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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68화 (68/133)

68화

12장. 밝혀지는 진실(1)

일행들이 소하의 전투원 기지를 찾았다.

몇몇의 정예병이 묵는 숙소 앞에 도착하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마리사가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여기야, 레온! 모두들 어서 와.”

조금 전까지 맴돌던 긴장감은 완전히 가셨다.

마리사가 전에 없이 밝은 목소리로 일행들을 반겼다.

미셸이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목숨 정도는 구해줘야 반겨 주는구나?”

뒤따라온 케인이 그런 미셸을 위로했다.

“효과가 있다는 게 사실이야?”

“그래, 레온. 조금 전 정신을 되찾고 우리와 대화까지 했어.”

“정말 믿을 수 없어.”

페페와 마리사 두 사람이 방금 전 일어난 일을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마치 시체병에 걸린 적도 없는 것 같은 모습이야!”

“흔적도 남지 않았어?”

“그래, 레온. 직접 볼래?”

장막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훈기가 전해졌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기온을 최대 상태로 유지하는 중이었다.

“지금은 잠들었어. 아직 피곤하다면서.”

한가운데에 노아가 누워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몸 곳곳을 살피자 병세가 머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얼어붙지 못하도록 불태우는 게 해답이었다니.”

일행들이 믿을 수 없는 발견에 놀라워했다.

“내 예상이 맞았어.”

시체병은 몸 안이 얼어붙는 병이었다.

그 속도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전파가 쉬워 살릴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거다.

“회색 반점은 모두 사라진 거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깨끗했다. 그들 말대로 시체병에 걸린 적도 없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레온이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몸 안쪽을 살피려는 그 손길에 페페가 당황하며 재빨리 레온을 붙잡았다.

“아, 안쪽은 우리가 확인했어.”

“어?”

“설마 직접… 보려고?”

그게, 그러면 안 되던 거던가?

순간 공간 안에 고요가 가라앉았다. 레온이 손을 거두고 시선을 돌렸다.

당황한 워렌과 브라운의 눈길이 가장 먼저 날아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들이다.

그 뒤편에서 입을 틀어막은 미셸과 케인도 보였다. 두 사람의 호들갑은 외면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니, 뭐. 아무튼 잘된 일이야.”

예전 날 제니레이에게 무례한 시선을 보내던 버릇은 고치지 못한 것 같다. 브라운이 낙심했다.

저 고고한 공자님께 하나부터 열까지 여인을 대하는 예법을 알려드릴 생각을 하니 골치가 아팠다.

그간 배움이란 배움은 모두 멀리하고 살아왔으니…. 저래가지고 장가는 가실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부집사였다.

“증상이 있는 사람은 더 없어?”

화제를 바꾸기 위해 레온이 재빨리 물었다.

시체병의 전파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노아는 지켜냈지만 이전에 병을 앓았던 나머지 두 사람은 잃고 말았다. 다른 희생이 없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확인해 봤는데 다섯 정도가 더 의심되는 증상을 보이고 있어.”

“우선 격리해 둔 상태야. 물론 미로에 가둬두진 않았어. 그곳은 너무 추우니까.”

시체병이 얼어붙는 병이란 사실을 알아챈 만큼 이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았다.

너무도 춥고 한기가 몰아치는 공간에 격리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래, 아직 모두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건 좋지 않을 거야.”

레온이 페페와 마리사에게 입단속을 당부했다.

비록 실마리를 찾았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당분간 지켜져야 할 비밀이었다.

“난 외부인이니까.”

신뢰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자의 입을 빌려 이 일을 공표하는 게 낫다.

그리고 그 일의 적임자는 따로 있었다.

“티나는 어때? 아직도 정신을 잃은 상태야?”

“…응, 열이 난다거나 다른 증상은 없는데 좀처럼 깨어나질 않으시네.”

페페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티나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지 이제 꼬박 하루가 다 되어간다. 그녀는 잠든 것처럼 여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잘 살펴봐. 언제 깨어나는지 꼭 알려주고.”

“그럴게, 레온.”

대화가 마무리되는 듯하자 케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체병에 대한 실마리도 잡았으니, 이제 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싶었다.

“자, 이제 그럼 끝난 건가요?”

얼어붙은 드래곤도 보고, 산 채로 불길에 휩싸이는 워렌도 봤다.

그런 와중에 쓰러진 메리와 시체병을 이겨내는 노아의 감동 실화까지 겪고 말았으니 정신이 없어도 한참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럼 우린 이만 돌아갈게.”

레온 역시 지독한 피로감에 두 눈이 아플 정도였다.

“노아를 잘 살펴봐. 혹시 모르니 오늘 밤은 곁을 지키는 게 좋을 거야.”

“글쎄,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페페가 활짝 웃으며 고개 저었다. 더는 지켜볼 필요 없다.

“반만 년이 넘는 기록들을 모두 읽은 내가 확신할 수 있어. 노아는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아.”

병의 유일한 증상도 사라졌고 열도 내렸으며 정신을 되찾기까지 했으니 모두 나았다 봐도 무방했다.

게다가 그녀의 심장은 이전과 같이 튼튼하게 뛰었다. 숨 쉬는 소리마저 깨끗해졌다.

“시체병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위대한 발견이었다. 레온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시도해볼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네가 우리를 구했어.”

무려 반만년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됐을지도 모른다.

시체병은 그간 셀 수 없이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하지만 이젠 끝낼 수 있다. 이 혹한의 저주로부터 더 이상 북부는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

“모두 네 덕분이야, 레온.”

두 사람이 레온을 향해 진심으로 고개 숙였다.

아무도 잃지 않게 만들어줘서, 소중한 이들을 무력하게 떠나보내지 않게 도와줘서 그들은 진심으로 레온에게 고마웠다.

“…….”

레온이 진심을 전하는 그들을 보며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감정에 인상을 찌푸렸다.

메리를 위한 결단이었지만 그게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구했다. 기쁜 일이 아닐 텐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뭐, 고마우면 내 부탁도 하나 들어주든가.”

다만, 아직은 이 낯선 감정에 익숙해질 자신이 없었다.

레온이 애써 표정을 숨기고 시선을 돌렸다.

“그래, 네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게!”

“뭔데? 말해 봐.”

자칫 전부를 잃을 뻔했던 위험을 없애 주었으니 뭐든 들어주고 싶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일행들이 모두 레온을 바라봤다. 과연 무슨 부탁을 할지 내심 긴장하는 눈치였다.

“칼.”

레온이 내내 신경 쓰던 일을 입에 올렸다.

“칼?”

자꾸만 흰 천 아래 누워 있던, 잠들지 못한 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까지 그곳에 홀로 남아 있을 걸 생각하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그런 걸로 감정을 낭비하기엔 너무 피곤했다.

“기사 칼을 영면에 들게 해줘.”

레온이 본심을 숨기고 그렇게 요구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부탁이었다.

***

또다시 활활 타오르는 불을 마주했다. 레온의 푸른 눈동자 안에 일렁이는 붉은빛이 비쳤다.

“…….”

전투원들의 배려로 영면식은 총 세 명을 위해 준비되었다.

시체병에 휩싸인 몸으로 이곳까지 찾아온 칼과 그를 데려다주기 위해 희생된 나머지 두 병사를 위한 불꽃이었다.

“시신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마차를 발견했던 부근까지 내려가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병사들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지.”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하고 있던 전투원들이 그대로 영면식을 위해 주검이 된 기사 칼을 얼음 속에 파묻었다.

주변에 강한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바다에 흘려보낼 수 없는 이곳에선 시신을 태워 영원한 안식을 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인간들의 죽음에 무딜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레온은 그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다.

지키지 못한 목숨의 무게가 점점 외면하기 힘들어졌다.

레온이 눈을 감았다. 이곳까지 오기 위해 희생된 영혼을 위해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레온은 따르기 정말 좋은 사람 같아요.”

먼 곳에서 메리와 함께 불길을 바라보던 미셸이 말했다.

“아니… 그냥 좋은 사람이죠. 레온은.”

“그런가요?”

“응, 처음엔 몰랐지만 지금은 알아요.”

레온은 타고난 리더였다.

적어도 그가 가는 길에 함께하는 이들은 늘 동등한 곳에 머물렀다.

늘 한참이나 앞장서 있지만 위에 군림하진 않는다. 어린 미셸이 바라보는 레온은 그런 사람이었다.

“안심하고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분이죠. 내가 나를 돌보지 않아도 도련님께서 우리를 챙길 테니까.”

메리가 곁에 앉은 새끼 짐승의 미간 사이를 쓰다듬었다.

자존심 강하고 감정 표현에 서툰 공자께서는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레온은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 아버지도 좋은 사람이었어요. 비록 똑똑하진 못했지만.”

레온을 볼 때마다 아버지 아이작 토바가 떠올랐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사람이라 레온을 볼 때마다 자꾸만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세상에 좋은 사람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랬다면 지금 이런 감정은 느끼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아버지도, 작은오라비도, 또 팔려가듯 센느를 떠나야만 했던 언니들도 모두 웃으며 함께 지낼 수 있었을 텐데.

미셸의 어깨가 눈에 띄게 축 처졌다. 메리가 그녀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가족들이 많이 보고 싶어 그러세요, 아가씨?”

당차고 씩씩했지만 미셸도 아직 열일곱이었다. 가족들을 떠나 많은 고초를 겪을 만큼 억세게 살아오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아이작을 떠올리니 그리움이 더 간절해졌다.

미셸이 눈 끝에 묻어나는 뜨거운 눈물을 애써 감추며 메리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크르르.

그때 곁에서 경계하던 새끼 스노우 울프가 귀를 쫑긋하며 코를 벌름거렸다.

그러곤 미셸과 메리의 앞을 가로막고 하늘을 향해 위협을 가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목청을 울려댔다.

“아, 아르고?”

미셸이 벌떡 일어났다.

하늘 위에 유려한 날개를 퍼덕이고 있는 건 분명 센느의 전서조, 아르고였다.

“맙소사! 아르고가 날아왔어요!”

그녀가 손을 뻗었다.

주인을 알아본 아르고가 용맹하게 활공하며 그대로 미셸을 향해 날아왔다.

날카로운 흰 발톱 아래 튼튼한 가죽 주머니가 묶여 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센느로부터 날아온 소식일 것이다.

“무슨 일이야? 아르고라니.”

레온과 일행들이 달려왔다. 먼 곳에서 아르고를 알아본 마리사도 시선을 집중했다.

“서신이에요.”

미셸의 팔에 조심스레 안착한 아르고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눈 폭풍을 뚫고 먼 곳까지 날아온 터라 녀석도 많이 지쳐보였다.

미셸이 재빨리 가죽 주머니에서 서신을 꺼내들었다. 몰라보게 표정이 환해진 그녀가 냉큼 소식을 읽기 시작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환하게 미소 짓고 있던 미셸의 입꼬리가 무거운 추를 단 듯 곧장 내려앉았다.

곁에 서 있던 메리가 휘청거리는 미셸을 부축했다.

“…말도 안 돼.”

툭.

미셸이 들고 있던 서신이 힘없이 얼음 바닥에 나뒹굴었다.

지켜보는 모두가 예감했다.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걸.

“어떡해요…?”

마리사가 놀란 표정으로 달려왔다. 미셸이 곧장 그녀의 품에 안겨들었다.

“어머니가… 어머니가 위독하대!”

들려온 소식은 모두의 예상보다 더 처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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