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67화 (67/133)

67화

11장. 푸른 피(7)

루시오가 건네준 검이 손에서 형형하게 기운을 내뿜었다.

마치 불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강한 기운을 방출하고 공명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허리춤에 보관하고 있는 또 다른 검도 마찬가지였다. 이곳 지하에서 발견한 푸른 검이 불 속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분은 모든 걸 알고 계셨어.’

루시오는 제가 용의 혈족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워렌이 점차 사그라드는 불길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새로운 세상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건 푸른 눈동자를 가진 레온이었다.

‘난, 우리를 지키기 위해 이 검을 잡은 거야.’

이제야 루시오가 제게 맡긴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이 검으로 지킬 수 있는 것들을 지켜야 한다는 그의 유일한 명이 무엇을 뜻하는지, 워렌은 불 속에서 비로소 모든 것을 알아냈다.

“부, 불이 꺼져가요.”

“맙소사,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타들어가던 불길이 점점 푸른빛으로 소멸되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그 신비한 광경에 일행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놀랐다고 표현할 수도 없다.

워렌은 불 속에 존재하고, 푸른 불은 붉은 화마를 집어삼켰으며, 끝내 두 사람은 흠집 하나 입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 있었다.

“워렌!”

레온이 소리쳤다.

워렌이 일행들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움직일 수도 있고, 아픈 곳도 없다. 몸을 살피자 흠집 하나 없었다.

정말, 어린 날 그 사고는 우연이 아니었구나.

“워렌,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레온이 놀란 듯 물었다. 언젠간 모든 걸 설명해야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워렌이 안아 들고 있던 노아를 얼음 위에 내려두었다. 불타지 않은 건 워렌뿐만이 아니었다.

“공자님, 회색 반점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온몸에 퍼졌던 시체병의 흔적이 사라졌다.

믿을 수 없다. 숨죽이고 상황을 살피던 소하의 전투원들이 앞다투어 노아에게 달려왔다.

“숨은? 숨은 쉬어?”

전투원들이 페페에게 물었다. 조심스레 접근한 페페가 고개를 끄덕이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야. 거칠었던 호흡도 정돈됐고, 심장 박동도 멀쩡해.”

“…말도 안 돼. 정말이라고?”

구석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케인이 붉은 머리를 뜯기 시작했다.

정말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꿈이래도 이상했다.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일들이 상의도 없이 꿈속에서 실현될 리가 없었다.

불 속에서 살아나오다니. 아니, 두 사람 모두 불 속에서 새로 태어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다시 체온이 떨어지기 전에 우리는 이만 노아를 살펴야겠어.”

페페가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시체병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아직 그 원인은 남아 있을지 모른다.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그들이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병을 이겨낼 수 있으리란 희망에 모두가 밝은 표정이었다.

“공자님, 저희는 이제 어떡할까요?”

아직 불 냄새가 짙게 남은 화로터 근처에서 일행들이 숨죽여 레온의 결정을 기다렸다.

시체병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으니 메리에게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나 공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너희는 혹시 모르니 임시 거처로 가 대기하도록 해.”

물론 갈 수 없는 이도 있다.

“워렌, 너는 날 따라오고.”

처음 운명이 결정되던 순간에 그랬던 것처럼 레온이 워렌을 콕 집어 명했다.

“예, 공자님.”

레온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왜인지 화가 나 보이는 모습이었다.

***

혹한의 저주는 메리를 스쳐 지났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레온이 서서히 기력을 찾아가는 메리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 넘겼다.

그르르릉.

그녀의 곁에서 몸을 웅크리고 쿨쿨 자던 새끼 스노우 울프가 코를 벌름거렸다.

익숙한 냄새다. 도로 경계를 푼 녀석이 메리의 어깨에 깊게 파고들었다.

“공자님.”

불이 타들어가는 고요한 공간에 워렌의 목소리가 퍼졌다.

새하얀 머리칼을 넘겨주던 손길이 멈추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애써 밝히지 않았던, 불 속에서 떠오른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워렌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레온이 손길을 거두고 결국 시선을 돌렸다.

뒤편에 일렁이는 불길이 조금 전 일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불 속에 뛰어든 거야?”

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극단적인 방법이긴 했지만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얼마나 놀랐다고.’

수천 년을 살아오며 숱한 일을 겪었지만 그런 감정은 처음이다.

레온은 유독 죽음에 예민했다.

동족이 사냥당하고 끝내 살해당해도 스스로 죽을 수 없는 놀라운 생명력을 가진 인어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데 워렌은 예고도 없이 불길에 뛰어들었다. 눈앞에서 마주한 그 충격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어렸을 때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워렌은 아주 오랜 시간 불 속에 머물렀다.

그의 몸에서부터 번져 오른 푸른 불이 서서히 불길을 멈추게 만드는 모습은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전, 마다비아 출신입니다.”

워렌이 그간 겪었던 일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엔드해를 따라 출신을 알 수 없는 자들이 모여드는 곳인 만큼 마다비아에서 겪은 수모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인생 전체가 풍파였다. 보호막 없이 태어난 이들이 으레 겪는 일을 전부 겪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이곳 지하에서 얼어붙은 드래곤을 봤습니다.”

“케인이 말한 게 그 일인가?”

“예, 공자님을 찾기 위해 티나의 요청을 따라야 했습니다.”

밀라쿠만이 열 수 있다 전해지는 곳의 문이 열렸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곳에 잠든 드래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용의 혈족이란 소리지, 지금?”

자세히 알고 있는 바는 없었다.

검은 사냥개들을 피하기 위한 정보만을 기억할 뿐, 관심 두지 않은 세상의 이야긴 기억하지 않았다.

다만, 그런 레온도 드래곤과 용의 혈족이 자취를 감췄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도요.”

레온이 허,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얌전히 메리의 곁에 잠들어 있는 새끼 짐승을 보고, 또 워렌을 보자 슬슬 골치가 아파졌다.

‘설호족도 모자라 이젠 용의 혈족까지?’

모두 피가 끊겨 더는 만나기 어려운 존재들이라 전해지는 종족이었다.

그런 자들이 곁에 있다면 원치 않는 일에 휘말릴지도 모른다.

검은 사냥개들의 정체를 밝히고 데로니스 세력의 확장을 막아야 하는 제게 귀찮은 일이 될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공자님 역시 저와 같은 용의 혈족일 겁니다.”

그때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레온에게 워렌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뭐? 누가… 내가?”

워렌이 대답 없이 두 개의 검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이 자식, 검이 하나 더 생겼다.

“하나는 공작 저하께서 제게 주신 검이고, 다른 하나는 이곳 지하에서 발견한 검입니다.”

두 검 모두 은은한 푸른빛을 담고 있었다. 자세히 보는 건 처음이다.

레온이 워렌의 검을 천천히 살피다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다이아 스틸로 만든 거잖아?’

느껴졌다. 본래의 투명한 빛은 없었지만 분명 다이아 스틸로 만든 검이란 게 보였다.

워렌이 두 검을 바닥에 내려두었다. 검은 워렌의 손을 떠나고도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건 용의 혈족만이 들 수 있는 검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서 저하께서 제게 주신 거고요.”

짐작하건대 루시오는 더 이상 이 검을 다룰 수 없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검술을 익힐 수 있도록 상대해주던 순간에도 그는 검에 절대 손대지 않았다. 마치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압니다, 이젠.”

용의 기운을 느끼고 나니 이제 제 눈에도 보였다.

검에 머무르는 강한 기운은 지하에서 마주했던 얼어붙은 드래곤의 살기와 같았다.

이 강력한 살기를 이겨낼 수 있는 건 같은 피를 가진 용의 혈족뿐이리라.

“그러니 쥐어 보십시오, 공자께서도.”

워렌이 다시 한번 레온 쪽으로 검을 밀어주는 순간이었다.

“도련… 님?”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레온이 단번에 시선을 돌렸다.

“메리!”

레온이 곧장 메리에게 달려들었다. 코를 파묻고 자고 있던 새끼 짐승이 벌떡 놀랄 만큼 빠른 속도였다.

“몸은 좀 괜찮아? 죽어버리는 줄 알았잖아!”

레온이 메리를 품에 안고 그녀의 등을 연신 쓰다듬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을 되찾았다. 꼭 울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

워렌이 그런 레온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미친 소리 같지만 그 모습에서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때 그 나무.

구불거리는 은백색 머리칼을 늘어뜨린 꼬마 아이가 생각났다.

‘두 분은 남매시니, 닮는 게 당연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꼭 레온이 그때 만난….

“메리이이이이이!”

소름 돋는 한기가 몰아치고 단숨에 두터운 장막이 활짝 열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미셸이 메리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재빠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메리! 깨어났어요?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음흉한 미셸이 메리를 껴안는 척 은근슬쩍 레온까지 함께 품에 안았다. 레온이 미셸과 메리 그 가운데서 핀잔을 이었다.

“너, 혹시라도 시체병에 옮으면 어쩌려고.”

“괜찮아요. 저는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준비가 되었는걸요.”

“뭐? 대체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메리가 깨어나 너무 다행이란 뜻이잖아요!”

그게 그 뜻이 아닌 것 같은데.

레온이 눈을 굴리고 있을 때 다시 한번 장막이 거칠게 열리며 미셸과는 비교도 못 할 덩치 큰 케인이 땅을 울리며 달려왔다.

“불구덩이는 선착순입니다! 그리고 거긴 제가 진작 선점했어요!”

아직 저도 껴안지 못한 공자에게 감히 살을 부대끼다니!

케인이 질투에 눈이 멀어 공격적으로 달려가려는 순간이었다.

워렌이 곧장 검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말릴 틈도 없이 케인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으윽!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워렌 경? 저는 같은 편이라고요!”

“원래 그분께 네 편, 내 편이 따로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브라운까지 활짝 장막을 열고 거처 안에 들어섰다.

검집으로 케인의 앞을 가로막은 워렌이 뚱한 표정으로 브라운을 맞이했다.

“떨어져, 미셸. 메리는 아직 환자라고.”

레온이 엄한 목소리로 미셸을 떨어뜨리고 구석에 숨어든 새끼 짐승에게 손을 뻗었다.

메리는 웃고 있었다.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축적된 삶의 경험으로 이미 모든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소란이야?”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가라앉고 레온이 일행들을 향해 물었다.

메리가 겨우 정신을 되찾긴 했지만, 완전히 시체병과 상관없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진 일행들의 안전도 우선이었다.

“공자님.”

예의 이런 일에 입 여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브라운이 늘 그렇듯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노아 씨가 완전히 정신을 되찾았어요.”

“뭐?”

방금 전 일행들이 머무르던 숙소에 마리사가 찾아와 알려주었다.

“드디어 찾은 겁니다. 시체병을 극복할 방법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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