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71화 (71/133)

71화

12장. 밝혀지는 진실(4)

“안 돼!”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매캐한 연기가 가득한 공간에서 티나가 번쩍 두 눈을 떴다.

꼭 피눈물을 흘린 것처럼 붉었던 눈동자는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아주 연한 빛의 녹색이었다.

‘방금 그게… 대체 뭐였지?’

이상한 기억이 떠올랐다. 티나가 작은 손으로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혼란스러움에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누군가가 내 기억을 엿보고 있었어.’

정신을 잃기 전 워렌과 맞닿았던 손끝에서부터 알 수 없는 기억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머물렀던 중요한 기억은 파도를 타고 휩쓸리는 것처럼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건 고통뿐이었다.

티나가 숨을 헐떡거리며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웅크린 채 숨을 골랐다. 이제야 겨우 진정이 되는 듯했다.

‘뭔가 좀 이상한데.’

그녀가 천천히 제 손을 바라봤다. 매일같이 보던 손인데 낯선 것을 보는 것처럼 이질감이 느껴졌다.

티나는 두려움에 휩싸인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곤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누구도 없어야 할 공간에 낯선 이가 자리했다. 바로 레온이었다.

티나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레온에게 다가갔다.

“타티아나에게 무슨 짓을…!”

레온은 누워 있는 타티아나의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죽은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방금 전 겪은 일보다 지금 상황이 더 이상했다.

티나가 서둘러 두 눈을 비볐다.

“왜 빛이… 나는 거야?”

레온과 타티아나 주변에 빛이 맴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빛보단 어떤 기운이었다.

일렁거리는 기운은 타티아나의 몸에서 점차 레온의 손끝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티나가 몇 번이고 두 눈을 비벼대다가 정신을 차렸다.

감히 타티아나에게 손을 대다니. 그녀가 레온을 밀어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타티아나?”

두 눈을 가리던 붉은 기운이 모두 사라지고 나자 드디어 세상이 온전히 보이기 시작했다.

티나가 차마 손을 뻗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나자빠졌다.

익숙한 타티아나의 모습은 전혀 없고, 그곳에 처음 보는 낯선 이가 누워 있었다.

“…남자?”

냄새가 났다. 매일같이 자신을 달래주고 위로해주던 따뜻한 존재의 냄새가 묻어났다.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지만 느낄 수 있었다. 누워 있는 남자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타티아나란 사실을.

하지만 어째서? 원래부터 남자였던 걸까? 내가 그것도 모르고 살았던 걸까?

“…으, 으윽!”

다시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밀려왔다. 세상의 모든 인지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제가 알고 있는 사실들이 전부 거짓이 되고, 그 거짓 속에 가려내야 할 중요한 정보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티나가 타티아나의 곁에 무릎 꿇고 두 눈을 감았다.

길을 알려주던 이가 눈을 감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도, 도와줘.”

기댈 사람이 필요했다. 티나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의지할 수 있는 게 지금은 레온밖에 없었다.

“나 좀… 도와줘, 레온!”

그리고 레온의 손을 잡은 순간, 티나의 머릿속으로 혼재된 기억이 밀려들었다.

막을 수 없는 타티아나의 기억이었다.

***

과거 속에서 눈을 떴다.

레온은 이곳이 타티아나의 기억 속이란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방대한데?’

기억을 실체화하기 위해선 몸 안에 있는 라피스를 통해 상대방의 라피스를 끌어내야 했다.

많은 힘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물론 레온은 이전에도 스스로 메모리아 라피스를 남긴 적이 있어 길들이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레온이 온전히 타티아나에게 집중했다. 손끝을 따라 몸 곳곳에 나 있는 라피스를 훑었다.

수천 년간 타티아나가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이 라피스를 통해 점차 레온에게 넘어오기 시작했다.

‘…바다잖아?’

타티아나의 기억 속 가장 깊은 곳에 묻혀 있는 건 바다에서의 날들이었다.

익숙함이 물씬 밀려들었다. 나고 자라 고통을 겪고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떠돌았던 그 깊은 바닷속에서 레온이 눈을 떴다.

“내 말 안 들을 거야?”

“언니는 항상 안 된다고만 하잖아.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위험하잖아.”

“어떻게 바다가 위험할 수가 있겠어? 말도 안 돼.”

긴 실타래 같은 물빛 머리를 한 타티아나가 작은 인어에게 손을 뻗었다.

“너, 정말!”

“그래봤자 물속에선 우리가 더 빠르거든?”

“말 안 들을래? 이리 안 와?”

재빠르게 헤엄치는 동생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체구가 작은 인어는 물살을 더 빨리 탈 수 있었다.

거침없이 앞서가는 동생을 보며 타티아나가 전속력으로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티나!”

타티아나와 같은 머리색을 한 티나가 활짝 미소 지으며 뒤돌았다.

휘어지게 웃는 두 눈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내가 이날만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방해하지 마, 타티아나!”

달빛이 바다와 가장 가까워지는 날이다. 인어들은 이맘때면 늘 물 밖으로 나가 그 빛을 느꼈다.

그건 끝없이 넓은 바다에서 존재의 의미를 잃지 않는 방법이기도 했고, 몸 안에 흐르는 라피스를 다스리는 방법이기도 했다.

“정말 못 말린다니까. 같이 가, 티나!”

그녀가 빠른 속도로 앞서 나가는 동생을 따라잡기 위해 애썼다.

물 밖은 위험한 곳이다. 언제 라피스를 노리는 인간 무리가 나타날지 몰랐다.

아직 그들을 직접 본 적 없는 티나는 유독 겁이 없었다.

바깥세상을 궁금해하는 마음 역시 그 누구보다 컸다.

“와, 진짜 상쾌해!”

“그래도 너무 바깥까진 나가지 마.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물로 뛰어들어야 하니까.”

“그래, 알겠다구.”

누굴 탓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저 곁에서 알려줄 시간이 더 필요한 일일 뿐.

하는 수 없이 타티아나가 위험을 무릅쓰고 티나의 곁을 지켰다.

불안으로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동생의 즐거움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해주 님께서 아직까지 이 근방에 그들이 나타났다고 한 적은 없잖아.”

“그래, 여긴 해무가 많이 끼는 곳이라 시야 확보가 어렵다고 했거든.”

“근데 뭐가 문제야? 좀 안심하면 안 돼?”

동그란 눈을 가진 아름다운 티나가 언니에게 물었다.

인간들이 침범하기에 아직까지 자연은 인어의 편이었다.

하늘도, 물길 속도, 심지어 주변을 맴도는 바람까지도 모두 자연 속 인어들에게 호의적이었다.

“티나, 타티아나! 너무 위험해.”

“빛을 느끼기엔 물속도 충분하지 않니? 어서 돌아와.”

어느새 주변에 속속들이 다른 인어들도 올라오기 시작했다.

속력이 빠른 아이 인어들을 따라잡기엔 여전히 무리가 있었다.

“조금만요! 잠깐만 더 있다가 금방 갈게요!”

얼마 만에 세상 구경을 하는지 모른다.

인어들은 늘 사냥개들을 피해 어두운 심해 속을 떠돌거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유령섬에서나 숨을 고를 뿐이었다.

오늘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티나가 바다 한가운데 솟아 있는 가파른 바위산 가장자리에 도착했다.

늘 그녀의 곁을 지키는 타티아나는 이번 역시 위험을 무릅쓰고 동생과 가까이에 자리했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아?”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찰박찰박, 파도가 암석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주변을 채웠다.

달빛을 느끼던 인어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응시했다.

“…이 바위섬이 원래 이렇게 컸던가?”

그러고 보니 늘 보던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평소와 달리 바람도 잘 불지 않아….”

주변을 가득 메운 해무가 기온을 더 낮게 만들었다. 날을 잘못 잡았는지 달빛도 잘 보이지 않았다.

평소보다 유독 어두운 하늘에 인어들이 하나둘 동요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달라졌다.

“쉿, 다들 물속에 몸을 숨겨!”

사냥개들이 쉽게 찾아오지 못하는 독한 환경은 인어들에게도 어려운 곳이었다.

물길을 거슬러 이곳까지 오느라 지친 인어들이 대다수였다. 아무리 생명력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체력은 별개의 문제다.

더군다나 달빛을 보기 위해 나온 때는 라피스의 기운이 가장 떨어져 있는 시기였기 때문에 가장 연약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다들 왜 이렇게 겁먹은 거야?”

물 밖으로 나와 마냥 즐거운 티나는 인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바람이 잔잔하면 돌아가는 길이 평탄할 테니 좋은 게 아닌가 싶었다.

빛이 잘 보이지 않는 건 아쉽지만,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줄 테니 이 해무 또한 다행인 일이었다.

정말이지 다들 겁이 너무 많다니까.

“안 그래, 언니?”

툴툴거리는 티나가 타티아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티, 티나….”

타티아나가 두려움에 휩싸인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투명한 눈동자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건 뒤편에서 저를 덮치는 이들의 움직임이었다.

“언니, 도망 가.”

티나가 제 운명을 직감했다. 재빨리 몸을 돌리자 날렵한 움직임으로 다가오는 검은 인영이 보였다.

“목표물을 발견했다! 모두 조준하라!”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바위섬 안쪽에서 거대한 몸집의 사냥개들이 여럿 튀어나왔다.

검은 투구를 뒤집어쓴 자들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인어들부터 위협하기 시작했다.

달빛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밝은 빛이 터지며 인어들의 시야를 앗아갔다.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물이 진동했다. 산발적으로 터지는 뜨거운 불꽃이 순간적으로 물의 온도를 뜨겁게 달구었다.

“다들 도망쳐! 물속으로, 어서 다들 헤엄쳐!”

“하지만… 너무 뜨거워!”

순식간에 주변이 환하게 밝혀졌다.

뒤편의 바위섬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함선이 머무르고 있는 게 보였다.

인어들이 소리쳤다. 물 밖으로 헤엄치는 타티아나를 붙잡을 수 있는 이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티나, 티나! 안 돼!”

동생이 제 앞에서 사라졌다. 홀로 붙잡혀 가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가장자리로 접근해 오는 타티아나를 보며 사냥개들이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검이 겨누어졌다. 물 주변을 냉각시키는 무언가도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저, 바보!”

이미 붙잡힌 티나가 인어의 눈물을 흘렸다.

모두 제 잘못이다. 등 뒤에선 불꽃이 일렁이고, 물길은 급속도로 얼어붙어 갔다.

그리고 인어들은, 너무도 쉽게 인간에게 붙잡혔다.

“제 발로 달려들다니.”

“정말이지 멍청한 인어군.”

이곳부터는 뜻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인간의 영역이었다.

인간들에게 붙잡힌 타티아나를 향해 날카로운 검이 겨누어졌다. 찢어지는 절규 소리가 이어졌다.

“미안해… 미안해, 언니.”

세상이 이런 곳이었다면 보고 싶어 하지 않았을 텐데.

이런 끔찍한 곳인 줄 알았다면 타티아나 말대로 물속에 머물렀을 것이다.

불과 검과 피가 흐르는 이런 세상 밖 따위는 절대 궁금해하지 않았을 거란 말이다.

“언니!”

티나가 울부짖으며 끌려가는 타티아나를 보고 목 놓아 외쳤다.

그 모든 걸 지켜보는, 지켜볼 수밖에 없는 레온 역시 두 자매의 고통을 온전히 느껴야만 했다.

밀어두었던 인어의 숙명이 파도에 잘게 부서져 간다.

모든 게 끔찍한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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