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12장. 밝혀지는 진실(3)
“정말 고마워, 언니.”
한참 마리사의 뒤를 따르던 미셸이 그렇게 입을 열었다.
“뭐가 말이야?”
“센느까지 함께 가줘서.”
“당연한 일이야. 그곳은 내 고향이기도 하잖아.”
또 몰아치는 북풍 앞에 목숨이 위태로운 자 역시 제 어머니이기도 했다.
“언니는 센느를 버린 게 아니구나.”
“응, 소하를 택했을 뿐이지.”
가족들의 곁을 떠난 건,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끝끝내 인생의 후회로 남게 될 것이다.
“모든 건 내 선택이야, 미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건 어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미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제가 알던 언니로 돌아온 모습에 더 이상 함께하는 길이 두렵지 않았다.
“언니, 정말 다시 소하로 돌아갈 거야?”
물론 확인하고 싶은 건 아직 남아 있었다.
미셸이 마리사에게 물었다. 기껏 함께하게 됐는데 다시 떠난다니. 붙잡을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글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면 돌아가야겠지. 두고 온 게 있으니까.”
“…그렇구나, 역시.”
미셸은 묻지 않았다.
마리사가 무엇을 선택했는지 듣는 것보단 그녀가 마음에 품은 진심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아르고가 길을 잡아주고 있으니 늦어도 나흘 후면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응, 더 이상 폭풍도 불지 않을 테니 다행인 일이지?”
“그래, 미셸.”
숨통이 한결 트였지만 이곳 혹한의 땅에 완전한 안전 따위는 없다.
북부 땅엔 가혹한 추위 말고도 아직 토벌되지 않은 무리 짐승이 존재했다.
미셸은 자연스레 떠오르는 새끼 짐승의 귀여운 얼굴과 퉁퉁한 몸집을 생각하며 조금 울적해졌다.
조금만 더 정을 나눴다면 좋은 친구가 됐을 것이다. 그 귀여운 앞발을 한 번은 꼭 눌러보고 싶었는데.
“레온은 우리 소하가 세력을 보태주길 바라는 거지?”
그때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마리사가 물었다.
직접 언급한 적은 없지만 모두가 레온이 소하를 찾은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데로니스 세력 앞에 멸문을 맞이했으니,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해 애쓰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우리 센느와 페르탈린, 그리고 다른 북부 소영지 역시 힘을 보태기로 결정했고.”
“그간 몬데이어 공작가에서 도움 받은 일이 있으니 당연한 거야.”
“그럼 소하는 어때? 언니는 그곳에서 오래도록 지냈으니 짐작할 수 있을 것 아니야.”
그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소하는 오래도록, 어쩌면 영원히 독립된 영역으로 존재할 게 너무도 당연했다.
“타티아나 님과 티나 님이 머무르는 이상 레온은 그곳에서 힘을 얻지 못할 거야.”
“하지만 레온은 시체병에 대한 실마리도 밝혀냈잖아.”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분들이 그렇게 정직하지는 못한 성격이거든.”
“뭐라고?”
시체병을 이겨내는 방법을 밝히고 난다면 그걸로 끝일 가능성이 컸다.
알게 된 사실엔 더 이상 빚지지 않는 법이니, 레온이 조건 없이 정보를 내어준다면 결코 소하로부터 얻어낼 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레온 곁엔 머리 쓰는 자가 있잖아?”
“헙… 우리 브라운 님을 말하는 거야, 언니?”
“어째 목소리가 높아지고 눈빛이 반짝인다?”
“내, 내가 언제!”
“뭐야, 무슨 진전이라도 있는 거야, 미셸?”
미셸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마리사는 그 시무룩한 얼굴에서 이미 답을 알았다.
달이 슬슬 모습을 드러냈다.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마리사가 미셸의 뒷덜미를 단단히 품에 안았다.
“그리움이 때로는 살아갈 이유를 주기도 해. 그러니 미셸, 너도 간절히 원한다면 오래도록 마음에 품어봐. 언젠간 이루어질지도 모르잖아?”
늘 진정한 사랑을 꿈꿨던 자신에게 찾아온 그 기적처럼 말이다.
마리사가 동생의 여린 어깨를 다시 한번 토닥여 주었다.
“아르고가 쉬어가려나 봐.”
“우리도 몸을 숨기자.”
거대한 밑동을 자랑하는 오래된 나무 아래 두 사람이 자리 잡았다.
바람과 눈발을 막아줄 공간을 찾아냈으니 이제 남은 건 한시도 쉬지 않고 공격하는 추위를 버티는 일이었다.
나무 꼭대기 위에 거대한 전서조가 머물렀다.
날개를 모두 접고 몸을 웅크렸지만, 까만 눈만큼은 매섭게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오늘 밤은 아르고에게 경계를 맡겨도 괜찮을 것이다. 마리사가 지친 동생에게 얼기 직전의 물을 건네주었다.
“불은 짐승들에게 들킬 위험이 있어. 굴을 팔 테니 교대로 그곳에서 몸을 녹이자.”
“언니,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날 뭐로 보는 거야. 소하에서 외부 정찰만 벌써 5년, 티나 님의 정예병으로 2년을 지낸 몸이라고.”
그게 뭐, 축하할 일이든가.
미셸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자랑하고도 민망해진 마리사가 금세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래 지났네. 내가 센느를 떠난 지 말이야.”
단단한 도구를 이용해 굴을 파고 있자니 예전의 날이 떠올랐다. 마리사의 손길이 점차 느려졌다.
할 줄 아는 게 응원밖에 없는 미셸도 얌전히 앉아 그런 언니의 감정을 방해하지 않았다.
“언니, 내게 말해줄 수 있어?”
“…….”
“왜 센느를 떠났는지.”
빛을 가로막는 구름이 모두 걷혔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 자리 잡은 건 찬기와 서로가 내뿜는 숨결밖에 없었다.
마리사가 제 손에 들린 단단한 돌칼 도구를 바라봤다.
험한 것을 쥔 손은 더 이상 남작가의 영애의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아버진 정말 좋은 분이셨지만 사람마다 원하는 게 다르다는 건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분이셨지.”
마리사가 어렵게 이야길 꺼냈다.
“누군가는 좋은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게 꿈일지 몰라도 난 그저 내 이름, 마리사 토바로 더 살고 싶었거든.”
할 수 있는 게 고작 누군지 모를 남편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는 생활은 정말이지 지옥 같았다.
물론 아버지의 마음도 이해한다.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곳에 오래도록 자식들을 두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게 나에겐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을 뿐이야, 미셸.”
“…가족을 떠날 만큼?”
“그래, 나고 자란 그곳을 떠나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누군가의 이해는 바라지 않는다. 잘못한 일이 아니니 인정받길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슬퍼할 어머니, 그리고 마음 약한 덴과 막냇동생의 앞에서 죽음을 택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럼, 소하는 어떻게 가게 된 거야? 정말… 밀라쿠란 자가 언니 꿈에 나타나 그곳으로 오라고 했어?”
순수한 어린아이 같은 질문에 마리사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니, 그런 계시 따위는 없어. 모두 지어낸 말이야.”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전투원들의 꿈은 모두 거짓이었다.
예전 언젠가는 모두 같은 꿈을 꾸고 소하 땅에 모여들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전설 같은 그 이야기를 이유 삼아 어디에도 갈 곳 없는 이들이 모여들 좋은 명분이 되어줄 뿐.
“실제로 꿈을 꾼 자가 없으니 누구도 각자가 꾼 꿈을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지. 우린 그냥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오래된 설화를 조금 이용했을 뿐이야.”
이야기를 듣던 미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 곳이 필요한 이들의 거짓말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타티아나와 티나가 막지 않은 이유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게 거짓이란 걸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아무런 제지도 없이 그냥 받아줬다고?”
“그게 좀 이상해.”
그 부분에 대해선 소하의 전투원들도 늘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두 분은 외부인을 극도로 혐오하면서도 늘 기다리고 있거든. 누군가가 소하에 찾아오기를.”
“기다린다고?”
“나도 그들이 누굴 기다리는지 모르겠어. 정말 밀라쿠가 되돌아올 거라고 믿었던 걸까?”
항상 꿈을 꾸듯 밀라쿠가 오길 기다리던 타티아나의 음성은 지금도 귓가에 생생했다.
티나 역시 이해할 길 없으나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기다렸다.
마치 기다려야만 살 수 있는 것처럼 하염없이.
“꼭 누군가에게 세뇌라도 당한 것 같다니까.”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안 되겠다. 이제 자야겠어.”
피로한 여정에 재미가 되어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마리사가 입구를 완만하게 다지고, 금세 한기가 벗어난 안쪽을 톡톡 두드렸다.
“어서 이리 와서 몸을 뉘여. 조금이라도 체력을 보충하는 게 좋을 거야.”
“응, 언니.”
센느까지는 쉬지 않고 걸어야 한다. 마리사가 여린 미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도, 이곳에서도 하늘에 비친 달은 똑같은 곳에 있을 테니.
***
“드디어 나타났군.”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한 섬 한가운데.
편안한 의자에 앉아 장작불을 바라보던 노인이 미소 지었다.
“내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가 읽고 있던 기록지를 내려두었다.
제가 기억하는 세상의 모든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적어 놓은 아주 중요한 문서였다.
“드디어 나타났어, 드디어!”
그가 세로로 길게 늘인 것처럼 가느다란 몸을 천천히 이끌었다.
흔들거리는 의자 근처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은 서적들이 끝없이 늘어져 있었다.
“저 불 속에서 푸른빛이 타오르는군. 드디어 그 피를 되찾은 게지.”
꺼진 적 없이 타오르던 불길 속에 푸른빛이 섞여들었다.
이건 아주 오래된 주술이었다. 과연 평생을 걸고 이끌어온 과업이라 할 수도 있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전부를 걸고 기다릴 만큼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다.
“흐, 흐흐!”
그가 푸른빛이 형형한 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온몸을 타고 흐르는 핏속에 누군가의 기억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붉은 눈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이었다.
아득한 시간을 모두 흡수하며 늙은이가 기괴하게 입을 뒤틀고 웃어 젖혔다.
“용의 혈족…!”
용은 반드시 용을 불러들이게 되어 있다.
오래도록 기다려 온 용의 혈족을 찾아내기 위해선 이런 위험한 술수가 필요했다.
죽은 자의 몸집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힘 말이다.
‘혹한이 부는 곳에 있었군. 역시 내 생각대로야.’
수많은 곳에 보내놓은, 되살린 자들 중 응답한 건 서대륙 최북단에 위치한 타티아나와 티나의 곁이었다.
긴 시간이었으나 결국 역할을 해냈다.
술사가 고스란히 티나의 기억을 흡수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붉은 눈을 통해 바라본 용의 혈족은 너무도 완벽한 모습이었다.
젊고 건강한 인간의 모습.
금발의 푸른 눈과 온몸을 단단하게 에워싼 용의 기운까지.
“…네 심장을 가지러 가지.”
멈추지 않는 용의 심장과, 고귀한 라피스만 있다면 영생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
오직 그 순간만을 위해 여태껏 버텨왔다.
영생을 얻는 기쁨을 맛보기 위해 수많은 생명을 탈했다.
늙은이는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위대한 발견 앞에 그런 작은 생명 따위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소하, 그곳으로 가야겠군.”
늙은 노인이 음흉한 표정으로 푸른빛을 움켜쥐었다.
이제 모든 건 제 손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