자서도 가히 수천, 수만의 힘을 일으킬 수 있다.

“너는 지금부터 오직 너만을 지킨다.”

줄곧 두려움에 떨고 있던 워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지켜준 적 없는, 스스로 지켜야 할 이유조차 찾지 못해 되는 대로 살아왔던 제게 처음으로 납득할 수 있는 목적이 생겼다.

“네 인생에 앞으로 다른 중심은 없을 것이다.”

지금껏 왜 이런 삶을 살게 됐는지 궁금했다. 현실에 맞설 힘 따위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을 위해 힘내야 하는지도 몰랐다. 아는 게 없으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누구보다 도태된 인생이라고 받아들이기만 했는데.

“그렇게 살겠느냐?”

루시오 몬데이어가 물었다.

답은 과거에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무엇으로 살고 싶은지는 아직 주어지지 않았을 뿐 잃은 게 아니었다.

“…허락하신다면.”

“네 삶에 내 허락이 필요하진 않을 텐데.”

루시오가 흔들리는 워렌의 눈동자를 한참 살폈다. 방향을 잡은 푸른 피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는다.

그가 은백색 망토에 휘감긴 검을 건넸다. 차마 받지 못하고 한참 바라보는 녀석을 향해 물었다.

“스스로 삶을 지키는 자.”

“…….”

“내가 널 뭐라 부르지?”

그건 누구의 것과도 다른 검이었다. 꼭 저를 부르는 것처럼 아우성치는 검의 기운이 느껴졌다.

워렌이 손을 뻗었다. 제 몸집만큼이나 커다란 검을 집어 든 순간 불 속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

“저는… 워렌.”

아니, 이건 과거의 이름이다.

지켜내야 할 건 이 이름이 아니었다.

“라일리입니다.”

작은 소년이 활짝 미소 지었다.

비로소 용의 이름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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