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69화 (69/133)

69화

12장. 밝혀지는 진실(2)

미셸이 거칠게 눈물을 닦아냈다.

“센느로 돌아가야겠어.”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곳에 머무를 순 없었다.

어쩌면 가는 동안 그녀가 떠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도도 해보지 않고 잃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머니를 마주할 기회는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공자, 공자는 이미 이곳 소하에 와 있고 더는 내가 필요하지 않을 거예요, 맞죠?”

미셸이 꾹꾹, 마음을 눌러 담고 말했다.

애초에 동행을 자처한 건 일행들을 소하까지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외부인에 대한 적개심이 강한 이들이니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 혼자 보낼 순 없어, 미셸.”

상황은 알지만 홀로 센느에 보낼 순 없었다. 레온의 걱정에 미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북부인이야.”

“혹한은 출신을 가리지 않아.”

“난 단 한 번도 이곳을 떠난 적 없어. 혹한 따위 무섭지 않아. 무섭다고 도망치는 건 토바인들이 아니니까.”

이곳에서 나고 자란 만큼 미셸은 혹한에 대한 어려움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니까 이길 수 있다. 혹한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기 때문에 대비할 수 있었다.

미셸이 더는 닦아지지도 않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를 잃는 건 두려워.”

마지막조차 함께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혹한이 앞을 가로막는다고 포기해버린 걸 알면 어머니가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것만 같았다.

결국 어린 미셸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레온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브라운, 서신에 더 적혀 있는 내용은 없어?”

“북부 전역에 시체병이 퍼졌고, 센느 역시 무기한 대비에 들어갔다는 소식입니다.”

“역시 병이 퍼졌구나.”

이 소식이 북부를 벗어나지 못했을 리는 없다.

데로니스 녀석들도 분명 시체병에 대한 두려움은 있을 터.

레온이 품에 안긴 미셸을 똑바로 바라봤다.

“함께 센느로 가자, 미셸.”

그들도 발이 묶였을 것이다.

레온의 결단에 미셸이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공자, 센느로 돌아가면 상대해야 할 세력과 더 가까워지는 거잖아요. 나 하나 때문에 그런 일을 하게 두고 볼 순 없어요.”

게다가 소하에 온 목적도 이루지 못했다. 그들 대부분은 아직까지도 레온을 외부인으로 취급하고 적개심으로 대했다.

티나가 쓰러져 있는 이상 그 마음은 쉽게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레온이 이곳 소하를 위해, 또 북부를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제대로 알리지도 못했다.

“나 때문에 공자의 시간을 낭비하게 할 순 없어요.”

미셸이 저를 붙잡은 레온을 밀어냈다. 흐르던 눈물도 쏙 들어갔다.

이번만큼은 워렌도, 브라운도 레온의 편을 들어주지 못했다.

일리나 명분은 레온보다 미셸 쪽에 있었다.

“내가 데리고 돌아가겠어.”

“…마리사?”

미셸이 놀란 듯 제 언니를 돌아봤다.

마리사가 어깨 위를 단단히 감싸던 백색 망토를 천천히 풀어냈다.

“난 죽기 위해 소하에 왔어. 아니, 죽어도 상관없어서 이곳을 찾아왔지.”

언제든 무너져 얼음 속에 가라앉아도 이상하지 않을 이곳 소하를 찾은 건 죽어도 상관없기 때문이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이에게 팔려 가듯 혼인하는 건 원치 않았다.

“미래 없는 미래 따윈 필요 없었으니까.”

페페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전부 그랬다. 현실에 기댈 수 없어 도피를 택했다.

소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열려 있는 곳이다.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이 없는 자들을 위한 곳.

이름 뒤에 따라오는, 선택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온 자들을 위한 곳이 바로 소하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어.”

마리사가 울고 있는 미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오만이었다. 죽고 싶지 않다. 조금 더 오랫동안 삶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원래 내 인생을 내팽개치고 살아갈 수는 없는 거잖아?”

가족의 죽음을 외면하고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마리사 토바는 그런 짓을 할 수 없었다.

나도 아닌 모습으로 누군가의 앞에 설 수 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마리사가 미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가자, 미셸.”

***

소하가 떠들썩했다.

영면식과 살아 돌아온 노아, 그리고 떠나는 마리사의 문제로 의견이 분분했다.

“모든 걸 정리하고 돌아올게. 날 다시 받아줄지 잘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이걸 잘 부탁해.”

페페가 마리사의 백색 망토를 받아 들었다.

거짓으로 도망치듯 떠나온 삶을 마무리 짓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그 약속에 할 수 있는 건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일뿐이었다.

“미셸….”

기사 케인이 코를 훌쩍였다.

보면,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 외면하고 있던 미셸도 축축한 눈가를 훔쳤다.

“지난번에 곰 고기 뺏어 먹은 거, 사실 저예요.”

“…그럴 줄 알았어.”

“배고프다고 미셸 잘 때 몰래 훔쳐 먹은 거 미안해요.”

“괜찮아요. 나도 케인 잘 때 짜증 난다고 코 쥐어박은 적 있거든요.”

“…어쩐지 아프더라.”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유난히 체구가 작은 미셸보다 배는 더 커 보이는 케인이 먼저 울음을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미셸도 그런 케인의 품에 안겨 그의 등을 두드렸다.

“저 자식을….”

마리사가 동생을 껴안은 케인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은 그런 마리사의 눈길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이곳 지형은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스노우 탑 근처로 가면 얼음이 녹아 특히 미끄러운 곳이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군.”

워렌도 떠나는 이들을 위해 도움을 보탰다.

지도를 유심히 살피던 마리사가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한이 물러가고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 시야만 확보할 수 있다면 어려울 것도 없겠죠.”

슬슬 혹한의 절기가 끝나가는 시기였다. 몰아치는 눈 폭풍이 잠잠해질 테니 그리 어려운 여정은 아닐 것이다.

마리사가 지도를 접어 방한복 안쪽에 단단히 집어넣을 때였다.

미셸이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메리이이이이!”

그녀가 메리의 품에 파고들었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은 메리를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두 사람은 무척이나 정이 든 상태였다.

“아프면 안 돼요. 건강 관리 잘하구요, 응?”

“예, 아가씨.”

“…너무 걱정이에요. 북부는 위험하단 말이야.”

건강한 사람도 견디기 힘든 곳에 늙은 몸으로 머무르고 있으니 걱정을 막을 순 없었다.

메리가 품에 안긴 미셸의 여린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걱정 마세요.”

“어떻게 그래요. 이렇게나 좋아져 버렸는걸.”

메리가 품에 안긴 미셸을 내려다봤다. 제가 늘 머리를 빗어주던 아가씨와 똑 닮은 심통 맞은 코를 보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가씨, 강인해지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곁을 지켜주는 분들 품에서 조금 더 기대고 자라나세요. 아직은 그래도 된답니다.”

너무 일찍 클 필요 없다.

언젠간 기대고 싶어도 기댈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올 테니 말이다.

“…메리.”

그르르릉.

미셸과 메리가 동시에 발치로 시선을 돌렸다. 메리의 치마 속에 숨어 있던 새끼 짐승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널 부를 이름이 아직까지 없다니.”

미셸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주저앉았다.

야생성이 강하고 늘 잇몸을 드러내던 놈이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얌전하다.

“꼭 레온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해. 알았지?”

녀석이 가만히 마주 앉아 눈을 깜빡거렸다.

천천히 눈인사를 건네는 새끼 짐승을 보곤 미셸이 눈물을 닦아냈다.

“아가씨.”

씩씩하게 일어나자 브라운이 미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손수 미셸의 어깨에 방한 망토를 둘러주었다.

“제가 만나본 여느 남작가의 아가씨 중 가장 용감하고 멋진 분이셨습니다.”

“…….”

“아가씨와 동행할 수 있어 영광이었어요.”

미셸이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브라운의 미소를 보며 양 볼을 빨갛게 물들였다.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예?”

이유 없는 다정은 범죄나 다름없었다. 미셸이 제 볼을 톡톡 쳐대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그나저나 공자는요?”

조금 전부터 레온이 보이지 않는다. 미셸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주변을 살폈다.

“글쎄요. …어디 가셨는지 알 수가 없네요.”

이별에 약한 분이니 어쩌면 일부러 자리를 피했을지도 모르겠다.

브라운이 다시 한번 미셸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다.

마리사가 그런 미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갈까?”

“그래, 이만 가야겠지.”

길고도 짧았지만 끝은 왔다.

미셸이 잠시나마 가족이 되어주었던 일행들을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다들, 우리 꼭 만나요!”

“다녀올게, 페페.”

두 자매가 일행들의 배웅을 받으며 소하를 떠났다.

하늘 위엔 토바가의 전서조, 아르고가 넓은 날개를 펼치며 날고 있었다.

***

경비 인력이 눈에 띄게 줄었다.

얼음 요새의 외벽을 살피는 이들을 제외하고 내부 인원이 소하에 몰아친 난리 통에 휩쓸린 모양이었다.

‘…시간이 없어.’

레온이 주변을 살폈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를 틈타지 않는다면 언제 또다시 기회가 올지 몰랐다.

‘아직 쓰러져 있어.’

눈을 감고 기운을 느꼈다. 쿵쿵 일정한 박동으로 뛰어대는 라피스의 기운이 느껴졌다.

티나와 타티아나, 두 사람의 기운 모두 요동 없이 잔잔했다.

레온이 주변을 경계하며 서서히 그들의 거처로 다가갔다.

‘메모리아 라피스를 만들면 타티아나의 기억을 빼낼 수 있어.’

라피스를 빼앗아 수천 년의 시간을 살았을 테니, 그 기억을 얻는다면 이곳과 관련된 진실들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지하에 잠들었다는 얼어붙은 드래곤도, 용의 혈족과 관련된 이야기도. 그리고 다이아 스틸을 다룰 방법과 그 기회를 얻은 자들의 이야기를 알 수 있겠지.

레온이 긴장된 모습으로 숨을 몰아쉴 때였다.

‘…뭐지? 기운이 변했어.’

잔잔하게 파동처럼 느껴지던 타티아나와 티나, 두 사람의 기운이 이상해졌다.

누군가의 라피스가 미약하게 저물어간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연약한 그 기운에 레온이 서둘러 거처 안으로 들어섰다.

‘대체 누구야!’

진입은 어렵지 않았다. 이곳을 지키는 정예병들은 모두 마리사를 배웅하기 위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레온이 장막을 걷고 매캐한 연기가 내려앉은 내부로 진입했다.

얇은 막 너머 타티아나와 티나,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게 보였다.

레온이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타티아나.”

호흡이 가쁘다. 이대로 두면 금방 죽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안 되는데.”

메모리아 라피스는 반드시 라피스가 존재할 때만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죽어버리면 타티아나가 수천 년간 보고 들은 기억을 영영 모두 잃게 된다.

“이래가지곤 숨도 못 쉬겠어.”

레온이 가까이 다가가 늘 타티아나를 뒤덮고 있는 백색 망토를 붙잡았다.

그러곤 세월의 존재를 가리기 위해 덮어둔 그 묵직한 후드를 벗겨냈다.

“…뭐야.”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타티아나의 본모습이 보였다.

레온이 털썩, 주저앉아 곧 죽을 것 같은 늙은 노인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분명… 여자라고 했는데?”

하지만 그곳에 누워 있는 건 늙은 노인의 모습을 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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